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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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79권 - 8화

『그리드의 출신이 인도였다면 진즉에 신으로 숭배 됐을 겁니다. 또한 그리드를 모시는 사원에는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겠지요.』

세계 최초이자 영국 최대의 공영 방송사.

오랜 역사와 강력한 공영성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인지도를 쌓아올린 방송사의 메인 뉴스 앵커가 화제에 올랐다.

무려 현실에서, 그것도 메인 뉴스의 클로징 멘트에서 신(神)을 언급한 것이다.

기자가 라인하르트 현장을 중계한 직후였다.

바알이 무너뜨린 질서를 바로 잡고 광룡의 폭주를 잠재운 그리드의 활약에 깊은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그리드가 한국에서 받는 대접과 힌두신이 된 인도의 스포츠 스타를 노골적으로 비교하며 한국의 소극적인 태도를 은근히 비판했다.

파장이 컸다.

이번에도 그리드에게 훈장이나 수여하고 국민들의 호감을 얻으려던 한국 정부에 비상등이 켜졌다.

“신영우 그 친구 군대는 왜 그렇게 빨리 다녀온 거야? 아직 입대 전이었으면 군 면제라도 시켜줬을 텐데. 에잉, 쯔쯧.”

“훌륭한 애국심을 지닌 청년이었던 것이겠죠... 하하, 저희도 사원이라도 하나 세울까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정부가 직접 나서서 우상 숭배를 하자고? 수천만 종교인들한테 욕 먹으려고 작정했어? 어디 시민단체에서 세워주면 또 모를까...”

난감하게 됐다.

그리드가 지난 몇 년 동안 보여준 활약은 고작 국가대항전에서 금메달을 딴 것과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단순히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수준을 넘어 수십 억 인류가 애용하는 또 다른 세계를 몇 번이나 지켜내지 않았나.

인지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으로, 역사상 그 어떤 위인도 그리드와 비교하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예수와 부처 다음 그리드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겼겠나.

각국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스타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그리드를 만나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해올 지경이었다.

그리드는 대한민국의 얼굴이고 자랑인 것이다.

정부 입장에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하는 도구였고 활용하기 위해선 마땅한 대우를 해줘야 옳았다.

“신영우 이름을 딴 훈장과 재단은 진즉에 만들었고, 관공서에 있는 헬기 이착륙장도 언제라도 이용 할 수 있게끔 인가했고... 도대체 이 이상 뭘 해줘야 하지? 그 친구가 가장 바라는 선물이 뭘까?”

“세금 면제는 어떻습니까?”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의견을 내게. 게다가 그 친구 국세청 기록 못 봤어? 안 내도 될 세금까지 낼 기세더만.”

절세를 위한 노력을 일절 찾아 볼 수 없는 투명한 납세 내역.

게다가 해마다 늘어나는 기부 내역.

그리드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다.

애초에 돈을 밝히는 성격이었다면 CF부터 수백 개는 찍었겠지.

세계 각국의 TV와 플랫폼이 그리드의 얼굴로 도배가 됐을 것이다.

“아무래도... HID를 움직일 필요가 있겠어.”

“네?”

다짜고짜 육군 첩보부대의 이름이 등장했다.

대화의 맥락이 끊긴 느낌.

그리드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 정부의 면을 세우고 그리드를 확실한 우군으로 삼을 수 있을까를 논의하던 도중 북파 공작을 논의하게 생긴 것이다.

분위기가 술렁이는 가운데 비서실장의 말이 이어졌다.

“신영우의 취향을 철저히 분석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군요...”

이날.

신영우의 자택 주변으로 대한민국 최정예 병력이 투입됐다.

순전히 신영우의 취향을 분석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었다.

선물 한 번 하기 힘든 것이다.

***

수라도가 열린 기간 동안 발생한 모든 사건사고가 전 세계에 생중계 됐다.

누가, 어디서, 어떤 식으로 활약했는지 사람들이 면밀히 관찰했다는 의미다.

논공행상의 시비를 가릴 만한 목격자가 몹시 많았다.

제국은 템빨단원들의 활약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기껏 공개적인 자리를 마련해 놓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포상을 내렸다간 괜한 반발을 살 우려가 있었으니까.

“정말로 고생 많았어.”

그 결과가 이거다.

플레이어 중 단 한 명도 사도와 결사들 이상의 포상을 얻지 못했다.

대부분은 이민족 왕들보다도 공로를 낮게 평가 받았다.

