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9권 - 10화
그리드는 칸의 유작을 멀리할 생각이 없다.
발할라를 몸에 착용해야 비로소 안정감을 느꼈다.
작품에 담긴 칸의 애정과 호의를 일종의 가호로 삼았다.
황제가 된 이후.
대륙 각지에서 진상하는 의복들을 예의상 착용하다 보니 발할라를 벗어두는 일이 부쩍 잦아졌지만, 전쟁에서만큼은 꼭 발할라와 함께해온 이유다.
다만 발할라의 원형을 유지하는 게 어리석은 고집이란 사실은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다.
이번에 바알과 싸울 때도 호되게 당하지 않았나.
공교롭게도 발할라의 성능은 드래곤 아머에 한참 못 미친다.
고집을 꺾을 필요가 있었다.
칸과의 추억에 집착하면서 현재의 칸을 잃는 우를 범할 순 없었으니까.
‘칸이 언제까지고 천상의 신들에게 이용당하게 놔둘 순 없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져서 환생할 수 있게끔 도와야 해.’
따앙, 따앙, 따앙...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
이 작품에 담긴 가장 큰 의도는 착용자의 안전이다.
칸은 오직 그리드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 발할라를 설계했다.
그 애틋한 마음이 그리드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심상의 근원이 된 것이다.
그리드는 발할라의 기본 구조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이미 완전해서 그럴 필요 자체가 없었다.
칸의 의도에 반하지 않도록 형태를 유지하되 재질을 드래곤의 비늘로 교체해나갈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급소 부위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칸이 남겨놓은 흔적들을 최대한 천천히 음미해가면서.
어차피 그가 구할 수 있는 드래곤의 비늘은 수량이 한정적이다.
‘저번부터 눈이 자주 마주치네.’
제논의 비늘을 단조하던 도중 인기척을 느낀 그리드가 창밖을 힐끗 보더니 손을 흔들어주었다.
엘니다나.
어느덧 수천 명이 된 템빨단원 중 한 명이다.
랭킹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유독 눈에 띄었다.
단순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배경이 특수했다.
집중 관찰 대상인 라이언 상단 출신인데다가 머리 회전이 몹시 빨라서 라우엘에게 중용되었다.
고작 몇 달 만에 라우엘의 보좌관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눈에 띌 수밖에.
게다가 엘니다나라는 아이디는 누가 봐도 나다니엘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당대 로스차일드 가주의 이름이랬지.’
설마 그녀가 황당하게 나다니엘 본인일 리는 없겠지만, 애초에 라이언 상단 출신인 이상 뭔가 관련이 있을 확률은 높았다.
곁에 두고 지켜 볼 필요가 있다고 라우엘이 누차 주장해왔다.
그는 라이언 상단의 뒷배가 로스차일드라고 확신하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그리드에게는 모든 게 비현실적인 일들로 다가왔다.
나치즘 최대의 피해자.
로스차일드는 대규모 전쟁과 재산 분할 사건 등을 겪고 21세기에 이르러서 크게 쇠락한 가문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다시 부흥해서 옛 부와 권력을 되찾았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했다.
설령 소문이 진실일지언정 그들이 굳이 Satisfy를 통해서 내게 접근 할 이유가 있을까?
본래 과거부터 로스차일드와 관련 된 음모론은 워낙 많았다.
오죽하면 세계를 지배하는 흑막이라는 말까지 있었을까.
그들을 노골적으로 경계하고 의심하기엔 황당무계한 면이 있었다.
‘어차피 라우엘이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까 신경 끄자.’
엘니다나는 그리드의 팬을 자처했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템빨단에 가입하길 희망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리드 및 템빨단 주요 인물들에게 큰 호감을 품고 있었다.
팬이라는 말이 거짓일 확률은 적었다.
그리드는 그녀가 종종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행동을 굳이 의심하지 않았다.
‘나를 보면서 마음의 평온을 얻고 싶은 거겠지.’
