템빨 79권 - 20화
파지지직!!
풍경이 수만 갈래로 갈라진다.
청룡의 몸에서 흐르는 뇌기가 시야를 훼방 놓는 여파다.
초월자의 감각과 인공 감각이 연신 위험을 경고했다.
<뇌신>이라는 스킬을 토대로 짐작 할 수 있듯이, 청룡은 뼈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생명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용의 형상을 한 번개였다.
존재 자체가 위협인 것이다.
‘백호가 청룡을 무슨 수로 이겼다는 거지?’
백호는 거대한 호랑이였다.
키와 길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산처럼 거대하다는 과장을 보태기에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기파마냥 솟구치는 신격에 너울지는 새하얀 털이 아름답고 신비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누가 봐도 ‘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감.
하지만 청룡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다소 초라했다.
청룡 앞에선 거대한 몸집도 평범한 크기로 전락해버렸고 백색의 신격은 뇌기 섞인 청룡의 푸른 신격과 비교해서 너무 온순하게 느껴졌다.
상대적으로 고양이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그만큼 청룡이 크고 강렬했다.
한 눈에 봐도 백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지만.’
이건 상성의 문제다.
청룡은 드래곤과 종 자체가 달랐다.
용이되 동방의 용인지라 지면을 디딜 발이 없었다.
상시 비행하며 비구름의 도움 없이도 천둥번개를 숨결로 토해댔다.
반면 백호는 지신(地神) 즉, 땅을 다스리는 신령이다.
땅에 구애될 수밖에 없으니 땅에 발 자체를 디디지 않는 청룡을 상대로 이점이 적었다.
청룡이 입에 물고 있는 <여의주>처럼 어떤 특별한 신물을 지닌 눈치도 아니었다.
실제로 미르가 대놓고 말했다.
사신 중 청룡이 가장 강했다고.
청룡은 충격적인 신화의 주인이기도 했다.
태초신 한울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놓은 신화.
한데 마지막 싸움에서 백호는 청룡을 무슨 수로 이겼단 말인가?
‘백호와 청룡이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는 청룡이 한울의 가슴을 뚫기 전이었겠지만...’
아무튼 백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저력을 지닌 듯하다.
그리드가 청룡과 백호를 빤히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허접쓰레기.
백호가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백 년 만에 부활해서 하는 첫 마디치고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조용히 그리드를 바라보던 청룡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놈이 여전히 주둥이는 살아있구나.
-봉인 되는 과정에서 크게 다쳤다고 들었는데 그때 하필 머리를 가장 심하게 다쳤나? 나하고 싸워서 진 기억을 그새 잊은 게야?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네놈이다.
-내가 1,000번째 승리를 거뒀어야 할 날 발생한 이변들 덕분에 운 좋게 얻은 부끄러운 승리를 논하는가?
-과연 패배자답게 혀가 길군.
‘...99번도 아니고...’
999번 지고 1번 이겼던 거냐...
최후의 승자가 진정한 승자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저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혀를 내두르는 그리드의 좌우로 주작과 현무의 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자를 앞에 두고 무슨 추태란 말이냐.
그리드는 종종 주작을 어머니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곤 했다.
항상 따스하게 상처를 보듬어줄 뿐만 아니라 말투부터가 상냥했기 때문이다.
배려와 애정이 가득 담긴 마음씨가 고스란히 느껴졌었다.
현무 또한 마찬가지다.
오래간만에 만난 오늘, 두 신이 자신에게 극진한 존칭을 쓴다는 사실에 그리드는 내심 서운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토록 상냥한 이들이.
-그대들을 잊지 않고 봉인을 풀어준 이들이다. 저들께 감사의 인사를 건네기는커녕 서로 으르렁 대는 꼴이 생김새 그대로 짐승과 다를 바 없구나.
-그대들이 신이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겠어. 차라리 가짜 신화 속에서 살아가던 시절이 좋았다는 말까지 나올 듯한데.
청룡과 백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듣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파는 수준.
