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9권 - 9화
백아도는 검성 뮐러가 봉인한 대악마 드라시온의 유산이다.
무려 11위 서열의 악마가 애용하던 병기이니만큼 응당 특별해야 옳았다.
드래곤의 송곳니를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의문을 품기엔 무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몇 달 사이 그리드의 인식은 크게 바뀌었다.
태초의 3악을 제외한 대악마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게 됐다.
드래곤의 무위와 드래곤 웨폰의 성능을 정확하게 체험했다.
드래곤, 심지어 고룡의 송곳니로 만든 검의 소유권을 고작 11위 악마가 가졌다는 점도, 그 검의 성능이 평범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도 현재 시점에선 납득하기 어려웠다.
‘바알의 성격을 몰랐다면 모든 게 의문투성이었겠지.’
드라시온의 정체는 타락한 천사 사리엘이었다.
하필 그의 손에 백아도가 들어간 게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바알의 장난질일 공산이 크다.
놈은 네바르탄을 미치게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송곳니가 네바르탄을 유인하는 매개가 될 것을 뻔히 알고 사리엘에게 쥐어줬을 것이다.
이유?
거창한 이유가 있었을까?
자신을 악마라고 믿는 얼간이 타천사가 미친 드래곤에게 잡아먹히는 희극을 다만 즐겁게 감상하고 싶었겠지.
‘네바르탄이 출몰하기 전에 뮐러에게 봉인당한 것이 사리엘에겐 오히려 행운이었던 셈이군.’
네바르탄의 광증이 전염되는 것임을, 이틀 전 그리드는 확인했다.
만약 사리엘이 네바르탄에게 살해당했다면 안 그래도 불안정하던 사리엘의 영혼은 더 큰 혼돈으로 일그러졌을 터였다.
‘혹시 뮐러는 사리엘의 정체를 알고 있었나...?’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산군에게 격을 나눠줬던 뮐러의 행적을 봤을 때 그는 의외로 세계관에 깊이 관여해왔을 수도 있다.
괜히 역대 최강의 검성이겠는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많은 존재들에게 언급되어온 인물이니만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도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상념에 잠긴 채 백아도를 살피는 그리드의 미간이 차츰 좁아졌다.
과거엔 몰랐지만 졸작도 이런 졸작이 없었다.
번헬리어의 송곳니, 정확히는 송곳니의 ‘파편’에 단순히 칼자루를 박아놓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검’으로 보이는 이유는 파편의 형태가 하필 칼날을 닮아서일 뿐.
바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모양인지, 단순히 우연으로 이런 모양으로 부러진 건지,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것이 ‘때 묻지 않은 소재’라는 점이다.
누군가가 어설픈 실력으로 제련이나 단조를 시도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당연해.’
지옥 유일의 대장장이 헬스미스는 제법 뛰어난 실력자다.
자신의 솜씨론 고룡의 송곳니를 제련할 수 없단 사실을 깨닫고 함부로 손대지 않았으리라.
‘헛된 욕심으로 귀한 소재를 훼손 할 순 없었겠지. 그에게도 장인 정신이 있으니까.’
뿌드득!
분해 스킬을 켠 그리드가 번헬리어의 송곳니를 조악한 칼자루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리고 다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크라우젤, 내가 이걸 구입할 순 없을까.”
무려 고룡의 소재다.
앞으로 두 번 다신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단언컨대 세계관 최고의 아이템 제작 재료였다.
그리드는 순수하게 욕심을 품었다.
물론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기에 구젤의 도와 크란벨의 뿔을 인벤토리에서 꺼내놓았다.
“단순히 돈만 주고 사겠다는 게 아니야. 추가적인 대가로 이 검 중 하나를... 아니, 둘 다 지불하도록 할게.”
크라우젤은 검성이다.
모든 도검류 무기를 사용 조건과 관계없이 다룰 수 있으며 일말의 제약조차 받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버프를 얻었다.
크라우젤 입장에서도 고룡의 소재로 만든 최강의 검을 당연히 갖고 싶을 터였다.
하물며 백아도의 주인은 크라우젤이다.
그리드는 자신이 엄청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부탁해봤을 뿐이다.
“그래.”
일고의 고민 없는 즉답.
“이해해. 물론 이걸로도 부족하겠... 어?”
당연히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리드가 다급히 말을 잇다가 입을 닫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다.
크라우젤이 어깨를 으쓱였다.
템빨계의 주황색 신성이 그의 몸짓을 따라 너울졌다. 괴리감 없이 어울린다.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했다.
“백아도는 처음부터 네게 양도 할 생각이었다. 그걸 가치 있는 물건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너 뿐인데 내가 무슨 염치로 욕심을 부릴까.”
