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95화 (1,593/1,794)

템빨 79권 - 13화

레벨이 무려 13개나 올랐다.

이로써 현재 그리드의 레벨은 760.

통합랭킹 10위권 플레이어들과 비교해도 평균 230 이상 높았다.

플레이어들의 성장에 비례해서 상승하는 네임드 NPC들의 레벨과 같거나 높은 수치로, 지극히 보기 드문 초네임드 NPC들의 레벨을 추격하는 수준이다.

‘성장 속도는 당분간 더 빨라질 거야. 바알은 100번 싸워서 1번만 이겨도 이득인 상대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드의 능력치는 바알에 한참 못 미친다.

모든 강화 스킬을 중첩시키고 사기적인 템빨로 6융합 검무까지 전개해야 바알을 위협할 수 있다.

반면 바알의 잠재력은 끝이 없다.

극단적인 예로, 바알은 다음 전투부터 지옥 도약 스킬을 적극 활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오늘 유라의 지옥 도약에 2번 연속으로 낭패를 겪었으니 당연히 의식할 테고 되갚아주려고 노력하겠지.

‘유라가 쓸 수 있는 스킬은 바알도 쓸 수 있다고 봐야 옳다.’

바알은 죽어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기술을 모조리 습득하고 있다.

더군다나 데빌 슬레이어 알렉스의 영혼은 파그마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바알의 수중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데빌 슬레이어의 스킬을 모조리 활용하진 못할 거라는 점인가.’

데빌 슬레이어의 스킬 구조는 대부분 사악한 기운을 약화하고 정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알이 사용했다간 도리어 제 살을 깎아먹는 격이 되는 스킬들.

때문에 모든 스킬을 활용하진 못하겠지만, 지옥 도약을 쓸 거란 사실만으로도 큰 위협이었다.

‘각오해야 돼.’

한동안 연속 될 패배를.

바알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월하다.

놈과 싸워서 지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결과다.

아니, 당연한 수준을 넘어서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자.

놈과 100번 싸워서 1번만 이겨도 이득이라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니까.

‘져도 손해가 아니고 한 번 이기면 대박이니.’

바알의 레벨은 너무 높고 그리드에겐 깨달음이라는 사기적인 패시브 스킬이 있다.

그리드는 선구자의 자리를 크라우젤에게 물려줬지만 그게 권리를 상실했단 뜻은 아니다.

그리드가 선구자가 아닌 10번째 결사의 지위를 얻게 된 배경엔 하야테의 호의가 있었다.

하야테는 그리드에게 의무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혜택을 주기 위해 10번째 결사라는 특수한 지위를 만든 것이다.

“유라, 나하고 대련 좀 해주라.”

크리스탈 성.

템빨단 지옥지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지옥에서 가장 안전했다.

바알과 싸우는 내내 긴장과 흥분으로 날뛰었던 그리드의 심장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안정감이 있었다.

그리드는 마지막 순간에 가슴이 꿰뚫리며 소모됐던 불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유라와 대련하고 싶었다.

그녀가 지옥 도약 스킬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 적의 입장에서 체험해 보면 큰 공부가 될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를 유라가 진정시켰다.

“일단 라인하르트로 돌아가서요.”

제국은 적이 몹시 많다.

심지어 초월적인 수준의 적들.

특히 천상의 신들은 지상을 관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그리드가 자리를 비운 틈을 놓치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리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내키지 않았다.

“지상에 한 번 돌아가는 순간 지옥에 다시 오기 힘들어질 것 같은데...”

라인하르트에 적이 침략하는 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하물며 라인하르트의 방비는 완벽에 가까웠다.

비록 사도들이 자리를 비웠다곤 하나 아스모펠을 비롯한 전 적기사단과 강력한 군대, 거기에 크라우젤까지 적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반면 바알이 그리드를 훼방 놓는 건 정해진 운명이다.

실제로 놈은 지옥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지점에 함정을 설치해놨었다.

다음에 또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땐 어떤 끔찍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의 근심을 읽은 유라가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맞아...’

그리드가 유라의 지옥문 스킬을 떠올렸다.

지상과 지옥을 잇는 차원 이동 게이트.

최근 1년 동안 자주 사용하면서 레벨이 크게 올랐다고 들었다.

이용 가능 인원이 최대 넷으로 늘었고 좌표를 특정하기 쉬워졌다고.

예측하지 못한 지점으로 떨어져 미아가 되는 경우가 몹시 드물다고 했다.