여태껏 주작과 현무가 보여준 성격들을 고려하면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애초에 중재자 역할로 찾아온 거 아니었나?’
이러다간 싸움을 말리는 게 아니라 패싸움을 일으키게 생겼다...
그리드가 걱정했지만 다행히 분위기는 금세 진정됐다.
-미안하오.
-나도 사죄하겠노라.
청룡과 백호는 의외로 주작과 현무에게 순종적이었다.
아니, 어느 정도 상식적이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부끄러운 줄 알고 그리드와 은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특히 그리드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그리드의 의지에 호응해서 의식을 되찾고 부활한 그들은 그리드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짧지만 강렬하게 교감한 결과였다.
침략자들의 역겨운 악의가 만든 두터운 봉인을 가볍게 돌파해버린 강력한 의지...
비범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대단했다.
동대륙 신화의 주역인 그들은 단숨에 간파한 것이다.
그리드 또한 어느 신화의 주역이고 어떤 신계의 주신임을.
-귀하는... 몹시 짧은 역사를 지니고도 고강하구려...?
그리드에게 예를 표한 뒤 일행을 더욱 노골적으로 관찰하던 청룡의 얼굴에 문득 노기가 번졌다.
미르와 예음의 정체를 간파한 까닭이다.
영리한 미르와 예음은 당연하게도 기운을 갈무리하고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사신의 기감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청룡에 이어 백호도 살기를 드러냈다.
두 신은 떠올렸다.
그리드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강력한 의지를 전달했는지.
칼을 들고 춤을 췄었다.
감정, 사상, 상징 따위를 재현했던 검무.
그건 역겨운 침략자들의 문화였다.
-네놈들, 한울의 수하렸다.
-저자가 기형적으로 고강하다 싶더니 한울에게 대적하는 돌연변이쯤 되나보군.
-몰염치한 놈들! 네놈들의 파벌 싸움에 우리를 끌어들일 작정이더냐! 우리가 저 착해빠진 현무나 주작처럼 쉽게 회유 될 것 같더냐!
-우리들 신이란 인간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법이다. 먼 과거에도 말했듯이 너희들의 도구 따위로 전락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쿠르르르릉!!
‘썩을. 어쩐지 잘 풀린다 싶더라.’
그리드는 청룡과 백호가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짐작했었다.
자칫 큰 싸움이 생길 수도 있음을 각오했다.
한데 의외로 일이 잘 풀려서 당황하던 차에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저자들은 변한 게 없군.
주작과 현무 또한 올 것이 왔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크게 당황하지 않고 신격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본신을 현현시켜 중재 할 생각 같았다.
-...!?
-이건...? 안 되겠소...
움찔 놀란 주작과 현무가 즉시 행동을 멈췄다.
-환국의 신들이 지상에 강림했습니다. 씽과 초를 포위하고 있군요. 저희가 자리를 비워서 결계가 풀리는 순간에 기습을 가할 요량이겠지요.
환국 입장에서 그리드에게 청룡도를 빼앗긴 사건은 갑작스러운 기습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이후의 대응이 필요 이상으로 늦었다.
적어도 우람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무렵엔 환국의 신들도 이변을 눈치 챘어야 옳았다.
아무리 늦어도 그리드 일행이 활빈당의 본거지에 도착하기 전엔 지상에 강림했어야 상식적으로 이해가 됐다.
하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의아했는데 씽국과 초국을 포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통수다.
청룡과 백호의 성격을 뻔히 아는 환국의 신들은 이후의 전개를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주작과 현무의 도움 없이는 청룡과 백호를 감당하지 못할 걸 알고 선택을 강요했다.
씽과 초를 희생해서 청룡과 백호를 중재하고 피신시킬 건지.
아니면 기껏 봉인을 푼 청룡과 백호를 포기 할 건지.
“이거... 상황이 너무 안 좋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능글맞던 황길동의 얼굴이 드물게 딱딱하게 굳었다.
“진법이 두 신의 신격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는 군요. 일다경 내로 깨질 겁니다.”
그 즉시 본거지의 위치를 발각 당할 것이다...
