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9권 - 16화
파직! 파지직!
고요했던 도시가 소음으로 요란해졌다.
미르의 몸에서 나부끼는 새파란 전광에 의해서다.
하얗게 쏟아지는 눈들이 지면에 닿지 못하고 타들어가며 약간의 수분을 남겼고 그때마다 전광이 번지는 영역도 커졌다.
미르 자체가 점차로 거대해지는 느낌.
뇌신의 효과였다.
청룡의 기운과 완전히 동화 된 미르의 육신은 뼈와 살이 아닌 번개로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신.
꽈아앙!!
행동이 끝난 후에야 소리가 발생했다.
벼락이 번쩍인다 싶었을 때 그리드는 이미 공격당하고 있었다.
무려 300개가 넘는 갓 핸드의 진영을 말 그대로 ‘관통’하고 지나온 번개신의 기습이었다.
꽈차아앙!!
백열하며 긴 선처럼 늘어진 청룡도가 새하얀 빛줄기에 가로막혔다.
그리드가 급히 전개한 강화 매직 미사일의 흔적이었다.
뇌신은 모든 물리공격에 면역하되 마법공격에 취약하다.
마법에 전혀 저항하지 못하며 2배의 피해를 더 입는다.
그래봤자 매직 미사일의 위력 자체가 낮아 미르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했지만, 미르의 공격을 차단했다는 점에 의의를 뒀다.
“...?”
별 시답잖은 마법이 신의 진격을 막는 장벽이 되자 황당했던 걸까.
움찔 놀라는 미르의 다음 행동이 잠시 연계되질 않았다.
고작 0.1초조차 안 되는 간극이었다.
그리드가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시간대였다.
청룡도와 충돌하고 흩어지는 매직 미사일의 파편들 틈새로 황혼이 솟구쳤다.
사선으로 치솟는 일격.
표적에 도달함과 동시에 횡을 그리길 반복한다.
무한히 이어질 것만 같던 선의 향연, 연(聯)의 검무였다.
“...”
검풍이 스칠 때마다 요란하게 흔들리는 푸른 전광 사이.
언뜻언뜻 드러나는 미르의 표정이 평온했다.
자신이 검에 베일리 없다는 확신을 품은 채 그리드의 빈틈을 수색했다.
그리드가 내뻗은 황혼을 회수하기 직전.
늑골이 훤히 드러나는 순간을 노리고 청룡도를 휘두른다.
약점 간파.
크리티컬을 유도 할 공격이,
파지직!!
그리드에게 닿기 직전 멈췄다.
미르의 육신을 구성하고 있던 전광이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있었다.
황혼에 의해서다.
필연적인 결과였다.
뇌신은 청룡의 권능이며, 황혼은 대상의 권능을 높은 확률로 무력화시킨다.
연의 수십 회 검격을 방치한 미르의 실수였다.
서걱!
뇌신 상태가 풀리자 어깨를 크게 베인 미르가 즉시 주작의 힘을 꺼냈다.
깊은 상처가 주작의 열기에 의해서 아물었고 하늘에선 불꽃의 비가 쏟아졌다.
당연히 그리드를 표적으로 삼았다.
“...!?”
불꽃의 비와 협공하려던 미르가 석상처럼 굳었다.
그리드에게 닿는 불꽃들이 그리드를 불태우기는커녕 상처를 회복시켰으니까.
미르의 번개가 그리드의 몸에 간신히 남겼던 작은 상처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광경을 다른 양반들도 똑똑히 목격했다.
“주작의 심장...”
이유를 깨달은 미르가 중얼거렸다.
그리드의 고개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안 그래도 맹금류의 것처럼 날카로운 눈매가 자신보다 신장이 조금 더 큰 미르를 올려보자 한층 더 사나워졌다.
과거에 자신이 미르의 얼굴에 남겼던 흉터가 이젠 없단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역시 가짜군.”
망설이지 말고 죽이자...
“...!”
그리드의 혼잣말에 등골이 오싹해진 미르가 발악적으로 도약했다.
