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96화 (1,594/1,794)

템빨 79권 - 14화

사소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은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연인이 본인들의 궁합을 점검하는 방법은 몹시 다양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와 유라는 천생연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Satisfy에서조차 운명처럼 엮여 있었으니까.

바로 최종 전직 퀘스트가 똑같다는 점이었다.

그리드는 파그마의 영혼을, 유라는 알렉스의 영혼을 바알로부터 구출해야 했다.

썩 좋은 공통점은 아니었다.

그들의 전직 퀘스트는 일개 플레이어가 감당하는 게 불가능했기에.

전직 퀘스트를 완료해서 얻게 될 새로운 스킬들이 몇 개의 목숨보다 가치 있을 거란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고 포기하는 편이 현명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끈질겼다.

붉은 악마 글런트 등, 악마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수집한 유라는 바알과 꼭 싸우지 않아도 알렉스의 영혼을 구출할 방법을 강구해왔다.

그리드는 바알을 꼭 없애겠다는 일념으로 힘을 키워왔다.

바알은 언젠가 반드시 두 사람과 충돌 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바알에게 경험을 축적시키는 건 썩 현명한 방법이 아니오.

-그대들이 성장하는 만큼 바알 역시 발전하고 있소.

-바알이 시련을 겪으며 학습하는 모든 것들이 붉은 살덩이를 키우는 양분이 되어주기도 한다오.

바알이 약해진 틈을 타 이성을 되찾고 말하는 파그마의 영혼과 알렉스의 영혼.

그들의 주의와 경고가 그리드의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럼 뭐 어쩌라는 겁니까? 싸우지 말고 두 손 놓고 있을까요?

그리드는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하고 경고만 늘어놓는 선배들의 태도가 영 마뜩찮았다.

저런 건 조언이 아니라 잔소리니까.

“쓸데없는 말씀 하실 시간에 본인들이 해방 될 방법이나 궁리해서 알려주십쇼.”

-허... 과연 파그마의 후예로군.

-무슨 의미지?

-예의가 없고 사나운 성격이 파그마 그대를 쏙 빼닮지 않았소. 혈연관계도 아닌데 성격이 저리도 닮았다는 것은 혹여 검무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오? 사용자의 기질을 점차 패도적으로 만드는 부작용을 지닌 듯한데...

-억측은 관둬라.

-그대의 검무는 양반들이 제(祭)를 올릴 때 사용하던 예식이라 하였지? 궁극적으로 한울과 접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텐데 그런 부작용을 지녔다는 건 한울 신 자체가 딱히 올바르지 않음을 뜻하는가...

-한울을 욕하는 건 괜찮다. 하지만 나를 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음이 괘씸하군. 내게 손발이 있었다면 경의 주둥이를 함몰시켰을 거야.

“...”

지옥문을 코앞에 둔 그리드와 유라의 발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선배들에게 은근히 품어온 환상이 산산조각 난 까닭이다.

물론 파그마가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인류를 위해 싸웠던 영웅 아닌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사납고 감정적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애초에 고아한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았다.

파그마의 성격을 뻔히 알고 도발하는 알렉스의 성격 역시 썩 좋다곤 보긴 힘들었고.

순수한 의문을 품은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브라함하고 친구가 될 만한 성격이 아닌데...”

브라함은 까놓고 말해서 성격이 나빴다.

그나마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고 순전히 제 잘난 맛에 살았었다.

그런 브라함과 친구가 되기 위해선 당연히 마음이 넓어야 했다.

‘나처럼.’

반면 파그마의 성격은 브라함과 닮은 듯했다.

서로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 댈 것 같은 궁합이었다.

한데 무슨 수로 브라함이 가장 신뢰하는 친구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걸까?

그리드의 의문에 파그마가 답해주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브라함은 오만하여 실수가 잦았소. 약점을 잡기 좋았지.

“...”

설마 가스라이팅으로 쌓아올린 우정이었나.

경악어린 얼굴로 그루밍 범죄 따위를 떠올리는 그리드의 귓전에 파그마의 씁쓸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그가 늦게나마 그대처럼 좋은 벗을 두어 다행이오.