‘엘리베이터는 정해진 위치로 떨어지는 탓에 바알이 함정을 파놓기 좋지만 지옥문은 달라.’

지옥문은 유라가 지정한 포인트 근처로 열린다.

천하의 바알이라도 그리드 일행이 지옥에 도착하고 나서야 위치를 특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리 함정을 파놓기 힘든 구조였다.

‘함정이고 나발이고 간에 군단을 이끌고 오면 답이 없어지긴 하겠지만.’

바알은 제1지옥의 주인이다.

하나하나가 30위대 대악마급이라는 수천의 악마 군단과 한 자릿수 대악마와 비견되는 측근들을 거느렸다.

바알 본인만큼이나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잠재력을 지닌 붉은 살덩어리와 아수라만 봐도 바알 군단의 전력은 그리드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장담했다.

언젠가 자신이 바알을 완전히 압도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않는 이상 바알이 군단을 움직일 가능성은 없다고.

바알의 성격을 이해했기에 가능한 추측이다.

놈은 치우와 달랐다.

죽음을 ‘실감하길’ 바랄 뿐, 실제로 죽을 생각은 없었다.

놈에게 죽음의 위기란 무료함을 달래고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오만은 자존심과 비례한다.

고작 한 명의 신, 심지어 자신보다 약한 놈을 이겨보겠답시고 군단을 끌어들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 돌아가자.”

이날부터 그리드의 일정이 역대급으로 빡세졌다.

불사의 쿨타임이 돌아올 때까지 지옥 도약 스킬을 적극 활용하는 유라를 상대로 대련에 임했고, 불사가 끝나자마자 지옥에 재차 난입해서 바알과 싸웠다.

두 번째 대결은 패배했다.

세 번째 대결도 패배했다.

네 번째 대결에서도 졌다.

일정 횟수 이상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쿨타임이 늘어나는 유라의 지옥 도약과 달리 바알의 지옥 도약 스킬은 쿨타임이 지극히 짧게 유지됐다.

놈이 그리드의 오른쪽으로 찔러 넣은 마검이 그리드의 정수리 위에서, 놈이 그리드의 복부에 꽂아 넣은 발차기가 그리드의 등 뒤에서 나타나는 식으로 그리드를 완전히 농락해버렸다.

정면에서 날아오던 백만대적검의 기파가 불현 듯 자취를 감췄다가 목덜미를 베고 지나갔을 땐 진짜로 오줌을 지릴 뻔했다.

기본 공격 속도 자체가 인공 감각에 의지해야 반응할 수 있을 만큼 빠른 놈이 페이크까지 섞어대자 이건 뭐 연습을 한다고 해서 대응할 레벨이 아니었다.

“갓 핸드 진짜 겁나게 쓸모없네.”

“...”

그리드의 한탄을 알아 듣기라도 한 걸까.

늘 그리드의 곁에 뱅글뱅글 맴돌던 갓 핸드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드는 다소 죄책감을 느꼈지만 재차 한숨이 나왔다.

예전부터 갓 핸드는 그리드와 동급 이상인 적을 상대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갓 핸드 자체가 그리드의 능력치 일부를 재현한 아이템 즉, 그리드의 열화판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리드도 감당하기 힘든 상대에게 갓 핸드의 공격이나 방어가 통용되는 건 어지간히 큰 행운이 따라주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태극권? 어림도 없지.

그나마 지금은 인공 감각으로 큰 역할을 해줬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그때 메테오만 맞췄어도 이길 수 있었을 거 같은데.’

고도에 띄어놓고 다니는 탐욕 덩어리.

그리드 본인은 메테오라고 부르고, 브라함은 무식한 쇳덩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당연하게도 바알에게 적중하지 못했다. 매번 읽히고 회피 당했다.

그리드는 여태까지완 다른 탐욕의 활용법을 구상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탐욕으로 만들 수 있는 보조 아이템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갓 핸드라는 결론.

‘바알을 상대로는 마장기보다 갓 핸드가 나아. 갓 핸드는 그나마 내 스킬을 재현하는 반면 마장기는 공격 스킬이 거의 없고 패턴이 단순하니까. 일단 갓 핸드의 숫자를 최대한 늘려 보자.’

바알에게 3번째 패배를 겪은 날.

즉시 라인하르트로 귀환 한 그리드는 긴 시간 동안 축적해온 탐욕 덩어리의 일부를 쪼갰다.