머리를 감싸 쥔 황길동이 말을 이었다.
“최악의 경우 모든 걸 잃게 되겠군요.”
청룡과 백호가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 환국의 신들이 현장에 난입할 경우.
그리드 일행은 전멸을 피하지 못한다.
청룡과 백호는 재차 봉인 당할 것이며 이후 동대륙의 상황은 더욱 암담해 질 것이었다.
황길동과 활빈당이 궤멸하고 사라진 대륙에서 청룡과 백호의 새로운 봉인처를 그 누가 수색한단 말인가.
그리드 혼자서 해낼 만한 일이 아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그리드가 청룡과 백호를 찾아내기 전에 환국의 신들이 씽국과 초국을 침략 할 방법을 찾아내는 게 먼저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환국의 신들이 대거 지상에 강림한 상태다.’
오늘 여기서 그리드의 신화마저 멸망하는 수가 있다...
황길동의 침음이 깊어지는 가운데 그리드는 시스템에 질문하고 있었다.
‘일다경이 몇 시간이었지?’
한 시진은 2시간이고 일다경은 4시간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정확히 확인 할 필요가 있다.
[15분입니다.]
‘미친?’
4시간을 뜻하는 단위는 일다경이 아닌 일경이었다...
삐질, 식은땀을 흘린 그리드가 일단 대화를 시도했다.
“두 신은 들으시오. 나는 템빨계라는 신계를 만든 템빨신으로 환국과는 일체 관계가 없소. 오히려 환국의 적이란 말입니다.”
-템빨계라는 건 생전 처음 듣는군.
-나 또한 같다.
“그동안 봉인당해 있었으니까 모르지!”
-저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늘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믿고 매몰되는 자들이라 말 안 통하는 금수로 여기심이 옳아요.
주작의 신랄한 비판이 계속 됐지만 청룡과 백호는 동요하지 않았다.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는지 ‘주작은 과연 우리에 대해서 잘 안다’는 둥 지껄이며 당당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무력으로 제압하시죠.”
어느새 미르가 그리드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당사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사신의 힘을 모조리 운용하는 모습이 듬직했다.
“저들은 지금 막 봉인에서 풀려나 힘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승산이 있습니다.”
다만 15분 내에 제압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일 뿐.
[타임어택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시스템이 상황을 긴급 퀘스트로 판정했다.
높은 난이도를 방증하듯 화려한 보상 내역이 그리드를 한층 더 긴장시켰다.
그의 등과 미르의 등이 맞닿았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한다.
“여기.”
미르가 맨손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그리드가 검 몇 자루를 건네주었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서 써.”
드래곤 웨폰은 아니다.
드래곤 웨폰은 오직 그리드와 드래곤 슬레이어, 그리고 검성과 그리드의 사도들만 다룰 수 있는 신병이기니까.
하지만 그리드에겐 드래곤 웨폰 외에도 신병이기라 불릴 만한 무기가 많았고 미르는 그것들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었다.
“쉬운 상대부터 노리도록 하지.”
그리드의 말에 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시선이 백호에게 향했으므로 청룡은 웃었고 백호의 얼굴은 왈칵 구겨졌다.
-내가 저놈보다 강하노라!!
크와아앙!!
백호가 포효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동시에 순보를 전개했기 때문에 그리드와 미르는 이미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꽈장창창!!
그리드와 미르의 검이 백호의 발톱과 충돌하며 굉음을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백호님!!”
금의 성역이 펼쳐지기 시작한 현장에 청호가 나타났다.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다.
감언이설로 설득이라도 할 눈치였다.
백호는 제 핏줄이 환국의 끄나풀로 전락했음을 눈치 채고 한탄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지난 수백 년의 시간을 원망했다.
그에게 청호가 다급히 외쳤다.
“백호님 그러다 죽어요!!”
-...?
-...?
귀를 의심하는 청룡과 백호.
그들의 두 눈이 동시에 부릅떠졌다.
다른 이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백호의 성벽과도 같은 가슴에서 핏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79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