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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94화 (1,592/1,794)

템빨 79권 - 12화

“지옥에서의 보름이 지상에선 15년이었나?”

반쯤 진심이 담긴 농담.

그리드의 급격한 발전을 납득하기 위한 바알 나름의 노력이었다.

물론 현재 바알은 만전이 아니다.

야탄을 대체 할 존재.

새로운 악신을 만드는 실험을 하느라 상당량의 진기를 소모한 직후였다. 황폐해진 정신 탓에 심상의 얼개가 느슨해졌다.

마력이 약화되고 감각이 무뎌지는 등 상태가 나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절대자였다.

두 번 연속으로 일방적인 손해를 봐선 안 되는 입장이었다.

한데 당해버렸다.

그리드가 진정으로 강해졌단 의미다.

‘이래서야 보름 전 겪은 실패가 크군.’

패배가 아닌 실패다.

그리드와 번헬리어의 협력.

명백히 절대자의 격에 도달했던 광신광룡을 상대로 바알은 단 1회밖에 죽지 않았었다.

똑같은 결과를 수천 번 맞이할 때까지 더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서사시가 그의 죽음을 패배로 판정해버렸다.

순전히 억지였다.

바알 입장에선 인정 할 수 없는 패배.

그러므로 실패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때 훼손 된 격이 아쉽게 됐어.’

이제와 새삼스럽게 아쉬운 이유?

그야 당연히 그리드 때문이다.

저놈의 성장 속도가 예측을 초월했다.

여태껏 보여준 행보와 비교해 봐도 월등히 빨랐다.

위협으로 다가올 정도다.

화르륵!

“어이쿠.”

그리드의 새로운 검은 마치 처음부터 아모락트와 호응하기 위해 창조 된 것 같았다.

아모락트의 기괴한 심상이 만들어낸 순백의 지옥과 궁합이 무척 좋았으니까.

움직일 때마다 도리어 흐릿해져선 존재감을 지워버렸다.

“너희 둘이 닮았다.”

바알이 마검을 그리드의 인공 감각처럼 활용했다.

마검을 감싸고 있는 새카만 마기가 옅게 번지는 반응을 토대로 황혼의 접근을 읽고 대응했다.

“너희 둘 다 수치심을 모르지 않나.”

피식.

그리드의 검무를 드디어 쉽게 회피하기 시작한 바알의 입가로 조소가 번졌다.

“신에게 빌붙어 연명하려는 악마와 미개한 인류를 속여 사기를 쳐대는 신. 썩 어울려.”

“다짜고짜 인신공격을 하는 걸 보니 제법 초조한가 보군?”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바알의 마검이 충격을 받을 때마다 퍼뜨린 새카만 마기가 어느새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황혼에서 번지는 신성이 짙어졌다.

더 이상 선공을 가해봤자 효율이 나빴다.

바알에게 뻔히 읽혔다.

대신 상승한 공격력을 활용하기 위해 방어 태세로 전환하는 그리드에게 바알이 반문했다.

“헥세타이아는 잘 지내나?”

“...?”

“파그마에게 신벌을 내리는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던 놈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한낱 인간을 질투해서 지옥까지 달려와 도움을 청하는 놈의 모습은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추했지.”

옛 인마대전의 발생 배경이다.

그때를 회상하는 바알의 표정이 유독 즐거워 보였다.

“너는 알아야 할 거다. 헥세타이아가 네게 그 검을 선물로 준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지우기 위해서지 너를 위해서가 아니야. 놈을 신뢰했다간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한낱 인간마저 질투했던 놈이 너를 질투하지 않을까.”

“선물? 이거?”

그리드가 황혼을 가리키며 묻자 바알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무엇이겠냐는 듯이.

진정으로 헥세타이아의 작품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바알은 아스가르드의 사정을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헥세타이아가 투옥 됐다는 사실을 설령 알았다고 해도 황혼을 본 순간 석방 됐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황혼은 역대 최강의 무기였다.

당연히 대장장이의 신이 만든 작품이라고 믿게 될 정도로.

“내가 만든 건데.”

“...크하하하핫!”

바알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흰자위 없이 검었던 놈의 두 눈이 여러 색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으으으...

고통어린 신음이 뒤따른다.

어느새 꺼내진 파그마의 영혼이 놈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내겐 파그마의 안목이 있다. 네놈의 실력으론 그 검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뻔히 아는데 거짓말이라? 네놈도 어지간히 자존감이 낮구나. 언젠간 헥세타이아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질투하는 지경에 이르겠어.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딱 맞다.”