파그마의 영혼과 알렉스의 영혼은 사실 이성을 잃었던 적이 없다.

오히려 항시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여 바알이 주는 절망과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다.

늘 비명을 질러온 이유다.

파그마는 고통 속에서 지켜봤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을 위해 싸워온 그리드의 모습을.

대의를 핑계로 죄 없는 이들을 희생시켰던 자신과 그리드는 명백히 달랐다.

아마 태생의 차이가 만든 결과일 것이다.

파그마가 양반들 사이에선 약자의 삶을 체험해봤다고 하나 결국 인간과 달랐다. 정서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종종 잘못 된 선택을 했고 후회를 반복했다.

반면 그리드는 완전히 평범한 인간 출신이었다.

파그마보다 훨씬 더 쉽게 많은 사람과 교감했다.

-하기야 그대라는 존재는 브라함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흥복이겠지. 나는 그대를 존경하고 선망... 으윽...

파그마의 말이 뚝 멈췄다.

칼로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쩍쩍 갈라지는 그의 신음소리가 바알의 부활을 암시했다.

벌써 몇 번의 죽음을 겪고도 격이 훼손되기는커녕 건재한 놈.

오히려 학습을 통해서 강해지는 바알은 차라리 플레이어와 닮았다.

그리드는 놈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고 몸을 떨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끝내 전설이 된, 인류 역사상 최강의 강자들이 저런 볼품없는 모습으로 바알에게 붙잡혀 있지 않나.

한 순간도 안락하지 못한 채 고통에 떠는 파그마와 알렉스의 신세가 애써 억눌러온 두려움을 상기시켰다.

그를 일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영우씨!”

“...아.”

그리드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마침 복부를 관통해온 마검이 사선으로 기울어지며 그의 상체와 하체를 분리시키기 직전.

스파아아앗!!

유라에게 잡아당겨진 그리드가 지옥문을 타고 지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폐, 폐하!!”

“신이시여...!”

공교롭게도 떨어진 장소가 나빴다.

템빨계, 템빨신전 본단.

데미안의 주도 하에 기도를 올리고 있던 제국 신민들이 하필 중상을 입은 그리드를 목격하고 동요했다.

“보십시오! 우리의 신께서 사악한 악마 바알을 또 한 번 징벌하시고 위풍당당하게 귀환하셨습니다!”

데미안과 사리엘이 빠르게 수습했다.

교주복을 벗어 휘장처럼 펼친 데미안이 그리드의 모습을 숨겼고, 사리엘은 그 짧은 틈을 이용해서 마법으로 그리드를 회복시켰다.

이어지는 데미안의 외침과 함께 짜잔! 하는 느낌으로 재등장한 그리드의 모습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조금 전 자신들이 본 그리드의 모습을 착각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거의 사이비 교준데?’

남 몰래 미소를 보내오는 데미안을 보면서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사람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며 화답해주었다.

잠시 후.

대장간에 도착한 그는 유라에게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대로는 답이 없겠지?”

“...”

사실 조금씩 눈치 채고 있었다.

바알과 싸울수록 그리드의 레벨이 오르듯이 바알은 전투 기술을 학습했다.

그리드의 6융합 검무를 무위로 돌리는 횟수가 점차로 늘어났다.

그래도 괜찮다.

몇 번만 더 죽이면 어느 시점부터 바알의 격은 훼손 될 것이고 그때부터 점차 유리해질 것이다... 라는 생각을 위안으로 삼았지만 바알의 격은 도통 훼손 될 낌새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바알의 경험을 붉은 살덩이가 학습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진실까지 알게 됐다.

파그마의 영혼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눈앞이 깜깜해졌다.

상실감에 빠진 채 고개를 숙인 그리드의 머리카락을 조용히 쓰다듬어주던 유라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알이 학습 할 틈을 주지 않는 건 어떨까요?”

“...무슨 수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거죠. 예를 들어서 바알에게 새로이 도전할 때마다 여태까지완 다른 기능의 아이템을 무장하면 바알에겐 적응 할 틈도 생기지 않을 테고... 미안해요.”

