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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00화 (1,598/1,794)

템빨 79권 - 18화

“쾌속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미르는 속전속결을 조언했다.

“제가 당신의 습격을 받아 패배했다는 소식이 곧 환국에 전해질 테니까요.”

삼사가 대책을 세우기 전에 결단하고 움직여야 백호창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청룡과 백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다.

아스가르드에서 쫓겨난 신들이 동쪽으로 피신오기 전.

즉, 이 땅의 신화가 온전하던 시절 청룡과 백호는 경쟁자였다.

함께 대륙을 수호하되 서로의 힘을 경계하고 시기해서 몹시 의식했다.

그건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두 신의 해방이 한날한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였다.

만약 둘 중 누군가가 먼저 봉인에서 풀려날 경우.

봉인에서 늦게 풀린 쪽은 자존심이 상해 무슨 사고를 칠지 몰랐다.

“그러므로 백호창을 확보하는 게 우선입니다.”

사실 미르는 자신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단 사실을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다.

양귀비를 현무의 독과 함께 대량으로 섭취한 것처럼 의식이 몽롱하고 기억들은 흐릿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던 차에 그리드가 나타난 것이다.

템빨신.

광신광룡의 주역.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최우선 순위로 척살해야 한다고 삼사들이 조언했던 대상.

응당 적이라고 믿었던 그가 나를 생명의 은인 취급해주었다.

그제야 몽롱했던 의식이 조금쯤 맑아졌고 풀리지 않던 의문들이 일부 해소됐다.

영리한 미르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신뢰해야 할 대상은 환국의 신들이 아닌 눈앞의 템빨신이라는 사실을.

분노와 살의로 일그러졌던 그리드의 얼굴이 예음의 외침을 듣는 순간 눈 녹듯 풀리는 모습을 보면서 품은 확신이다.

“가자.”

과연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그를 신뢰하듯 템빨신 역시 나를 신뢰해주었다.

나의 주장에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즉시 호응했다.

덕분에 미르는 일말의 망설임마저 버렸다.

파국과 연결 된 다리를 지상으로 불러왔다.

오작교.

까마귀와 까치들이 은하수를 이루는 다리를 그리드와 함께 건너 지금에 이른다.

***

“저토록 고강하신 분께서 정녕 내게 목숨을 빚졌었다고?”

악룡 번헬리어의 기세를 재현하는 그리드의 검무가 미르를 감탄시켰다.

백호창의 주인 우람이 그리드의 공격을 단 일합도 버티지 못했다.

“도대체 얼마나 지독한 함정에 빠지셨기에 자신보다 한창 하수인 내게 도움을 받았단 말인가.”

“뭐래? 그때 당시엔 미르 네가 저자보다 고수였어.”

“...그럴 리가 없다.”

“지, 진짜라니까? 지금은 네가 너무 약해져서 그래.”

예음이 설명해주었지만 미르는 믿지 못했다.

당연하다.

예음의 말은 절반만 정답이었으니까.

미르에게 목숨을 빚졌을 당시의 그리드와 현재 그리드의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과거의 미르보다 훨씬 더 강한 수준이다.

그리드의 성장 속도가 비상식적으로 빠르단 의미다.

미르는 예음의 설명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예음도 자신의 기억이 잘못 된 건 아닐까 의심하는 중이었다.

과거에 만났던 그리드와 오늘 만난 그리드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으니까.

예전에도 괴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은 위대하게 다가왔다.

어지간한 환국의 신들보다 더 대단한 신격을 지녔기에.

‘사실 태초 신들이 숨겨놨던 자식 아니야?’

혹은 실종 된 악신 야탄의 화신(化身)이라던가.

예음의 생각이 황당무계한 지경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검무... 그대가, 템빨신인가?”

우람의 스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흉포하게 날뛰는 용의 기운을 갈무리하는 그리드에게 집중 됐던 시선이 우람에게 쏠린다.

하나 같이 경악한 표정들.

설마 우람이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던 눈치다.

악룡의 힘이 깃든 6융합 검무가 그만큼 흉흉했다.

확정 된 죽음을 선사하는 수준.

반신의 격으로는 감당 못할 것만 같았는데 우람이 견뎌낸 것이다.

정작 그리드의 반응은 태연했다.

바르바토스의 시야로 우람의 위치를 포착하고 순보를 쓴 순간.

6융합 검무를 연계하기 직전에 우람이 자신의 접근을 눈치 챘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과연 미르 다음이라는 양반답게 우람의 기감은 훌륭했고 판단도 빨랐다.

즉시 백호의 기운을 극성까지 끌어올려 백호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백호창에는 백호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다.