“멋대로 생각해라.”

크라우젤과 함께 궁리해서 만들 수 있었다, 라는 자세한 내막을 굳이 설명해 줄 필요가 있을까.

코웃음 친 그리드가 호흡을 골랐다.

저 멀리 유라의 곁에 서있는 네펠리나의 기척을 읽으면서다.

조금 전, 아수라의 일부가 됐던 바알이 난입했을 당시.

유라는 도망치라는 아모락트의 외침을 무시했다.

지옥 도약을 낭비하지 않고 버텼다.

덕분에 그리드의 퇴로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네펠리나는 언제라도 그리드와 협력할 수 있게끔 대기 중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이라고 봐야 돼.’

바알은 파그마의 검무와 무패왕의 검술을 다룬다.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스킬을 분쇄하는 검술과 반격 검술을 동시에 갖췄단 뜻이다.

6융합 검무라도 발동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 막히는 수가 있었다.

‘우선... 주변을 다시 밝힐 필요가 있어.’

바알의 마기가 일대를 검게 물들인 지금.

황혼은 공격력이 대폭 상승한 대신 명중률을 크게 잃었다.

휘두르는 족족 바알이 반응해댔다.

다시 주위를 밝힐 필요가 있었다.

바알이 한 발 늦게 인지하는 공격을 날려야 그나마 승산이 생겼다.

지금 그리드의 곁에는 시선을 끌어줄 번헬리어가 없었으니까.

아모락트의 협력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리드는 아직 그녀를 신뢰하지 못했다.

애초에 쇠사슬에 꽁꽁 묶여있는데 무슨 도움을 바랄까.

“화(花).”

금의 성역을 세운 그리드가 검기의 꽃잎을 흩뿌렸다.

황혼의 영향으로 노을빛을 머금은 꽃잎 하나하나의 기운이 여태까지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맹했다.

대기를 찌릿찌릿 진동시키는 수준으로 하나하나가 일격필살의 위력을 담은 병기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바알을 위협할 수준까진 아니었다.

바알은 요란하게 나부끼는 꽃잎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거리낌 없이 돌파하며 그리드와의 거리를 좁혔다.

더욱 선명한 어둠 안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다는 판단을 내린 눈치였다.

그리드의 예상대로였다.

현재 그리드는 이도류를 사용 중이다.

황혼뿐만 아니라 구젤의 도와 크란벨의 뿔을 합체시킨 검을 양손에 거머쥐고 있었다.

두 자루 검은 공통 된 옵션을 지녔다.

공격을 적중시킬 때마다 ‘대상의 방어 스킬, 마법, 권능을 높은 확률로 무력화’시키는 옵션 말이다.

그리고 마기도 권능의 일종이다.

바알 고유의 권능이라기 보단 악마라는 종이 지닌 권능.

삭제 대상에 포함 됐다.

쏴아아아아!!

“...!”

차츰 그리드와의 거리를 좁혀가던 바알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피부에 닿으며 폭발하는 꽃잎들이 주변의 어둠을 걷어냈기에.

그의 몸에서 한 순간 흩어진 마기가 마검의 형체마저 잠시 흐릿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마검의 위력이 약해지진 않았다.

그의 마검은 기본적으로 심상을 뼈대로 삼는 것이고 마기는 부가적인 개념에 불과했다.

다만 어둠이 걷혔다는 점이 문제다.

쿠르릉...

위기감을 느낀 바알이 전력을 끌어올렸다.

충분히 거리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로 무패왕의 검술을 전개했다.

절대자의 감각으로 펼쳤다.

일대가 진공 상태에 돌입했다.

마치 멈춘 듯한 세상에서 오직 바알의 검만이 쾌속하게 뻗어졌다.

그리드는 물속에 잠긴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심지어 물을 흠뻑 빨아들인 솜옷을 수백 벌 겹쳐 입은 느낌이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아니, 분명히 움직이고 있으나 느렸다.

반면 쾌속하게 뻗어오는 바알의 검을 빤히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 나이트 효과를 처음부터 발동했어야 돼.’

소리조차 사라진 세계에서.

섬전마냥 닥치는 바알의 검에 목덜미를 베이기 직전.

그리드가 자신의 실수를 책망하는 바로 그때,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수백수천 개의 솜옷이 벗겨져 나갔다.

어떤 감촉이 발에 닿음과 동시였다.

[초월룡 네펠리나에 탑승하였습니다.]

[세계에 유일한 칭호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가 활성화 됩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3배 상승하고 격이 상승합니다.]

