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9권 - 15화
랭커가 가장 선호하는 성장 방법은 레이드와 퀘스트다.
지겨운 사냥과 달리 흥미롭고 짜릿하며 대량의 자원이 한꺼번에 수급되니까.
하지만 레이드만 고집해서 성장 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그리드, 크라우젤, 유라, 유페미나, 지발 등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 현실적으로 퀘스트에 집착했다.
템빨마탑주 라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랭커와 마탑주, 그리고 제국의 고위 귀족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적극 이용했다.
다양한 경로에 소통 창구를 열어놓고 온갖 정보를 수집해서 퀘스트 수집률을 높였다.
이번 퀘스트는 마탑주의 신분으로 얻었다.
<빛과 어둠의 마법을 만드는 열쇠(1)>
난이도:알 수 없음
지옥의 혼란한 환경에선 드물게 ‘선악의 열매’가 열립니다.
악신 야탄이 선한 신들과 천사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만든 열매라는 설화가 있습니다.
선악의 열매로 마력의 성질을 바꿀 수 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선악의 열매’를 확보해서 마스터 레벨의 마탑 실험실로 운반
퀘스트 클리어 보상:알 수 없음
마스터 레벨의 마탑.
대륙에 단 두 곳밖에 없다.
태양의 탑과 영원의 탑.
그중 타이탄에 있는 영원의 탑이 제국의 소유였다.
과거 마법왕을 자처했던 골드히트가 영생을 연구했던 참혹한 실험장으로, 그리드의 손에 초토화 됐던 역사가 있다.
현재는 수복되어 정상적인 마탑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선악과를 양도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타이탄에 도착한 라엘라가 재차 정중히 인사했다.
여정 동안 족히 10번은 허리를 90도로 꺾지 않았을까.
피아로가 이젠 지겹다는 듯이 손사래 쳤다.
“누차 말했듯이 폐하의 명을 따랐을 뿐일세.”
“그리드 님께도 당연히 감사하지만 이 열매를 탄생시킨 장본인은 피아로 님이잖아요? 저는 두 분 모두에게 제 진심이 전달되길 바라는 거예요. 그건 그렇고 정말로 우연이었던 건가요?”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봐 집요하군.”
선악의 열매는 피아로가 지옥에 만든 밭에서 열렸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원리로 열린 건진 피아로 본인도 몰랐다.
지옥의 환경은 워낙 변덕이 심했기 때문이다.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매초마다 날씨, 기온, 습도가 바뀌어댔다. 거기에 더해서 마기의 농도까지 시시각각 변했다.
선악의 열매가 열렸을 당시의 환경을 정확히 기억하고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건 피아로라도 불가능한 것이다. 순전히 우연의 영역이었다.
“아쉽네요... 아무튼 피아로 님께서 보람을 느끼실 수 있게끔 제가 꼭 성과를 내보도록 할게요.”
“기대하겠네.”
피아로가 라엘라의 타이탄행에 동참한 이유는 단순히 호위역을 자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악한 존재를 선하게 만들고 선한 존재를 사악하게 만든다는 선악의 열매.
과연 그 효능이 어디까지 미칠지 피아로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 효과가 정녕 마력에까지 적용된다면...’
인류는 여러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흑마력을 다루기 위해 악마와 계약 할 이유도, 신성력을 다루기 위해 신을 섬길 의무도 사라질 테니.
파장이 몹시 클 것이었다.
대부분의 신들이 서서히 영향력을 상실할 테고 악마들이 인간계에 개입 할 여지도 적어지겠지.
선악의 열매란, 인류를 온갖 초월적인 존재들로부터 독립시킬 몹시 중요한 열쇠인 셈이다.
어디까지나 그 효과가 진짜일 때의 이야기지만.
“라엘라 공이십니까.”
일행을 마중 나온 마법사들의 태도가 심드렁했다.
마법에 일생을 바치고 수도승마냥 탑에 틀어박힌 그들의 성향은 대개 무심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마법이었기 때문에 그 유명한 템빨신의 사도 피아로를 보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라엘라에 대해서도 특별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현재 대륙 최고의 마법사는 브라함이고 그 바로 아래가 유페미나이지 않나.
그들을 제외한 마법사들은 고강하다고 해봤자 과거의 10대 마법사보다 조금 더 뛰어난 수준이라는 게 정론이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의 세월 동안 10대 마법사들은 딱히 큰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현재 세계의 주역이라고 평가 받는 강자들과 비교해서 전장에서의 활약이 미흡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지향하기엔 손색이 있는 셈.
그다지 존경심을 느끼지 못했다.
라엘라는 그들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달가워했다.
아이돌 출신 월드 스타인 그녀는 때때로 사람들의 관심이 무거웠으니까.
“...진짜인가 보군.”
마법사들의 안내를 따라 마탑에 입장하려던 피아로가 멈춰 섰다.
낫과 호미를 꺼내 쥐며 혼잣말하는 표정이 날카롭다.