봉인의 강제력에 이끌린 백호의 영혼은 우람의 의지에 저항하지 못하고 가호를 내렸다.

그 결과 우람의 몸은 그리드의 6융합 검무에도 어느 정도 저항할 정도로 단단해졌다.

그래, 어느 정도는.

“...구웨엑!”

우람은 고작 한 마디 질문을 던진 대가를 참담하게 치렀다.

입에서 검붉은 피와 내장의 파편들을 쏟아냈다.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내상의 흔적이었다.

“후우... 후우... 그래, 나는 오래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해왔다.”

우람은 주작의 기운을 운용하지 않았다.

회복과 재생을 도모하지 않고 백호의 기운만을 붙잡아두었다.

유일하게 미르가 그 이유를 눈치 챘다.

‘백호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약화되는 순간 몸 속 장기가 모조리 산산조각 나 죽을 거다.’

우람의 실력은 결코 얕지 않다.

양반 중 미르 다음가는 실력자라는 건 어지간한 신보다 무위가 높다는 뜻이 됐다.

사신의 기운을 모조리 동시에 운용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럼에도 이 순간 우람이 백호의 기운에 집착하는 이유는 미르의 추측대로였다.

죽음을 유예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쓰는 것이다.

“파그마가 정녕 무가치한 존재였다면 한울께서 굳이 그를 제사장으로 키우려 하셨을까? 제사장은 신이 되지 못할지언정 한울과 교신하는 위계이므로 결코 하찮지 않거늘. 또한 치우께서도 파그마가 탈출할 수 있게끔 친히 돕지 않으셨던가.”

꽈드득!

태산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정도로 강맹한 검무.

그리드의 6융합 검무에 정통으로 베이고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백호창을 우람이 더욱 꽉 쥐었다.

백호의 기운을 활성화시킨 여파로 단단히 굳은 몸이 거대한 창과 일체화되어갔다.

마치 하나의 석상 같다.

“언젠가 내가 죽는다면 그건 파그마에 의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게 원한을 품은 존재 중 오직 파그마의 잠재력만이 거슬렸기에.

“파그마의 힘을 계승한 네게 죽는다고 해서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지. 도리어 섭리다.”

쿠오오오오!!

어느새 대지 전체가 우람의 의지에 호응하고 있었다.

도시를 이루는 흙과 돌 따위가 해일처럼 일어나서 날뛰어댔다.

거대한 조각품을 보는 듯했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암석의 파도가 워낙 거대한 탓에 움직이고 있다는 실감이 없었다.

“너라는 섭리를 거슬러 나를 초월하겠다.”

오늘 나는, 드디어 신이 된다.

템빨신과 싸워서 이기면 그 즉시 새로운 신화의 주역이 되는 것이고, 설령 패배해 죽을지언정 신화의 파편이 되어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

승패의 결과와 상관없이 이득이었다.

템빨신의 위계가 그만큼 높았다.

“우오오오오!!”

콰르르르르륵!!

멈춘 듯 보였던 암석의 파도가 급격히 들썩였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가속하고 있음을 뜻했다.

땅과 하늘을 온통 뒤덮어 그리드와 우람의 시야를 축소시킨 그것은 순보의 사용을 금하는 법칙을 세웠다.

오직 정면 승부를 강요했다.

우람은 장렬한 최후를 바라고 있었다.

진원진기를 소모했다.

그가 내지르는 기합에 깃든 기운이 그리드가 지닌 초월의 격을 연신 자극해댔다. 위험을 경고했고 드래곤 아머의 비늘들이 호응하듯 흡착과 발산을 반복했다.

‘힘든 상대였겠구나.’

광신광룡의 칭호를 얻기 전.

한창 청룡과 백호의 봉인을 풀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시기가 있다.

그때 그리드는 최소한 백호창 정도는 쉽게 확보할 수 있으리라 믿었었다.

만약 가야와 파국이 오작교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미르가 파국을 지원 할 가능성이 낮았다면 그리드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파국을 습격했을 것이다.

...오만이었다.

그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비록 회광반조일지언정 우람은 몹시 강력했으니까.

“순순히 항복 할 생각은?”

코앞까지 다가온 암석의 파도 앞에서 그리드가 물었고,

“나를 초월하겠노라 선언했을 텐데!”

우람의 의지는 견고했다.

구차하게 연명해서 점차로 도태되다 잊히느니 목숨을 건 결전에 임했다.

까드득, 까드드득!

끝을 모르고 단단하게 벼려지는 백호창의 기세가 그리드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양반을 회유한다는 건 본래 쉽지 않지.’

미르의 경우가 워낙 특이한 것이다.

아쉬움을 달랜 그리드가 거세안을 발동했다.