“...!”

“...!”

그리드가 감탄했고 네펠리나는 경악했다.

바알이 그리드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한 시점부터 유라가 전개한 지옥 도약 스킬.

그로 인해 지금 막 그리드의 발밑으로 위치가 옮겨진 네펠리나는 바알을 코앞에서 직면하자 굳어버린 반면 그리드는 미소 지었다.

이 순간 그는 완전한 절대자였다.

쩌어어어어어엉!!

바알의 마검이 그리드의 목덜미를 베었다.

우선 발할라의 옷깃에 닿았다.

그리고 빗금에 미끄러지며 위력을 다소 상실한 뒤 크란벨의 머리에 가로막혔다.

그것만으로도 그리드는 끔찍한 격통에 시달렸다.

뇌가 통째로 흔들리면서 눈앞에는 새하얀 벼락이 펑펑 터지는 듯했다.

생명력이 최소 절반 이상 한꺼번에 날아갔다.

하지만 목이 잘려 즉사하는 불상사만큼은 모면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뭔?”

목을 베여놓고 멀쩡하다고?

황당해하는 바알의 시야 한쪽이 일그러졌다.

불시에 기척을 드러낸 황혼이 대기를 짓뭉갠 여파다.

6융합 검무가 바알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큭큭...!”

바알이 웃으며 응수했다.

서걱, 서걱, 실시간으로 잘려나가는 팔과 다리를 매번 즉시 수복하며 마법과 마검을 휘둘러댔다.

적당히 설치라는 듯이 그리드의 손목을 붙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순간적으로 발현한 <살레오스의 힘> 탓에 제압하지 못하고 비겼다.

물론 살레오스의 힘은 단발성에 불과했다.

그리드는 끝내 바알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연속으로 전개한 두 번째 6융합 검무는 발동 도중에 취소되고 말았다.

꽈앙!!

바알의 박치기가 그리드의 얼굴에 꽂혔다.

날카로운 3개의 뿔을 위시한 박치기였다.

얼굴에 구멍이 숭숭 뚫려야 정상이지만 그리드는 보이지 않는 투구와 왕관을 무장하고 있었다.

코피를 조금 쏟는 게 전부였다.

바알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괴물이냐?”

“괴물은 너고.”

베여도 베여도 즉시 수복되는 몸.

심지어 목숨도 무한대에 가깝다.

반면 이쪽의 목숨은 하나라고.

꽈앙!!

아찔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그리드가 입에서 브레스를 뿜었다.

바알의 시선을 현혹함과 동시에 세 번째 6융합 검무를 전개했다.

하단부터 베어 올려 시야의 사각을 노리는 검무.

밝은 곳에서 황혼과 가장 좋은 궁합을 발휘하는 초연룡극살파(超聯龍極殺派)였다.

바알의 정보에는 없는 새로운 융합 검무이기도 했다.

완전히 허를 찔린 바알의 몸이 두 갈래로 갈라져버렸다.

“노옴...!”

전신에서 피를 내뿜는 바알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됐다.

목숨을 또 한 번 잃었단 사실에 명백히 분노했다.

죽고 싶다고 지껄였던 놈답지 않은 반응.

자존심의 문제일 거다.

“유라!!”

네펠리나의 작은 뿔을 잡아당겨 고개를 돌리게 만든 그리드가 다급히 외쳤다.

지옥에서 유라의 스킬 쿨타임은 몹시 짧아진다.

다른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앞서 사용한 스킬의 쿨타임이 한층 더 짧아지는 구조였다.

연신 스킬을 전개하며 그리드를 조금이나마 보좌하던 그녀는 이미 준비를 끝마쳐두었다.

그리드의 이동 경로로 지옥 도약 스킬을 전개했다.

“템빨신!!”

죽음을 맞이한 순간 산산조각 났던 마검을 어느새 다시 빚고 몸을 수복시킨 바알이 그리드를 따라붙었다.

그의 마검이 그리드의 심장을 뒤에서부터 관통했지만 한 발 늦었다.

그리드 일행은 이미 지옥 도약을 타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

바알이 잠시 넋 나간 표정을 지었고 아모락트는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녀를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의 길이가 불시에 짧아지면서 그녀를 저 뒤에 우뚝 서있는 성 안으로 끌어당겼다.

한편...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좋았어!”

무사히 크리스탈 성에 도착한 그리드는 유라와 네펠리나를 껴안은 채 환호했다.

제대로 호구를 잡은 것 같다는 생각을 품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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