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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99화 (1,597/1,794)

템빨 79권 - 17화

“저놈조차 저토록 고강한데 훗날에 미르는 무슨 수로 감당해야 하지?”

“지금 당장 죽게 생겼구만 훗날을 걱정 할 겨를이 있소? 사태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걸 보아 머리를 크게 다쳤나?”

노검마와 황길동은 백호창을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파국에 잠입하고 장장 반 년 동안 양반들의 주변을 맴돌며 서서히 접근했고 끝내 백호창의 수호자와 교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양반을 열렬히 숭배하는 광신도 상인으로 위장했다.

활빈당의 수장인 황길동은 부패한 관리들로부터 빼앗은 보물이 몹시 많다. 어렵지 않게 양반들의 관심과 호감을 샀다.

신격을 지닌 양반들조차 황길동의 위장을 간파하진 못했다.

환국에서 황길동을 요주의 인물로 취급하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괴력을 발휘하고 바람을 부려서가 아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신술과 변신술을 가장 경계했다.

“저쪽이다!!”

“벌써 따라잡혔다? 양반 놈들은 하나 같이 추종술에 능하구려. 저쯤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냥개를 상시 운용하는 느낌이야.”

“그 옛날 파그마가 서대륙으로 도망쳤을 때 놓친 전력이 있어서 그렇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단련한 추종술이 이 순간 빛을 발휘하는 게지.”

“파그마가 굴린 스노우 볼을 하필 내가 맞다니.”

괜히 억울했던 노검마가 얼굴을 구겼다.

나란히 달리고 있는 황길동을 힐끔힐끔 노려보면서다.

하필이면 양반에게 훔쳤던 물건을 보물이랍시고 상납했다가 정체를 들킨 얼간이.

족히 100년 전에 훔친 물건이라 출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바보 같은 핑계를 대는데 솔직히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반 년의 시간을 들여서 기껏 백호창의 주인과 가까워졌건만, 백호창을 훔칠 기회를 노려보지도 못하고 쫓겨나게 된 것이다.

시간을 크게 낭비했으니 화가 끓어오를 수밖에.

‘그나마 근처에 좋은 사냥터가 있어서 망정이었지.’

덕분에 지난 반 년 동안 성장 속도는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별도의 레이드나 퀘스트를 진행하지 못해 득템 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

양반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파국의 백성들은 어떤 바람을 품지 않았고 당연하게 가축처럼 지냈다. 이런 환경에선 퀘스트가 발생하기 어렵다.

“두 명.”

높은 담벼락을 앞두고 달리기를 멈춘 노검마가 검을 뽑아 쥐며 말했다.

“나름 최선을 다해봤자 두 명의 추적을 떨쳐내는 게 한계일 거요. 참고해서 퇴로를 짜시오.”

노검마는 플레이어다.

죽어도 다시 부활하면 그만이다.

반면 황길동에게 죽음은 끝이었다.

비록 전설이라 잠시 죽음을 유예할 수 있다지만 고작 5초가 한계였다.

황길동의 평소 성격이 얄미운 것과 별개로 노검마는 그를 위해 희생할 의무가 있었다.

“알겠소.”

황길동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굳이 사양하지 않고 노검마의 어깨를 발판 삼아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저런 우라...”

황길동이 어찌나 세게 밟았는지 크게 기울어진 어깨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욕설을 간신히 삼키는 노검마의 주변으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황길동이 남긴 술법의 잔재다.

노검마를 따라잡은 양반 중 일부가 불어오는 칼바람 탓에 잠시 주춤거렸고 노검마가 그 틈을 찔렀다.

유려한 검술이 황길동의 술법을 등에 업고 한층 더 쾌속해졌다. 양반들의 허벅지와 아킬레스건을 집요하게 끊어댔다.

물론 이곳은 파국이다.

백호창의 수호자가 지배하고 있다.

양반들은 기본적으로 백호의 힘을 능숙하게 다뤘고 피격 지점을 돌보다 단단하게 굳히는 식으로 노검마의 노림수를 수포로 돌렸다.

만약 앞서 그리드가 현무와 주작의 봉인을 풀지 못했다면.