유라와 지슈카, 유페미나와 루비, 끝으로 크라우젤 만이 이민족 왕 이상의 활약을 인정받고 상등 훈장을 받았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어마어마한 보상이 뒤따랐다.

레이단 연금술 시설을 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한과 황실 창고를 이용할 권한, 그리고 대도시를 몇 개나 보유한 대영지의 주인이 됐으니까.

시청자들은 충분히 납득했다.

지슈카의 궁술과 유페미나의 마법이 없었다면 이민족 왕들이 마음껏 적진을 누빌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불가능했다.

그녀들의 후방 지원 능력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건 지크가 합류했던 시점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들 덕분에 지크의 전진이 더욱 수월하게 이루어졌었다.

루비의 서포트 능력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었다.

세계관 최강의 힐러라고 평가 받는 ‘퍼센트 힐’의 보유자는 아군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냈다. 그녀의 보조를 받는 템빨단원들은 목숨이 최소 10개 이상이라고 봐야 옳았다.

유라?

그녀가 없었다면 크리스탈 성이라는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옥에서 활동 중이던 플레이어들 전원 피신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무참하게 전멸했을 확률이 높다.

전투력 또한 이민족 왕들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었다.

그리드 일행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의 신위는 지옥에서 가히 최강을 논했다.

끝으로 크라우젤은, 무려 드래곤의 호흡을 베어냈다.

절대자 하야테가 그리워 할 정도의 활약을 선보이며 경천동지를 일으켜댔다.

이들의 활약이 도리어 사도들의 활약보단 컸다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네펠리나가 사도들의 평균치를 깎아먹은 탓이 컸다.

지옥에서 그녀는 정말 아무 일도 안 했으니까.

지상으로 돌아와 그리드를 등에 태우고 광신광룡의 주역이 되지 않았다면 밥만 축내는 애완동물이라는 비난이 들끓었을 터였다.

“어서 연회가 끝났으면 좋겠다.”

여전히 자유롭고 싶은 걸까.

영주직을 거부하는 크라우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리드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크라우젤의 칼집이 비어있음을 확인하고서다.

백호검을 만들었을 때처럼, 그리드는 다시 한 번 크라우젤과 교감하고 싶었다.

그와 검(劍)을 논하고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배움을 얻고 싶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샘솟았다.

크라우젤이 자유를 원하는 이유 또한 이해했다.

크라우젤은 아직 자신의 한계를 모른다.

한계에 도달할 때까진 한 곳에 정착하고 싶지 않겠지━라고, 크라우젤에게 한계를 알려준 당사자 그리드가 제멋대로 생각할 때였다.

“미안하다.”

크라우젤이 예상치 못한 사과를 건네 왔다.

“네가 기껏 만들어준 검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어.”

“...”

크라우젤 본인이 가장 힘들 터였다.

오랜 세월 애용해온 검을, 그것도 노말 등급부터 신화 등급까지 키워낸 검을 잃었으니까.

크라우젤에게 있어서 백호검은 단순한 무기를 넘어 온갖 추억이 담긴 소중한 보물이었을 것이다.

근데 내게 사과한다.

‘내 주변엔 왜 이렇게 착한 사람밖에 없을까.’

미소를 머금은 그리드가 크라우젤의 어깨를 툭, 살짝 힘을 줘서 때렸다. 흔히 친구가 친구에게 할 만한 친애의 표현이었다.

한데 크라우젤이 정색하면서 반응했다.

거의 기겁하면서 그리드의 손짓을 피해버렸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의 초감각이 그리드의 가벼운 손짓을 ‘위협’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리드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은... 함께 새로 만들자. 너무 마음에 두지 마.”

“...그래.”

크라우젤이 괜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드의 표정이 너무 슬퍼보였기에.

***

“크라우젤은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논공행상이 끝난 후.

연회장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테라스로 빠져나온 그리드가 한탄했다.

스킨십을 거부당한 일이 몹시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곁에는 유라가 함께였다.

“친구보단 경쟁자로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큰 거겠죠.”

공교롭게도 유라 역시 인간 관계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회생활은 잘 할지 몰라도 친구는 오히려 그리드보다 적었다.

그리드의 교우 관계에 조언해줄 만한 인물이 못 된단 의미다.

덕분에 크라우젤에게 더 큰 오해를 품은 그리드의 한숨이 깊어졌다.

연회장 한쪽에서 피아로와 웃고 떠드는 크라우젤의 모습을 훔쳐보면서였다.