그가 딛고 섰던 지면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지신의 효과였다.
번개와 화염에 눈이 녹고 진흙이 된 땅이 미르의 의지에 호응해서 형태를 바꿔갔다.
180도 회전하며 그리드의 시야를 뒤집어놓더니 날카로운 돌가시를 쏟아냈다.
거인에게 둘러싸이면 이런 기분일까.
좌우로 솟구쳐 오른 절벽이 그리드를 압박해왔다.
철컥.
그리드가 아이템을 스왑했다.
드래곤의 이름이 붙은 방어구들을 오래간만에 벗고 백호의 이름이 붙은 방어구를 무장했다.
그리고 지신의 효과를 일으켜 요동치는 대지를 진정시켰다.
미르의 시도를 무위로 돌렸다.
“내가 아는 미르는 사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았는데.”
사방신의 힘을 완벽하게 다루는 것.
미르의 최대 강점이긴 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가 미르와 싸웠을 때 그를 ‘벽’으로 느꼈던 이유는 검술 등의 기술에 있었다.
바알의 마력이 무한하다고 한들 단순히 마력을 휘둘러대는 게 끝이었다면 그토록 고강했을까?
바알이 강한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건 미르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오늘 본 미르는 과거와 달랐다.
평생토록 연마해온 기술을 망각이라도 한 것처럼 등한시하고 사신의 힘에만 의존했다.
마찬가지로 사신의 힘을 다룰 줄 아는 그리드를 상대로 스스로 불리한 싸움을 벌이는 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미르가 아니야. 너처럼 대가리가 텅텅 빈 놈이 미르일 리 없지.”
그리드의 언행이 난폭해졌다.
당연하다.
다짜고짜 공격당한 시점부터 말이 곱게 나가기 힘들었다.
소름 돋는 가설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도 있었다.
양반이란, 한울이 만든 생명체다.
기존의 미르를 쥐도 새도 모르게 소각하고 새로운 미르를 만들어놨어도 이상하지 않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리드의 얼굴이 차츰 분노로 일그러졌다.
“인간의 삶부터 시작하신 당신은 스스로가 무결하지 않음을 인정하실 수 있죠. 당신께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 실로 당연한 일일 테니까요. 저는 당신께서 다른 신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존재로 거듭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 많은 걸 바꾸어 나가시겠죠.”
“당신은 제 희망입니다.”
“저는 신이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길 바랍니다.”
“이후에 다시 만날 때의 우리는 역시 적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당신을 응원하는 마음과 별개로 저를 움직일 권한은 대개 제가 섬기는 신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만큼은 당신의 편입니다.”
미르가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나를 지키기 위해 등지고 섰던 그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마음속에 품어온 진심을 솔직하게 고백했었다.
이 순간의 재회는 그날 후에 이뤄진 것이다.
미르가 그날의 일을 잊지 않은 이상 나를 저딴 표정으로 노려볼 리 없다.
토악질을 참느라 이를 악 문 그리드가 심호흡한 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미르는... 진짜 미르는 어디에 있지?”
더 이상의 자비는 없었다.
질문을 무시하고 재차 뇌신 상태에 돌입하는 미르에게 그리드가 먼저 선공을 날렸다.
순보로 접근함과 동시에 황혼으로 펼친 6융합 검무가 뇌신의 효과를 무효화시키고 미르를 난도했다.
이어서 금나수에 붙잡혀 바닥에 처박히는 미르의 모습이 그리드에게 실감시켰다.
역시 이놈은 미르가 아니다.
이놈이 진짜 미르였다면 지금 바닥에 처박힌 건 내가 됐을 테니까.
꽈드득!
그리드가 이를 갈았다.
이번에도 역시 토악질을 삼키기 위함이었다.
탄생 이후 여태껏.
최소 수백 년 이상을 환국의 신들에게 헌신해놓고 무참히 버림받은 미르가 가엾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국의 신들이 역겨운 나머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세상엔 개새끼들 천지다...!”
미르의 명치를 무릎으로 짓누른 그리드가 소리치며 검을 역수로 쥐었다.