“무슨 일이죠?”
“적습일세. 기운의 출처를 보아 선악과를 노리는 듯하니 그대는 서두르시게.”
“네, 알겠습니다.”
함께 싸우겠다는 억지는 부리지 않았다.
피아로의 말대로 적들이 선악과를 노리는 이상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역할에 집중 할 의무가 있었다.
선악과의 효능을 확인하고 퀘스트를 클리어해서 활용법을 찾아 낼 의무.
애초에 이곳은 타이탄이다.
그리드와 라우엘이 가장 신뢰하는 정치가 바사라가 영주였고 뇌신 카일이 수호자로 머문다.
라인하르트 다음으로 많은 병력이 주둔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적습에 일일이 동요 할 필요가 없다는 뜻.
자신이 굳이 나설 필요도 없다는 믿음이 라엘라에겐 있었다.
“명색이 템빨마탑의 주인께서 도망치시는 겁니까?”
피아로를 내버려두고 홀로 마탑을 오르기 시작한 라엘라를 마법사들이 비난했다.
하지만 금세 입을 닫았다.
마법사들이 여태껏 보지 못한 강력한 화염 마법을 몸에 두른 라엘라의 기세가 흉흉했기에 압도당했다.
“선은 지켜야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라엘라를 바라보는 마법사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언젠가 전장에서 브라함과 유페미나의 활약을 지켜봤을 때처럼 동경을 품었다.
라엘라의 성장을 반증하는 반응이었다.
한편 마탑의 출입구를 봉쇄한 피아로는 하늘을 올려보는 중이었다.
네 장의 날개를 펼친 천사 셋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들의 발이 끝내 지면에 닿았을 때 성스러운 빛이 난반사되며 거리의 사람들을 현혹했다.
“선악의 열매를 내놓으세요.”
“그건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가 만든 열매입니다. 인간의 힘과 욕망으로는 감당하지 못해요.”
“악마들의 침공은 감당 할 수 있으리라 보았나?”
“...?”
“지상으로 기어 올라온 악마들이 인간들을 학살하고 대전쟁을 일으켰을 때는 천상에서 구경만 하던 자들이 이제와 그딴 말을 지껄이는 게 우습다.”
“...근본 없는 인신의 사도답게 저급하군요. 이미 지난 일을 들추어 매도하는 꼴이 추악합니다. 템빨신과 함께 지옥을 오간다고 들었는데, 차라리 악마들과 가까워진 게 아닐까 싶어요.”
“문답무용.”
피아로는 천사들을 악마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인식했다.
살육에 눈이 멀어 말이 통하지 않는 악마들과 저것들이 대체 뭔 차인가 싶었다.
사방팔방으로 씨앗을 뿌리며 전투를 개시했다.
***
“...그랬군.”
얼마 전 지옥 원정에서.
탑의 결사 프론잘츠는 9번 지옥에서 싸웠었다.
헬가오가 비운 왕좌를 자신이 빼앗았다고 주장했던 자칭 9위 대악마를 격퇴했다.
그 뒤 한참동안 9번 지옥에 머물면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맸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지크는 지상에 귀환하자마자 코크로 섬을 방문했다.
그리고 보름이 넘도록 헬가오의 출현 포인트를 조사해온 끝에 확신했다.
‘프론잘츠는 진즉부터 눈치 챘던 거야.’
헬가오, 푸르푸, 모락스, 레피르, 쿠르손, 그리고 드라시온.
과거 지상에 출현했다가 뮐러에게 육신을 잃고 봉인당한 대악마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환생한 존재들이라는 점.
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악마였던 게 아니라 인간, 혹은 천사였다가 죽어 악마로 환생한 존재일 확률이 높았다.
사실은 대천사 사리엘이었던 드라시온이 첫 번째 증거였고 지금 막 지크가 찾아낸 화석의 파편이 두 번째 증거였다.
‘화석의 일정 부분이 원죄의 돌과 미세하게나마 닮았다.’
이전에 보았을 땐 워낙 대수롭지 않게 넘겨 눈치 채지 못했었지만, 자세히 분석한 결과 확실했다.
‘...헬가오가 불타르인가?’
헬가오의 지상을 향한 집착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계속해서 토벌 당하면서도 또 다시 코크로 섬 던전에 나타나길 반복해 결과적으론 인간들을 크게 돕지 않았나.
그것이 대악마 헬가오가 아닌 일곱 선인 중 한 명인 불타르의 의지였다면?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지크는 언젠가 그리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헥세타이와의 대장장이 승부에서 이겼을 당시 7악 타락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던가.
헥세타이아의 원죄를 밝히며 불타르의 옛 이야기를 들려줬었다고.
당시 그리드는 몰랐겠지만 타락의 본명이 바로 불타르다.
‘헬가오가 죽고 다시 부활하기까지 생기는 짧은 텀마다 불타르의 의식이 일시적으로 깨어났던 게 아닐까.’
