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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01화 (1,599/1,794)

템빨 79권 - 19화

“미르 공의 기억을 지웠다?”

활빈당 본거지.

무릉도원마냥 격리 된 이곳은 신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다.

입장 과정이 몹시 신비했다.

일행을 이끌고 일상적인 장소를 배회하던 황길동이 도중에 마주치는 행인들과 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그러길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자연히 어떤 진법 안에 발을 들이게 됐다.

활빈당원이 아니라 정말로 평범한 사람들과 나눈 대화가 중첩되면서 자연히 술법이 완성 된 것이다.

직접 체험하고도 믿기지 않는 구조였다.

“삼사가 최악의 수를 뒀구려. 물론 그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외다. 한울의 검이 환국의 대적에게 호감을 품었으니 경계해야 마땅했겠지.”

다만 그 행동이 검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지금쯤 통탄하겠군.

히죽히죽 웃는 황길동에게 노검마가 물었다.

“한 대 때려도 되오?”

고수의 일격처럼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황길동이 조금 당황했다.

“다짜고짜 무슨 망발이오?”

“웃는 낯짝을 보니까 화가 솟구쳐서 말이오. 어차피 그대는 내게 죄를 짓지 않았소? 속죄하는 의미에서 한 대만 맞아주시오.”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속이는 게 기본이라고 내 누차 말해왔건만... 기어코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벌써 몇 번째나 속아 넘어간 당신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보오. 안 그렇습니까, 덕신?”

“...덕신 아닙니다만.”

“옛 추억도 되새길 겸 판덕신이 좋겠습니까?”

“템빨신이라니까.”

“흐음, 템빨신보단 덕신의 어감이 정겹고 좋은데 말이지요. 제게 템빨이라는 낱말이 낯설듯이 템빨신께는 덕이라는 낱말이 낯선가 봅니다.”

“낯설고 낯익고를 떠나서 누가 봐도 템빨이 훨씬 낫습니다.”

사실 일반적인 관점에선 둘 다 별로였지만 그리드는 진지했다.

황길동도 어쩔 수 없이 템빨이란 말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한편 제사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다.

청룡도와 백호창에 봉인 된 두 사방신.

그들의 봉인을 동시에 풀기 위한 채비를 활빈당원들이 갖춰나가고 있었다.

고운 색동저고리 차림의 여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침 가을이기도 하여 제사를 열 조건은 쉽게 충족 될 듯합니다.”

청룡은 겨울을 좋아하고 백호는 여름을 좋아한다고 한다.

하여 두 신의 봉인을 풀기 위해선 가을이나 봄에 제사를 올리는 거로 타협을 봐야 한다고.

두 신의 성격이 얼마나 개차반일지 그리드는 쉽게 상상이 갔다.

“이제 현무 신과 주작 신께서 사당에 무사히 도착하시면 되는데 과연 환국의 신들이 잠자코 지켜만 볼지...”

“백호와 청룡의 봉인을 푸는데 왜 주작과 현무의 도움이 필요한 겁니까?”

주작과 현무의 봉인을 푼 당사자가 바로 그리드다.

그래서 제기 할 수 있는 의문이었다.

여인이 설명했다.

“백호 신과 청룡 신께서 충돌 할 가능성을 좌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무 신과 주작 신께서 중재를 맡아주셔야만 두 신을 진정시킬 수 있겠지요.”

‘거참 애도 아니고.’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생리(生理)인 것이다.

청룡과 백호가 견원지간인 것은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 순순히 인정하고 대책을 마련함이 옳았다.

짤랑.

문득 들려오는 방울소리가 그리드를 경직시켰다.

그에게 방울이란 무신 치우를 떠올리게 만드는 도구였으니까.

물론 이곳에 치우가 찾아올 리 없다.

방울소리는 색동저고리 여인의 부채에 달린 방울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사라기 보단 굿판을 준비하는 느낌이군요.”

여인의 차림새가 꼭 무당 같지 않은가.

제사상 뒤로 펼쳐놓은 사방신의 신상과 마당 한쪽에 마련 된 작두를 보면 자연히 굿판이 떠올랐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단순한 제사보단 굿이 더욱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판단했거든요.”

굿은 신을 강령시키는 수단이다.

강령시켜 봉인을 푼다...

황길동과 활빈당의 노림수였다.

미르도 옳다고 보았다.