둘이 형님동생 하는 모습이 흐뭇한 한편으로 불쾌했다.

혼자서만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마침 뒤따라 나온 지슈카가 그리드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크라우젤이랑 둘이 서로 엄청 훔쳐보네~ 둘이서만 마음이 꽃밭으로 가있는 거 아니야?”

“...크라우젤도 계속 나를 쳐다봤어?”

“응, 방금 전까지 계속.”

질투난다는 듯이 뺨을 부풀리는 지슈카가 귀여웠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진 그리드가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뒤 크라우젤에게 다가갔다.

“지금 당장 대장간으로 가자.”

“그러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크라우젤이었다.

쉬지 않고 달려온 두 사람에겐 고작 하루의 평화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

잠시간의 일상에서 도리어 불안을 느끼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기 바빴다.

그대로 떠나려는 그리드를 다름 아닌 아이린이 가로막았다.

싱긋 웃는 얼굴이었지만 관자놀이가 씰룩이는 것이 그리드를 영 불안하게 만들었다.

“폐하께선 저들을 외롭게 방치하실 생각이신가요?”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에 메르세데스와 바사라가 앉아있었다.

메르세데스는 드레스 차림이 영 낯설고 불편한지 좌불안석이었고, 바사라는 늘 그렇듯 미소 띤 얼굴로 있었지만 혼자 술잔만 기울이는 모습이 썩 즐거워 보이진 않았다.

“특히 바사라 공은 어렵게 시간을 내서 방문해주신 건데요.”

“...”

그리드가 슬그머니 크라우젤을 바라보았다.

크라우젤은 내려놓았던 술잔을 이미 다시 쥔 상태였다.

“무엇보다 가족이 우선이지.”

“검성께선 과연 소문대로 고매하시군요.”

크라우젤은 정답을 말했다.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아이린의 모습이 화사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크라우젤이 그리드에게 어서 가라고 눈짓했다.

입가에 번진 미소는 비웃음과 거리가 멀었다.

조금 더 평화를 즐기라고 조언하는 듯했다.

덩달아 웃어준 그리드가 가족에게 향했다.

도중에 로드를 방패삼고 따라붙은 수애 때문에 기겁하긴 했지만 다음날 아침까지 즐겁고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드의 주변에 피비린내가 아닌 사랑이 가득 번진 날이었다.

언젠간 반드시 일상으로 만들고 싶은, 그런 하루였다.

***

“마리로즈가 도와줬었단 말이지...”

다음날 오전.

바사라를 배웅하고 돌아온 그리드가 크라우젤과 마주보고 앉았다.

두 사람 다 몰골이 초췌했다.

그리드는 너무 많은 사랑을 나눴고 크라우젤은 밤새 가리온에게 시달린 여파였다.

쉽게 말해서 기가 빨렸다.

그리드야 행복했지만 크라우젤은 다소 억울한 면이 있었다.

땅 좀 그만 갈라놓으라니.

쓰라고 있는 스킬을 봉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가리온 탓에 아주 고역을 치렀다.

저 멀리서 힐끗힐끗 노려보는 가리온을 애써 외면한 크라우젤이 주변을 둘러봤다.

템빨계 내부에 있는 대장간.

칸이 있던 시절의 대장간과 구조가 같았다.

칸과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그리드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칸 님은... 천국에 계시나?”

크라우젤은 그리드 다음으로 많은 걸 아는 사람이다.

천사의 생성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고 칸의 거처를 자연스럽게 유추했다.

그리드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맞아.”

“지옥 다음은 천국이 목표겠군.”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모루 위로 구젤의 비늘을 올려놓았다.

새로운 드래곤 웨폰.

크라우젤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무기의 재료였다.

칸의 유작을 강화시켜 줄 재료이기도 했다.

“도와줄 거지?”

“기꺼이.”

그리드는 크라우젤의 등을 보았었고, 크라우젤은 그리드의 등을 보아왔다.

서로의 등을 믿고 맡길 적임자인 셈이다.

따앙, 따앙, 따앙...

의견을 나누며 망치질을 더해갈 때마다 두 사람의 우애도 깊어졌다.

그 과정에서 동시에 같은 물건을 떠올렸다.

백아도.

크라우젤의 인벤토리에 긴 시간 동안 잠들어있던 드래곤 웨폰.

성능 자체는 비록 지질한 하품이라고 하나 그것의 재질은 분명히 번헬리어의 송곳니였다.

그리고 지금의 그리드에겐 고룡의 송곳니를 제련 할 기술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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