그리고 헬가오가 다시 코크로 섬에 도전하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인간들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추측해 보는 지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동료들의 영혼이 육신과 함께 무저갱에 봉인됐다고 믿어왔건만 이제 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무저갱에 봉인 된 육신과 별개로 그들의 영혼은 영겁의 고통을 헤매고 있었다.
사리엘이 레베카 여신의 죄를 밝힌 대가로 천상에서 추방되어 악마가 됐던 것처럼, 악마로 타락하여 죄업을 쌓아왔다.
선인들에게 일곱 악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운 것으로 모자라 진짜 악마로 타락 시키다니.
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형벌이란 말인가.
주먹을 불끈 말아 쥔 지크가 천상을 향한 원한을 더욱 부풀렸다.
그러다가 문득 새로운 사실을 눈치 챘다.
‘뮐러는 알고 있었다.’
검성 뮐러가 악마들을 토벌하고 육신을 봉인한 게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우연이라기엔 공교롭게도 여섯 악마가 특별한 존재였다.
어쩌면 뮐러는, 전생을 잊은 채 죄업을 쌓고 있던 사리엘과 선인들이 더 이상의 죄업을 쌓지 못하게끔 봉인해주었던 게 아닐까.
“고맙소... 고마워...”
화석의 파편을 가슴에 품은 지크가 투명한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
뽀드득, 뽀드득.
사막왕국 가야를 뒤덮은 눈은 청룡의 분노가 형상화 된 것이다.
자연적인 현상과 거리가 멀었다.
환경적으로 있을 수 없는 추위가 동물과 사람들을 해치거나 떠나도록 만들었다.
미르는 이와 같은 상황을 비난한 바 있다.
신의 이기심이 힘없는 존재들을 해치는 경우가 무척 흔하다며, 인간들의 숭배를 바랄 자격을 지닌 신은 정녕 드물다고 한탄했었다.
그건 환국에 있는 신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리드는 미르가 보통의 양반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렴풋한 호감을 품어왔다.
“진짜로 왔군.”
“신이 되고 미쳤다는 소문이 진실이었어.”
눈 쌓인 거리를 걷는 그리드의 모습을 발견한 양반들이 수군거렸다.
하나둘씩 모여든다 싶더니 어느새 수십의 무리를 이룬 그들 중 누구도 감히 그리드의 앞길을 막아서지 못했다.
하지만 표정에는 하나 같이 여유가 있었다.
아마 미르를 믿는 것일 테지.
바알과 리파엘의 대항마로 만들어진 미르의 무력은 같은 양반들이 보기에도 초월적일 테니까 충분히 의지할 만하다.
‘되도록 싸우고 싶지 않은데.’
미르의 기척이 느껴지는 기와집 앞에 선 그리드가 심호흡했다.
미르가 자신을 구해줬던 순간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 입은 은혜와 청룡의 부활은 별개로 계산해야 옳았다.
끼이익.
각오를 다진 그리드가 거대한 대문을 열어젖혔다.
넓은 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장독대였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장독들 위에 작은 새들이 모여 있었다.
평소 저곳에 자주 먹이를 놓아주는 눈치였는데, 공교롭게도 오늘은 아닌 듯했다.
새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도 작은 좁쌀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오늘 뿐만이 아닌가.’
야윈 새들의 울음소리가 당장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다는 사실을 눈치 챈 그리드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빵을 하나 꺼내 독 위에 놓아줬다.
딱히 깊은 의도는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도리였다.
대청에 비스듬히 앉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미르의 눈빛이 아련했다.
어떤 기억을 돌이켜 보는 듯했다.
한데 쉽지가 않은지 곧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오랜만이네.”
반갑다는 뒷말은 차마 뱉지 못하고 삼킨 그리드가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자신을 바라보는 미르의 눈빛에 경계심과 경멸이 가득했으니까.
생판 처음 보는 불청객을 대하는 느낌으로, 지난 날 미르가 보여줬던 태도들과 전혀 달랐다.
“...무슨 짓을 당한 거냐?”
미르는 그리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문답무용으로 청룡도를 뽑아들고 쇄도해왔다.
기와 위에 올라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양반들의 얼굴이 부지불식간에 굳었다.
단칼에 목이 떨어져나갈 줄 알았던 템빨신이 멀쩡했던 까닭이다.
귀신처럼 솟아오른 수백 개의 흑금색 손이 청룡도의 검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미르의 몸을 난타해댔다.
“아니, 잠깐. 잠깐 진정 좀 해 봐.”
복날 개 패듯이 미르를 패는 갓 핸드들을 그리드가 말렸다.
하지만 그 틈을 노린 미르가 재차 공격해오자 갓 핸드들이 또 다시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미르의 귀싸대기가 몇 번이고 돌아갔다.
미르는 청룡의 기운을 끌어올리고 나서야 간신히 갓 핸드들을 뿌리치고 멀찍이 물러설 수 있었다.
그리드가 깨달았다.
‘나 겁나게 세졌구나?’
여태껏 실감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