그래서 노검마가 두 사방신과 교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노검마는 양반들이 운용하는 백호의 기운을 뚫지 못하고 무력감을 맛봤을 것이다.

파스슥!!

“이놈...”

양반들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노검마의 검이 자신들의 피부를 스칠 때마다 상처 자리에서 치명적인 독기가 번졌으니까.

다른 사방신의 기운을 약화 시키고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독이었다.

현무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거라고 해석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낱 인간 따위가 신의 힘을...? 말세다.”

“말세는 지랄이군. 인간이 신을 전능하다 상상하며 숭배하는 이유는 신의 도움을 갈구하기 위함이니 신이란 응당 인간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애초에 인간의 숭배로 얻은 힘 아닌가. 인간이 신의 가호를 받는 건 당연하단 말이지.”

“인간보다 신이 먼저이거늘 궤변을 늘어놓느냐?”

“신이 인간보다 먼저 태어났으니 인간을 도울 의무가 없다? 그런 논리면 인간보다 늦게 태어난 네놈들에겐 인간의 숭배를 받을 자격이 없겠구나? 아, 스스로도 알기에 부끄러워 감사를 표하지 못하고 개새끼처럼 날뛰어대는 건가.”

레벨, 스킬, 컨트롤, 인내심, 혀...

노검마가 황길동과 함께하는 세월 동안 단련한 것들은 몹시 많다.

양반에게 양심을 판 탐관오리들을 상대해왔기 때문일까.

황길동은 사람 속을 은근히 뒤집어 놓는 화법을 무의식중에 구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를 상대로 꺾이지 않기 위해서 노검마는 노력해왔다.

후로이의 매드 무비 영상을 수백 번도 더 돌려 봤을 정도다.

효과가 컸다.

황길동을 상대론 별반 타격이 없던 것 같은데 양반들에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지껄여대는 노검마에게 명백히 분노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추격자들의 어그로를 대부분 노검마 혼자서 끌어버린 순간이다.

두 명의 발을 묶어놓겠노라 약조했던 것 이상의 성과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색을 잔뜩 낼 걸 그랬군.’

여기서부턴 시간을 얼마나 버느냐가 관건이다...

심호흡한 노검마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저마다 효과가 다른 버프 물약의 복용 타이밍을 구상하고 스킬의 쿨타임을 점검하면서 최대한 오래 버티기 위한 싸움을 준비했다.

그때였다.

“아이쿠!”

우당탕탕! 요란한 소음이 울린다 싶더니 노검마가 등지고 선 담벼락이 와르르 무너졌다.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 속에서 비틀비틀,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황길동.

치솟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른 노검마가 물었다.

“어째서 다시 돌아왔소?”

“아니 글쎄 분신들에게 배신을 당했지 뭐요.”

“...”

황길동은 분신술의 대가다.

특히 분신의 숫자를 7개로 제한 할 경우 분신 하나하나가 독립 된 자아를 지녔다.

그쯤 되면 사실상 황길동이 8명이 되는 셈이다.

분신과 본신을 구분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신 단점이 명확했다.

분신들조차 스스로를 본신으로 여긴다는 점.

각자 독립 된 자아를 지니다 보니 당연히 본인을 진짜라고 믿었다.

그래서 본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저놈이 진짜가 맞군. 기척이 낯익어.”

무너진 담벼락 너머에서 백호창의 주인이 나타났다.

속적삼을 입지 않고 맨 몸에 긴 도포 한 장만 걸친 사내.

뚜렷한 상체의 근육을 적나라하게 노출한 거구의 사내가 손에 쥔 포승줄에 일곱 명의 황길동이 대롱대롱 엮여 있었다.

하나 같이 딱 죽기 직전까지 쥐어터진 모습.

그를 본 황길동이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노검마는 황길동이 분신의 인권이라도 챙겨주는 줄 알았다.

물론 착각이었다.

“분신들 따위 그냥 다 없애버릴 것이지! 왜 굳이 살려둬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드는 게요!”

“...”

큰 원한이 실린 황길동의 외침이 공분을 일으켰다.