라우엘 같은 중2병 상사 밑에서 일하다 보면 얼마나 많이 시달리겠나.
나를 보고 눈과 마음을 정화하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이제 그리드는 사람들의 호의에 익숙했다.
게다가 통찰력 덕분인지 상대방의 눈빛만 봐도 이 사람이 불손한 의도를 품었는지 아닌지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다.
그가 봤을 때 엘니다나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몹시 호의적이고 순수했다.
종종 아련하게 보는 듯해서 의아하긴 했지만 거북하지 않았다.
“정말로 곧바로 다시 지옥 원정에 나설 셈이냐?”
불안한 얼굴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던 네펠리나가 우뚝 멈춰 서며 물었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바알은 약해졌고 그리드는 강해졌다.
20번째 서사시의 파장이 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리드는 역대 최강의 드래곤 웨폰 <황혼>을 얻었고 발할라를 업그레이드 중에 있었다.
언제라도 드래곤 나이트 효과를 발동할 수 있기도 했다.
네펠리나의 초월룡 효과는 단 1분이 한계였지만 큰 단점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리드는 단기 결전을 노려야하는 입장이니까.
그가 바알에게 죽음을 안길만한 수단은 6융합 검무뿐이었다.
6융합 검무를 때려 박는데 1분은커녕 몇 초면 충분했다.
‘물론 바알의 목숨은 여러 개지만 죽이면 죽일수록 약해지겠지.’
그리드는 플레이어다.
그의 목숨은 무한했다.
‘바알의 목숨을 한두 개 취하는 대가로 설령 내가 죽더라도 전혀 손해가 아니야.’
일단 레벨 다운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바알의 레벨과 격이 워낙 높았다.
바알과 싸우는 과정에서 얻는 경험치가 죽어서 잃는 경험치를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깨달음 효과의 사기성이 편법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애초에 죽을 확률 자체가 낮고.’
그리드의 불사는 길다.
긴급 탈출도 가능해서 충분히 도망칠 시간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 죽더라도 아이템을 드롭할 가능성도 낮았다.
아이템 드롭 확률은 악명치에 비례하니까.
유독 PK범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하물며 그리드는 행운 스탯이 무척 높았다.
행운 스탯은 이로운 일이 발생할 확률을 높이고 해로운 일이 발생할 확률을 낮춘다.
워낙 두루뭉술한 개념이었고 결국 ‘확률’을 높이는 수준이기 때문에 마냥 신뢰할 순 없었지만 그리드는 너무 많은 일을 겪어왔다.
자신의 운이 좋은 편이라는 사실을 이제 순순히 인정했다.
그 행운조차 타고난 게 아닌 노력으로 거머쥔 거란 사실이 다소 씁쓸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리드는 자기 자신을 믿었다.
반면 네펠리나의 불안감은 몹시 컸다.
“나는 무슨 수로 도망치느냐?”
그리드야 긴급 탈출이 가능하고 설령 죽더라도 부활한다 치자.
하지만 네펠리나에겐 죽음이 끝이었다.
그리드가 죽고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그녀는 무슨 수로 바알의 마수에서 벗어나 지옥을 탈출한단 말인가?
어떤 끔찍한 상상을 한 건지 후덜덜 떨어대는 네펠리나를 그리드가 안심시켜주었다.
“유라만 믿어.”
유라의 <지옥 도약> 스킬은 보통의 이동 마법과 개념이 달랐다.
좌표를 기준으로 삼고 이동하는 텔레포트 등의 마법과 달리 차원 자체를 왜곡시켜서 원하는 장소와 현재 위치를 하나로 이어버렸다.
모든 이동 스킬과 마법을 봉인시켰던 바알의 술식조차도 지옥 도약을 차단하진 못했었다.
“그녀가 우리를 지켜줄 거다.”
어지간해선 그녀가 우리를 크리스탈 성으로 옮겨 주리라.
물론 타이밍을 맞추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리드는 유라를 믿었다.