“청룡이 사방신 중에서 유독 고강했습니다. 환국의 신들은 청룡의 봉인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청룡은 다른 사신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청룡도에 봉인 됐죠. 차라리 하나로 결속 되었다는 표현이 옳습니다.”

단순히 청룡도 하나를 매개로 봉인을 푸는 건 불가능하다.

별도의 의식이 필요했는데 제사를 모시는 정도론 약했다.

고작 제물을 봉헌하고 기도를 올리는 행위로 청룡의 의식을 일깨우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굿의 강제력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군.”

그리드는 동대륙의 낯선 문화를 존중해주었다.

새로운 개념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이해했다.

‘무당도 히든 클래스인가?’

그리드는 천국에 있는 칸과 무저갱에 봉인되어 있는 칠악성들, 그리고 바알에게 붙잡혀 있는 파그마와 알렉스의 영혼을 떠올렸다.

무당의 특기가 강령술인 이상 앞으로 여러모로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리드가 여인에게 물었다.

“혹시 완전히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대상을 강령시키는 것도 가능합니까?”

“물론 가능하지요. 애초에 신을 부르는 의식입니다. 대부분의 신께서 인계와는 동떨어진 장소에 계시니 차원에 구애 받지 않지요.”

“신을 부르는 의식... 혹시 전설이나 반신을 대상으로 삼을 순 없는 건지?”

“예.”

“...”

역시 쉬울 리가 없구나.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그리드가 문득 거슬리는 부분을 발견했다.

날이 위를 보고 누워있는 2개의 큰 작두.

번쩍번쩍 광이 나는 탓에 관리가 잘 된 것처럼 보였지만 겉만 번지르르했다.

그리드의 통찰력으로 봤을 땐 날이 무딘 부분이 많았다.

‘날이나 갈아주자.’

제사음식은 거의 다 준비됐고 제사상 좌우로 자리한 사물패는 장구와 꽹과리 등을 치며 합을 맞춰보고 있었다.

굿판의 중심이 되는 무당은 맑은 물을 떠놓고 신명께 기도를 올렸으며 황길동은 미르와 함께 전체적인 상황을 조율했다.

그리드와 예음만 멀뚱멀뚱 서서 한가한 것이다.

“송편 맛있겠다.”

그리드는 떡이나 탐내고 앉은 예음과 동급으로 취급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성격이 부지런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할 일을 찾았다.

굳이 망치와 모루를 꺼낼 것도 없이 사포를 써서 작두의 날을 바짝 세우기 시작했다.

강옥을 써서 만든 최고급 사포였기 때문에 수월했다.

잠시 후.

마주친 손바닥을 빙글빙글 돌리며 신명께 기도를 올리던 무당이 천천히 눈을 떴다.

긴 명상을 끝낸 사람처럼 눈동자가 한층 더 맑아진 상태다.

얼핏 귀기가 서린 것처럼도 보였다.

‘미약하게나마 신격이 느껴진다.’

그리드가 내심 감탄했다.

자신이 섬기는 신을 제 몸에 강령시킨 무당을 보면서 활빈당 소속답게 돌팔이는 아니구나 싶었다.

“주작과 현무가 가까워져 오는군... 슬슬 시작하겠다.”

무당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하루에 담배를 3갑 이상 태울 것 같은 걸걸한 아저씨의 목소리로 다짜고짜 반말을 지껄였다.

수장으로 섬기던 황길동을 몸종처럼 부리는 걸로 모자라 미르와 예음에겐 반푼이 놈들이라며 호통을 쳐댔다.

다만 그리드에겐 일언반구도 없었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피하는 눈치였다.

눈길 한 번 보내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했다.

-오랜만입니다.

-반갑소, 템빨신.

마침 주작과 현무가 현장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본체가 아닌 ‘의식’이었다.

그리드가 보유하고 있는 주작의 심장과 현무의 등껍질을 매개로 강림했다.

그들을 모셔오기 위해 떠났던 황길동의 분신에게 사정을 설명 듣고 나서주었다.

흡족한 표정을 지은 무당이 부채를 펼치고 소리쳤다.

“오호 통재라! 긴 세월 동안 수모를 견뎌온 청룡과 백호가 가엾다! 너희들 인간이 저들을 잊지 않았다면 쫓겨난 신들에게 무참히 패배하는 굴욕을 겪지 않았을 터인데 안타깝도다!”

짤랑짤랑짤랑!

요란한 방울소리를 내는 무당의 부채가 황길동의 정수리를 퍽 때렸다.