“크, 크라우젤...”
속 깊은 어른이다.
게다가 나를 싫어하기는커녕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깨닫고 감격한 그리드가 크라우젤에게 손을 뻗었다.
칸과의 추억이 깃든 대장간의 풍경이 감수성을 자극한 탓일까.
눈시울을 붉힌 채 크라우젤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물론 실패했다.
질색하면서 그리드의 포옹을 피한 크라우젤이 말을 이었다.
“백아도를 빌미로 네 애병을 빼앗을 생각도 없어. 예정대로 새로운 검을 만들어주면 그걸로 족하고 감사하다.”
“흠흠...”
민망해서 헛기침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미소를 머금은 채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소 편치 못했던 마음이 간질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이번 지옥 에피소드.
사람들은 그리드와 템빨단이 ‘승리’를 거두고 ‘성공’했다고 인식했으나 실상은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했다.
수라도를 닫고 세상을 안정시킨 것 외에 그리드가 개인적으로 이룬 업적은 없었으니까.
지옥달의 근원을 없애지도 못했고 바알에게도 패배했다.
그나마 다행히 20번째 서사시가 사기를 친 덕분에 격이 대폭 상승했고, 심상의 레벨이 올랐으며, 새로운 6융합 검무를 만들었고, 압사 면역 권한을 얻긴 했지만 그게 전부다.
...고작 그게 전부라고 폄하하기엔 하나하나가 너무 대단한 보상들이었지만 아무튼 뭘 이룬 게 없으니 별도의 물리적인 보상은 얻지 못했다.
득템을 못했단 의미다.
광룡 네바르탄과 악룡 번헬리어, 그리고 흑기사 엘리고스와 나름의 친분(?)을 쌓고 네펠리나가 초월룡으로 진화한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정도였다.
까놓고 말해서 서사시 보상과 네펠리나의 진화만 놓고 봐도 드래곤 웨폰을 몇 개 얻은 것보다 더 훌륭한 보상이었지만 아무튼 조금은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백아도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드의 눈에는 크라우젤이 산타 할아버지로 보였다.
이날부터.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협업이 시작됐다.
당대 검성의 이상(理想)을 그리드가 이해하고 현실적으로 구상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백호검을 만들 때와는 명백히 다른 양상이다.
그리드의 현재 수준은 크라우젤의 이상에 마냥 매몰되지 않았다.
역으로 조언하고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따앙, 따앙, 따앙...
그리드의 망치가 악
룡의 송곳니를 두드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템빨계의 신성이 요동쳤다.
소용돌이에 빨려 들듯 송곳니에 스며들어갔다.
노을이 새겨지는 듯했다.
“황혼.”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진 작명.
적의 운명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끝내 종말을 안길 새로운 신검의 이름으로 적합했다.
***
모르페우스의 추측이 오래간만에 맞아떨어졌다.
그리드는 바알과 싸워서 이기지 못했다.
다만 문제가 생겼다.
템빨신의 서사시가 그리드의 승리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명백히 사기였지만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드는 승자의 권한을 모조리 손에 넣었다.
수라도를 닫은 것은 물론이고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무지막지한 혜택을 받았다.
하물며 선악의 열매까지.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등가교환의 법칙.
그리드는 악룡 번헬리어와 손을 잡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됐다.
번헬리어와 협력하여 지옥에서 활약한 대신 지상에 도착한 즉시 광룡의 어그로를 끌어버렸다.
모르페우스의 계산대로라면 템빨국의 지도에서 라인하르트가 사라질 확률은 무려 89퍼센트를 초과했다.
하야테를 비롯한 탑의 결사들이 전원 라인하르트에 집결했음에도 그랬다.
만약 네펠리나가 각성하지 못했다면 그리드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잃었을 것이다.
한데 마침 네펠리나가 각성해버렸고 덕분에 네바르탄이 광증을 재차 극복했다.
그리드는 잃은 것 없이 라인하르트를 지켜냈으며 초월룡을 손에 넣었다...
“의외로 승률은 낮은데 결과가 항상 좋네요?”
그리드가 신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전투 기록을 점검하던 운영팀 직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들의 평가대로 그리드의 승률은 썩 높은 편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싸울 때 이기지 못한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적들의 수준을 감안하면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리드에게 패배는 실패가 아니었다.
매번 싸워서 질지언정 얻는 게 많았다.
이쯤 되면 전 우주가 그리드를 돕는 느낌이다.
황당해서 헛웃음을 흘리는 직원들에게 윤상민 이사가 설명해주었다.
“그리드의 저력은 인망에서 나오는 거니까.”