혼란과 분노에서 비롯된 살기가 가짜 미르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미르는 저항하지 못했다.
6융합 검무에 적중당한 시점부터 수백 개의 갓 핸드에게 구속당한 채였으니까.
하물며 그리드에게 패대기쳐지고 짓눌려졌다.
청룡의 기운과 동화되어봤자 무의미함을 재차 확인한 지금.
그가 위기를 극복 할 수단은 백호의 기운을 빌려 몸을 단단하게 벼리는 방법 외에 없었다.
물론 그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확률이 높았다.
노을을 머금은 저 검은 벌써 몇 번이나 사방신의 권능을 베어 없앴기에.
‘무슨 신이지?’
환국의 신들에게 기억을 소거 당한 미르.
그 부작용으로 인해 긴 세월 쌓아올린 경험마저 상실한 그에게 그리드란 완전히 미지의 존재로 다가왔다.
무장하고 있는 드래곤 웨폰과 드래곤 아머를 토대로 그 유명한 광신광룡을 떠올리긴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광신광룡은 템빨신이 드래곤에 탑승했을 때야 비로소 완성되는 신화였으니까.
게다가 눈앞의 존재는 삼사가 묘사했던 광신광룡보다 훨씬 더 강했다.
“너는... 누구냐?”
힘겹게 토하듯 묻는 미르.
차츰 다가오는 황혼을 어떻게든 떨쳐내고자 발악하는 그의 명치를 더욱 세게 짓누른 그리드가 대답해주었다.
“진짜 미르를 기억하는 사람.”
정확히는 미르의 진심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앞으론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된 진심.
꾸우욱...
그리드가 살레오스의 힘을 전개했다.
황혼의 칼날을 두 손으로 붙잡고 버티는 미르의 목덜미에 황혼을 서서히 꽂아 넣었다.
미르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망설일 이유는 하등 없었다.
빨리 죽이고 청룡도를 회수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판단이었다.
바로 그때.
“그만!!”
어떤 여성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멍하니 굳어 있는 양반들 틈에서 뛰쳐나온 그녀의 이름은 예음.
그리드도 알고 있는 미르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진짜 미르가 맞아...!”
“...?”
“삼사에게 끌려가서 기억을 소거 당했을 뿐이지 가짜가 아니라고!!”
정작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그리드가 아닌 미르였다.
예음의 한 마디 고백으로 그의 생각은 어디까지 도달한 걸까.
슬픈 표정을 짓더니 황혼의 칼날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스르륵 힘을 풀었다.
푸우욱!!
“...!”
두 눈을 부릅뜬 예음이 비명을 삼켰다.
진흙탕 위에 널브러진 미르의 목을 노을빛 검이 관통하는 모습을 두 눈에 똑똑히 담으면서다.
흙탕물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사방팔방 비산했다.
“아... 아아아...”
예음이 털썩 주저앉았다.
소중한 기억들을 잃은 채 죽은 형제를 가엾게 여기며 오열했다.
기와 위에 선 채 침묵하고 있던 양반들은 진즉 자리를 떠났다.
자신들 역시 화에 휘말릴까 두려워하며 도망친 것이다.
홀로 남은 예음에게 그리드가 물었다.
“이 친구의 기억을 되살릴 방법이 있나?”
황혼은 미르의 목을 관통하지 않았다.
미르의 목을 살짝 스친 채 지면에 박혔을 뿐이다.
안도하며 달려온 예음의 포옹을 거부하지 못한 미르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친...구?”
“정확히는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이었지. 지금 막 빚을 청산하긴 했지만. 아무튼 일단 청룡도는 내놔라.”
퉁명스레 말하는 그리드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눈앞의 미르가 자신이 알던 미르와 같은 존재란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양반 ‘미르’가 당신에게 <청룡도>를 양도하였습니다.]
미르의 기억 상실이 결과적으론 그리드에게 좋게 작용했다.
본래의 미르였다면 의무감 때문에라도 쉽게 넘겨주지 않았을 청룡도를 손쉽게 확보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