괘씸하다는 듯이 혼쭐을 내는 모양새였다.

“풋.”

노검마가 좋다고 웃었다.

그 결과 괜히 무당의 시선을 끌고 자신 역시 부채에 정수리를 얻어맞았다.

찔리는 게 많았던 예음이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굿판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정체 모를 잡신에게 얻어맞는 굴욕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다행히 무당은 그녀를 해코지하진 않았다.

무당에게 깃든 신은 양반들을 비난하되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보였다. 의식에 특화됐을 뿐 격 자체는 그리 높지 않음을 방증했다.

촹촹촹~!!

북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점차 요란해졌다.

짤랑짤랑짤랑!!

무당의 부채에 달린 방울소리가 끝 모르고 빨라졌다.

일대가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청룡이여! 백호여! 그대들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자들이 그대들의 강림을 바라고 있소이다! 이 부름을 듣고 어서 눈을 뜨시...! 커헉!!”

부채를 흔들며 춤사위를 펼치던 무당이 갑자기 검붉은 피를 토했다.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아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진짜로 내상을 입었다.

“봉인에 담긴 환국 신들의 의지가 나를 밀쳐내려 하는구나...! 더 세게! 더 세게 두드려라!! 나의 부름이 두터운 봉인을 뚫고 청룡과 백호께 닿도록...!!”

둥둥! 탕촹촹~!!

사물패가 꽹과리와 장구를 뚫어버릴 기세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연주하듯 땀에 흠뻑 젖은 그들도 무당처럼 신내림을 받은 듯했다.

그리드도 조금 압도당할 정도로 굿판의 분위기는 대단했다.

열기가 가일층 증폭되는 가운데.

“청룡과 백호께 내 의지를 확실하게 전하리라!!”

부채를 집어던진 무당이 커다란 장군칼과 오방기를 꺼내 쥐었다.

신명나게 흔들어대면서 제 살을 장군칼로 마구 베기 시작했는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장군칼의 날이 보기보다 무딘 것도 이유였지만 신격의 영향이 더 컸다.

무당이 두르고 있는 희미한 신격이 무당에게 장군칼의 날을 견디는 가호를 내린 것이다.

“봉인 너머 청룡과 백호는 집중하시오! 그대들의 눈과 귀를 가린 사악한 신들의 의지를 나의 의지가 돌파하는 순간을 놓치지 마시오!!”

급기야 버선을 벗어던진 무당이 작두 위로 폴싹 날아올랐다.

서걱!

“끼야아아악!!”

“...”

“...”

무당이 두른 희미한 신격으로는 그리드가 직접 날을 세운 작두의 예리함을 견뎌내지 못했다.

작두에 올라타자마자 발이 크게 베여선 쓰러진 무당이 핏물을 흩뿌리며 나뒹굴었다.

“살...! 살을 맞았다...!”

한참동안 비명을 내지르던 무당이 힘겹게 상황을 정리했다.

사악한 환국의 신들이 작두에 사술을 부린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대로는 굿이 실패할 거라고 한탄하면서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 챈 그리드가 민망해서 헛기침하던 도중 예음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드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쭉 주시해온 그녀는 작두에 사포질 하던 그리드의 모습을 목격한 바 있다.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 탓에 그리드는 더 이상 상황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괜한 오해를 사고 신뢰를 잃을 거란 생각에 쓰러진 채 벌벌 떠는 무당의 장군칼과 오방기를 빼앗아 들고 작두 위에 올랐다.

작두타기 춤의 요지는 ‘대상에게 의지를 전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다.

파그마의 검무가 본래 제사에서 쓰이던 것이란 사실에 희망을 걸기도 했다.

그리드 자신이 무당을 대신 할 가능성이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다.

그리드의 판단은 옳았다.

맨발로 작두에 올라 탄 그가 천의 검무를 서서히 펼치는 순간.

[당신의 강력한 의지가 사방신 ‘청룡’과 ‘백호’에게 전해집니다.]

[두터운 봉인에 갇혀있던 청룡과 백호의 의식이 깨어납니다!]

꽈장창창!!

제단 위에 놓인 청룡도와 백호창이 요란하게 흔들린다 싶더니 급기야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청룡과 백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나 거대한지 백호의 몸은 웅크리고도 넓은 사당을 가득 채웠고 청룡의 몸은 똬리를 틀고도 사당의 지붕을 꿰뚫어버렸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현장의 모두가 하나 같이 경악한 얼굴로 그리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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