백호의 기운을 일부 삭제하더니 증폭공을 활성화시키고 입에서 브레스를 뿜었다. 우람이 밟고 선 파도를 때렸다.

꽈르릉!!

파도의 일각이 무너진다.

미세하게나마 우람의 신형이 흔들렸고 그리드의 검무는 정확히 그 틈을 노렸다.

서걱!

콰드드드드득!!

소름 돋는 파열음이 연달아 발생했다.

우람의 몸이 수십 회 베인 직후였다.

꽈작...!

백호창이 그리드의 복부에 꽂혔다.

우람이라는 반신의 수백 년 삶이 담긴, 미약한 신화들이 깃든 창.

어지간한 태산보다 훨씬 더 묵직했다.

몸이 붕 떠오르고 만 그리드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쏟아졌다.

주황색 신성에 섞여 금세 흐릿해졌으나, 우람은 똑똑히 목격했다.

그러므로 만족해서 웃었다.

갈기갈기 찢겨나간 육신의 격통을 쾌락으로 여기며.

“영광, 이었다.”

양반으로 태어나 신이 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우람은, 늘 불안했다.

언젠가 환국이 힘을 갖추고 아스가르드를 침략하는 날.

그때 자신이 어떤 존재이던 결국엔 한울의 병졸 중 하나로 서술 될 거란 걱정에서였다.

‘신들의 전쟁’이라는 역대 최악의 신화는, 일부 주신을 제외한 신들을 대부분 하찮은 것으로 전락시킬 정도로 무지막지한 규모를 자랑했으니까.

우람은 자신이 그저 그런 최후를 맞이하고 잊힐 거라는 사실이 끔찍하게도 싫고 두려웠다.

그래서 더욱 더 치우의 인정에 집착했다.

미르와 달리 무신이 되기를 꿈꾸진 못했으나 치우의 인정을 받는 신이 된다면 적어도 허무하게 잊히진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오늘 그리드를 만난 순간 자신의 목표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눈치 채고 말았다.

고작 몇 해 전에 치우의 시련을 통과했던 그리드가 어느새 나를 아득히 초월하지 않았나.

저쯤 되어야 치우의 인정을 받는 거구나 싶었다.

긴 세월 꾸었던 꿈을 버리고 템빨신 신화의 일부가 되기를 택하게 된 이유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기이하고 극단적인 선택.

그리드는 이해해주었다.

“내 안에서 살아가라.”

[템빨신 ‘그리드’가 21번째 서사시를 써내려 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죽어가는 반신을 품에 안은 그리드의 결심으로부터 비롯합니다.]

쏴아아...

그리드의 배려 속에서.

감격한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우람이 잿빛으로 산화해갔다.

“너희들에게도 아픔이 있었구나.”

술렁이는 양반들에게 그리드가 묻는다.

“너희들도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증거겠지? 예를 들어서 너희들에게 상처를 입어온 인간들의 아픔 말이야.”

[그는, 반쪽짜리 신들을 속박해온 굴레가 있음을 이해했다.]

“...”

공교롭게도 섣불리 대답하는 양반이 없었다.

하지만 미르를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봐온 예음은 고개를 숙였다.

깨닫는 바가 큰 눈치였다.

그리드에겐 희망이었다.

“앞으론 더 나은 방법으로 숭배를 바라는 게 어떠냐. 도무지 모르겠으면 내가 도와줄게.”

그리드가 설득했다.

과거 가람 때문에 품었던 편견과 원한들을 버리면서다.

인류의 편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그에겐 있었으니까.

[나는 신이 되겠다는 약조를 지켰노라.]

[너희를 품을 자격이 지금의 내게는 있노라.]

[그가 기회를 주었다.]

[군림하는 방법 외엔 몰랐던 반쪽짜리 신들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의 품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죽어가는 형제의 모습이 그들의 마음을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들 신의 은혜가 하해와도 같다.]

...

..

[서사시의 스물 한 번 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인류와 양반의 친밀도가 오릅니다.]

[양반들의 선민의식이 눈에 띄게 옅어집니다.]

[앞으로 양반들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그 마음이 인간들에게도 서서히 전달 될 것입니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당신과 양반의 관계가 크게 바뀝니다.]

[앞으로 양반들은 환국의 명령을 따르기에 앞서 당신의 뜻에 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양반을 섭외 할 확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템빨계의 주민이 되기를 희망하는 양반이 점차 늘어날 것입니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당신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여기까지 바랐던 건 아닌데.

당황한 그리드가 잠시 넋을 잃었고 양반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르와 예음만이 남아서 그리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과연 덕신이시오!”

황길동의 박수갈채가 어색한 공간에 그나마 활기를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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