그리고 수백 개의 갓 핸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초조해하진 않았다.

3번 연속 된 패배와 무관하게 그의 경험치통은 오히려 가득 차있었으니까.

죽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리드 입장에선 무조건 싸우면 이득인 수준이다.

[클래스 등급이 신화인 경우 보조 무기를 최대 300개까지만 운용하실 수 있습니다.]

[...놀라운 업적입니다!]

[보조 무기의 활용 제한을 플레이어 최초로 밝혀냈습니다.]

[최초 업적 보상으로 칭호, <양심이 없니?>를 얻었습니다.]

<양심이 없니?>

보조 무기의 동시 운용 가능 숫자 +10

“...”

총 310개의 갓 핸드를 주변에 띄우게 된 그리드를 유라와 네펠리나, 그리고 노에와 랜디가 넋 놓고 바라봤다.

지난 한 주 동안 그리드와 함께 지옥에서 고생했던 멤버들.

그들의 레벨 또한 크게 상승한 상태였다.

유라와 네펠리나에겐 깨달음 효과가 없었지만 그리드의 노력 덕분에 죽음을 모면했으니까.

그녀들은 바알에게 처음 승리했던 날 얻은 경험치를 토대로 레벨이 몇 개나 오른 상태였고 이후로 지금까지 경험치를 잃은 적이 없다.

노에와 랜디는 그리드와 운명공동체다. 일단 전투에 참가하는 이상 그리드가 얻는 경험치의 일부를 나눠 갖는다.

“요즘 불교에 심취해 있나?”

발할라에 남은 상흔을 토대로 바알의 검술 특징을 분석하는 역할을 맡은 크라우젤.

깊은 사색에 잠긴 채 발할라에 새길 빗금을 새로이 구상해가던 그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물었다.

관음보살이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이루어진 몸.

그리드의 모습이 바로 그 천수관음과 얼핏 닮았으니까.

신성하기 보단 매우 패도적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하하, 크라우젤. 나는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를 존중하고 사랑해.”

“왜 갑자기 국어책을 읽...”

“하하, 뭐라는 거니.”

그리드는 언제, 어디서든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음을 의식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워낙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탓에 특정 종교를 편애하는 것처럼 비칠 순 없었다.

교회, 절, 성당은 물론이고 힌두교 사원, 미얀마 사원, 캄보디아법당, 몽골법당 등등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단체에 번갈아가면서 후원해온 이유다.

세희의 조언이었고 효과는 컸다.

각계각층의 인사가 그리드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그리드의 우군이 깔려있다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언젠가 대선에라도 출마 할 셈인가?’

워낙 부지런해서 그런지 참 피곤하게 산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크라우젤이 검을 꺼냈다.

황혼.

그리드의 황혼보다 조금 더 화려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드래곤 웨폰이었다.

스윽, 스윽.

크라우젤이 발할라의 옷깃과 심장, 허벅지 부근을 감싸는 제논의 비늘에 새로운 빗금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검성의 호의가 담긴)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에 ‘동일 검상 중첩 면역’ 옵션이 추가되었습니다.]

바알이 그리드를 압도하는 가장 큰 부분은 속도다.

쾌속한 검법으로 상시 ‘연격’ 효과를 발휘했다.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수차례의 중첩 피해를 입었다.

그것에 면역하게 됐다.

물론 도검류 무기에 입는 피해에만 한정 되는 효과였지만, 바알이 검술을 고집하는 이상 앞으로 그리드의 부담감은 크게 줄어들 것이었다.

“다녀와라.”

“그래.”

크라우젤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그리드가 유라의 지옥문을 타고 설욕전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또 패배했다.

하지만 다음 날 여섯 번째 전투에선 조금 더 치열한 공방을 나눈다 싶더니 이튿날 일곱 번째 전투에선 승리했다.

총 310개로 늘어난 갓 핸드와 유라, 크라우젤의 도움이 그리드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준 것이다.

조금 더 용기를 내기 시작한 네펠리나는 당연히 승리의 일등공신이었고.

바알이 슬슬 의문을 품었다.

저놈은 대체 뭐기에 나날이 강해진단 말인가?

고독한 절대자들은 그리드를 이해하지 못한다.

“...!”

“...!”

바알을 죽인 즉시 등을 돌려 도망치던 그리드와 유라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영혼의 목소리를 들었다.

파그마의 영혼과 알렉스의 영혼.

바알이 약해진 틈을 타 이성을 되찾은 영혼들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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