데빌 슬레이어의 감각은 바알이 약화되는 순간을 분명하게 느낄 테니까.
***
네바르탄이 숨결을 토할 때마다 바닥을 드러냈던 호수에 물이 다시 가득 찼다.
네바르탄의 꼬리와 발짓이 무너뜨렸던 신전들이 복구되어가는 과정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
호수 중앙에 앉아 명상하는 크라우젤의 손에도 <황혼>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드의 황혼과 비교해서 생김새가 오히려 화려했다.
제논의 비늘을 수백수천 번 접어가면서 단조한 까닭에 칼날에 금속 층이 생겼고, 그 여러 겹의 층마다 물들어 있는 주황색 신성이 서로를 난반사시켰기 때문이다.
저물어가는 태양을 칼날 크기로 잘라 뚝 떼어낸 듯한 모양새였다.
워낙 화려한 까닭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템빨계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이 호수 곁을 지날 때마다 멈춰 서선 숙덕거렸다.
저 검이 그리드가 일주일 전 새로 만든 두 자루 신검 중 하나라느니, 아름다운 생김새가 크라우젤의 외모와 몹시 잘 어울린다느니.
칭찬 일색이었다.
그리드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크라우젤을 향한 사람들의 호감은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었다.
‘...그래, 이곳에 조금 더 머물도록 하자.’
깊은 명상으로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있던 크라우젤이 서서히 눈을 떴다.
사실 그의 마음 같아서야 당장 뮐러의 무덤으로 향하고 싶었다.
뮐러의 시신을 수색하는 듯했던 무후총의 괴물들로부터 무덤을 지킬 필요성을 느꼈으니까.
뮐러의 시신이 자칫 무후총에 들어갔다간 어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지 몰랐다.
하지만 두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첫째는 뮐러의 제자를 자처했던 장님 검객.
그 무지막지한 인물 역시 뮐러의 무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내가 무후총의 악령들과 싸웠단 사실을 파악했겠지. 내가 다시 무덤으로 돌아갈 거란 사실을 눈치 챘을 거다.’
안개처럼 밀려드는 무후총의 악령들과 괴물들 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직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는 라인하르트의 안전.
결사들은 전원 탑으로 돌아갔고 사도들은 각자의 시간에 몰두 중이었다.
피아로는 선악의 열매라는 걸 가지고 라엘라와 여행을 떠났고 브라함은 마리로즈를 만나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메르세데스는 본가에 다녀오겠다고 떠났으며 지크는 어째선지 코크로 섬으로 이동했다.
네펠리나는 그리드와 함께 바알 원정에 나설 예정이다.
템빨단원들이야 진즉 각자의 사냥터로 이동했다. 다들 지옥에서 느낀 게 컸는지 성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라인하르트에 남는 전력은 사실상 사리엘 한 명이 전부란 의미다.
다들 라인하르트는 안전할 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는 눈치였지만 크라우젤의 생각은 달랐다.
한때 천외천으로 승승장구했던 시절.
그는 가장 안심했던 순간마다 위기를 겪곤 했었다.
Satisfy는 플레이어의 방심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템빨단은 철두철미한 조직이었다.
그리드는 자신이 바알과 싸우고 귀환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대략 40분으로 추정했고, 라우엘은 그 40분 사이에 발생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만한 수단을 마련해두었다.
지난 2주 동안 템빨계 주변으로 이전한 병영들의 구조를 보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병력이 최대한 템빨계의 버프를 받으면서 싸울 수 있는 형태였다.
어지간한 대악마나 대천사 수준으론 뚫지 못할 수준.
하지만 침입자의 격이 예측보다 높으면?
템빨단이야 즉시 귀환해서 전장에 합류하겠지만 그리드가 아닌 이상 사도들과의 소통은 쉽지 않다.
“스승님!”
마침 크라우젤을 발견한 로드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달려왔다.
소중한 벗의 가족이 짓는 저 밝은 미소를, 크라우젤은 반드시 지켜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