열심히 설명하던 유라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창작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매번 새롭고 다른 아이템을 만드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그리드에게 너무 큰 책임을 강요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드가 그녀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고마워.”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대상에게 새로운 공략법을 강요하는 것.

템빨신 그리드와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정도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부담이 큰 게 사실이었다.

무한한 궁리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맞아. 나는 가장 기본적인 걸 잊고 있었어.”

강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바알과 싸우는 내내 원덕구에 의존했던 탓일까.

사도들과 결사들의 힘을 빌려오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정작 템빨을 활용 할 생각을 못했다.

현재 무장하고 있는 아이템을 하나 같이 졸업템이라고 인식해서 생긴 부작용일 수도 있었다.

그리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불사의 쿨타임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도 떠날 채비를 하는 그를 보고 유라가 당황했다.

그리드가 안심시켰다.

“지옥이 아니라 동대륙에 다녀올 거야.”

아직 그리드가 구하지 못한 사방신이 둘이나 있다.

그리드는 그중에서도 청룡이 탐났다.

차가운 냉기를 품는 바알의 심상에 타격을 입힐 만한 속성으로 청룡의 뇌기가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브라함에게 부탁해서 황혼에 번개 마법을 귀속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브라함이 장기로 삼는 대마법 중엔 뇌속성이 없다.

브라함의 도움을 받아 황혼에 뇌기를 부여하려면 어중간한 마법을 귀속시켜야 한다는 뜻인데 많이 아쉬웠다.

반면 청룡은 명색이 신이다.

청룡의 부츠를 토대로 얻는 뇌기엔 한계가 있어 바알을 상대로 별 위력을 내지 못했지만 청룡에게 직접적으로 얻는 뇌기는 다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수비는요?”

“스틱세이가 있으니까 괜찮아. 언제든지 오갈 수 있어.”

“아...”

원조 이동 수단...

한동안 템빨아카데미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온 스틱세이가 다시금 도구로 이용 될 순간이 찾아왔다.

***

“원덕구.”

스틱세이의 도움을 받아 동대륙 가야에 도착한 그리드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혜안.”

즉시 메르세데스의 힘을 빌려서 청룡의 정확한 위치를 수색했다.

정확히는 청룡이 봉인 된 청룡도의 위치.

자연히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미르...”

의도치 않게 깊은 인연을 맺은 인물.

어쩌면 나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청룡의 부활을 미뤄왔던 건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 그리드는 설경에 뒤덮인 사막의 중심부로 나아갔다.

***

같은 시각.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수십 년 만에 본가로 돌아온 메르세데스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가족들의 태도를 어린 시절부터 학습했기에 생긴 습관이다.

이 ‘눈’이 미약했던 시절.

그러므로 오히려 통제하지 못했던 시절 그녀는 원치 않게도 소중한 가족들의 비밀과 속내를 엿봤었다.

서로가 서로를 꺼려하고 두려워하게 된 이유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간 무탈했냐는 안부조차도, 환영한다는 인사치레 한 마디 없이.

노년의 부부는 하나 남은 딸을 완전히 타인처럼 대했다.

새로운 황제의 측실이자 기사라는 메르세데스의 신분이 부부의 냉담한 태도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가주 시험을 치르고자 합니다.”

메르세데스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마침 그리드에게 혜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은 직후였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고개를 든 그녀는, 자신과 눈을 마주친 순간 움찔 놀라는 부모의 늙고 왜소해진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지금의 저는 가문의 죄업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진실이지만, 베인츠 가문의 두 자루 검은 사실 살육을 뜻한다.

어린 시절.

사실상 부모에게 버림받고 피아로에게 거두어져 황제와 조국을 수호하는 기사로 키워진 메르세데스는 이해하기도, 감당하기도 힘든 기치였다.

그녀의 베인츠식 검술은 원본과 형태가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지옥에서 진짜 악마들을 보았다.

그들을 반드시 멸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었고 극적제승의 검기를 이뤘다.

가문의 살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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