분신들의 공분이었다.

포승에 꽁꽁 묶여있지만 않았다면 당장 황길동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백호창의 주인 우람이 어깨를 으쓱였다.

“활빈당의 주인이 당금 제일의 기인이라고 하더니 진실이었구나.”

결코 칭찬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기이한 사람이란 말이 어찌 칭찬일까.

하지만 어째선지 황길동은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턱을 치켜세우고 흡족한 미소를 머금는 모습이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진정으로 미친 자다.’

황길동하고 언제까지나 상종하는 게 과연 옳을까.

노검마가 진지하게 로그아웃을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뭐든 제일은 좋은 법이지.”

포승줄에 묶여있던 황길동의 분신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몸을 꽁꽁 묶은 포승을 손쉽게 풀어버리더니 우람에게 적수공권을 날렸다.

그와 나란히 묶여있던 분신들이 그에게 삼켜지듯 빨려 들어갔다.

노검마의 곁에서 빽빽 소리치던 황길동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진짜라고 외치며 분신들이 배신했다고 지껄였던 황길동.

즉, 오늘 하루 종일 노검마와 함께 활동했던 황길동이 사실은 분신이었던 것이다.

깨닫고 배신감을 느끼는 노검마에게 진짜 황길동이 인사를 건넸다.

“보름 만에 뵙는 구려.”

“보름? 이런 우라질 놈이!”

보름 전이라고 하면 우람의 대궐에서 머물기 시작했을 무렵이 아닌가?

저 빌어먹은 개자식이 늘 그랬듯이 나만 혼자 위험한 곳에 보냈던 거로구나...

진실을 알게 된 노검마가 역정을 내는 사이 우람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복부에 선명히 남은 황길동의 주먹 자국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다.

“내게 인정을 받아 격을 올렸나.”

“그렇소. 그대가 비록 옷 하나 제대로 못 입는 야만인이라곤 하나 양반 중 2인자 아니오. 그대가 나를 당금 제일이라 인정했으니 파장이 컸지.”

“딱히 칭찬은 아니었다.”

“그거야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나름이오.”

“뭐... 상관없지... 다만 한 가지 정정해주자면, 나는 더 이상 2인자가 아닐세.”

“그럼?”

“당연히 일인자지.”

대답하는 백호창의 주인 우람.

그는 삼사의 실수를 알고 있었다.

멍청한 삼사가 미르의 기억을 소거한 시점부터 자신이야말로 최강의 양반이 됐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기쁜 일이다.

이런 걸 두고 거저먹었다고 하는 거겠지.

‘이제 치우는 내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을 테고 당연히 내게 가르침을 내리고자 애쓸 터.’

앞으로 나는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질 것이다.

어리석은 고집으로 치우의 조언을 거부하고 스스로 연마했던 미르와는 비교가 안 되는 속도로.

조만간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지경에 이르러서 멍청한 삼사보다 높은 위치에서 한울을 모시리라.

희열에 찬 우람이 백호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새 머리를 굴려 양반들과 같은 경로에 선 황길동을 표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휘둘렀다.

양반들과 통째로 베어버릴 심산으로 전력을 담은 일격이었다.

꽈르르르르릉...!

“...!!”

“...!!”

황길동과 노검마, 양반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공간을 찢어발기며 대지를 강타한 백호창의 기파가 직선으로 뻗어오고 있었다.

이대론 전멸이다.

현장의 모두가 깨달음과 동시에.

우람이 등지고 선 지평선에 노을이 번졌다.

기형적인 광경이었다.

태양은 여전히 하늘 높이 떠있었으니까.

“...저건 무슨 용이지?”

불시에 세상을 뒤덮은 노을을 토대로 이변을 느낀 우람이 이내 헛것을 본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푸른 뇌기로 이루어진 청룡.

혹은 상처 입고 숨어든 드래곤들을 목격해온 게 전부인 그에게 고룡의 거대하고 압도적인 기척은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악룡 번헬리어의 기세를 재현하는 검무.

다름 아닌 그리드의 검무가 만들어낸 미지가 현장을 덮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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