왜곡 된 서사시는 그리드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바람이 만든 결과였고, 초월룡의 각성은 그리드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네펠리나의 필사적인 노력이 만든 결과였다.
황혼이라는 이름의 저 아름다운 드래곤 웨폰이 탄생한 배경에도 그리드를 아끼는 크라우젤의 마음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리드가 늘 혼자서 고생한다며 그의 처지를 동정하지만, 의외로 그리드는 혼자였던 적이 드물다. 그를 향한 사람들의 애정과 호의가 그에게 늘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드 본인이 가장 잘 알 거야.”
그러므로 이번 시련을 잘 넘겨야한다.
피아로가 지옥의 환경에서 우연히 탄생시킨 선악의 열매는 정말로 많은 존재들을 유혹할 테니까.
자칫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리드가 섣불리 지옥 원정에 나서는 순간 라인하르트는 그날로 멸망할 거라고 봐야 옳았다.
‘소별왕...’
붉은 살덩이로 전락한 형제를 완벽하게 타락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태초신의 자식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윤상민 이사는 벌써부터 등골이 오싹해졌다.
***
“음...”
백창호 소령은 여전히 얼떨떨했다.
육군 최강 첩보부대의 일원으로 여태껏 수많은 임무를 수행해왔지만 이번 임무가 워낙 특수했다.
대상의 정보를 취합해서 취향을 분석하고 어떤 선물을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라니...?
대상이 신영우. 즉, 그리드가 아니었다면 상부에 또라이가 있다고 의심했을 내용의 임무였다.
물론 난이도 자체엔 문제가 없었다.
백창호 소령은 심리전 전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이 황당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 할 자신이 있었다.
‘오늘도 똑같군...’
신영우의 행동 패턴은 지극히 단순했다.
5시에 외출.
7시까지 유라, 혹은 지슈카와 운동 후 귀가.
19시에 유라, 혹은 지슈카를 만나 저녁 식사 겸 데이트 후 22시 귀가.
정말 매일이 똑같았기 때문에 딱히 모을 정보란 게 없었다.
신영우의 취미는 운동이었고 유라나 지슈카를 만나는 게 유일한 낙으로 보였다.
이쯤 되면 상부에 ‘대상의 자택 근처에 공설운동장을 세워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보고하는 게 최선인 듯했다.
‘가만... 뭔가 놓친 것 같은데?’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지 않나?
‘보통 애인이 두 명이냐?’
설마 신영우의 바람은...?
“...!”
황당하단 표정을 짓고 있던 백창호 소령이 흠칫 놀라며 상체를 회전시켰다.
그대로 손을 뻗어 대상의 옷깃을 붙잡아 메치는 과정이 섬전 같았다.
바로 등 뒤까지 누군가의 접근을 허용한 상황이다.
소름이 돋는 일이어서, 평생토록 연마해온 주짓수가 반사적으로 실천된 것이다.
‘아차...!’
사람을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으면 최소 중상이다.
기척도 없이 등 뒤까지 접근해온 대상이 민간인일 가능성은 없었지만, 누군지도 모르고 다짜고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
허공을 한 바퀴 회전하고 있는 대상의 등을 받쳐주기 위해 다급히 손을 뻗는 백창호 소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게감이 없었다.
그의 손바닥 위로 겹쳐지는 건 누군가의 트레이닝복일 뿐이었다.
‘프로다!’
대상이 자신과 최소 동격의 실력자임을 깨달은 백창호 소령이 방어 자세를 취하며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그리고 대상의 정체를 확인하더니 경악했다.
눈앞에 선 사람은 임무 대상 신영우였으니까.
‘감시를 눈치 챘다고?’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모르게 집 밖으로 빠져나올 수가 있었지?
현재 대상의 자택은 21명의 대원이 실시간으로 감시 중...
백창호 소령의 생각이 거기서 끝났다.
신영우가 시야 사각으로부터 휘두른 발차기에 관자놀이를 얻어맞고 기절한 것이다.
흔히 뒤 돌려 차기라고 부르는 태권도 기술.
레가스가 자주 애용하는 기술이라 한 번 따라해 봤다.
“나쁜 사람들 같진 않은데...”
며칠 전부터 동네를 서성이던 거동 수상자들.
방관할 수가 없어서 처리하긴 했는데 최소한 킬러는 아니었다.
만약 누군가를 해칠 목적을 품은 사람들이었다면 마지막에 손을 뻗어 등을 받쳐 주려하지 않았겠지.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112에 연락하는 신영우.
그의 자택 주변에는 21명의 사람들이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놀랍게도 대한민국 육군 최정예 부대원이었다.
하지만 현실과 Satisfy의 경계를 허물어가고 있는 신영우와 툰 콤비를 감당하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