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9권 - 7화
그리드 입장에서 네바르탄의 포지션은 굉장히 애매했다.
네펠리나의 부모 아닌가.
광증을 겪을 때는 적대할 수밖에 없지만 맨정신일 때까지 적대하는 건 몹시 큰 거부감을 느꼈다.
물론 네바르탄이 네펠리나를 취급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화라도 나눠보는 게 우선이었다.
인간과 드래곤은 종(種)부터가 달랐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애초에 자식 앞에서 부모를 해칠 만큼 그리드의 정서가 메마르지도 않았다.
그 미묘한 망설임이,
[허락하마. 너희들의 결합을.]
“...!?”
네바르탄의 한 마디로 극대화 됐다.
검무에 표출 됐다.
상승하는 하야테의 검로에 호응하고자 전개 중이던 낙룡극연살파의 검무가 미세하게 어긋났다.
아주 작은 흔들림이었다.
어지간한 초월자도 눈치 채지 못할 수준.
그것을 하야테가 간파했다.
꽈아아아아앙...
네바르탄의 정수리로 떨어지던 용살검의 빛살이 일순 궤도를 바꾸더니 그리드의 검을 후려쳤다.
[<낙룡극연살파(落龍極聯殺派)>의 캐스팅이 취소되었습니다!]
개세적인 위력.
용살검에 깃든 무게가 두 자루 드래곤 웨폰을 짓누르고 검무의 전진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용살(龍殺)의 기운이 <드래곤 나이트>의 이로운 효과들을 대폭 약화시킵니다.]
[용살(龍殺)의 기운이 <구젤의 어금니(刀)>와 <목단룡 크란벨의 뿔>의 위력을 약화시킵니다.]
[용살(龍殺)의 기운이 <화룡 이프리트의 팔>과 <화룡 이프리트의 어깨>, <목단룡 크란벨의 골반>과 <목단룡 크란벨의 머리>의 성능을 저해합니다.]
드래곤과 교감하는 그리드와 정 반대의 길을 걸었던 절대자가 지닌 힘 때문이다.
주르륵...
그리드와 하야테의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용살검의 검로를 갑작스럽게 바꿔버린 하야테도,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검무의 발동에 실패한 그리드도 모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경악하는 그리드에게 하야테가 말했다.
“후회할 짓은 관두시오.”
하야테의 맑고 푸른 눈동자가 그리드와 네펠리나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
둘의 유대가 영원히 이어질 것을 확신하면서였다.
“귀하의 입장을 이해하오.”
“하야테 님...”
그리드가 크게 감격했다.
하야테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늘 이랬다.
자신을 매번 이해하고 배려해주었다.
인류의 유일한 절대자가 이런 사람이기에 지상은 평온할 수 있었으리라.
하야테는 명백한 선(善)이다.
재차 확신하는 그리드에게 하야테가 멋쩍은 반응을 보였다.
“민망하구려. 네바르탄과 굳이 척을 지고 싶지 않은 건 나 또한 같소.”
네바르탄을 적이라고 확실히 규정 짓지 못하는 건 하야테도 마찬가지였다.
광룡이라고 불리기 전.
아직 광증을 겪지 않았던 시절의 네바르탄은 다른 고룡들과 비교해서 훨씬 더 조용한 삶을 살았었다.
광룡이 된 이후에도 인류를 무작정 해치는 일은 드물어서 수많은 목격자를 남겼다.
드래곤과 관련 된 대부분의 문헌이 네바르탄을 기록하는 이유다.
비록 무관심으로부터 비롯한 호의일지언정 좌시할 순 없었다.
[...제법 위험하긴 했겠군.]
용살검과 검무의 충돌이 발생시킨 충격파에 고개가 젖혀졌던 네바르탄이 머리를 똑바로 세우며 말했다.
용살의 기운이 비늘의 결착과 마력의 순환을 훼방 놓고 있음을 느끼면서다.
용살검에 찔려서 약점을 노출한 상태로 그리드의 검무까지 허용했다면 꽤 큰 피해를 입었을 거라고, 네바르탄은 순순히 인정했다.
[좋다. 그쯤은 해야 내 딸과 함께 할 자격이 있겠지.]
네바르탄은 언제 다시 발병할지 모를 광증을 경계했다.
즉시 등을 돌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우주까지 날아갈 기세였다.
순식간에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어진 그에게 그리드가 다급히 외쳤다.
“네바르탄! 나는 당신의 광증을 고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방법? 방법이야 나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그 누가 그녀의 협력을 구할 수 있단 말이지? 헛된 것이다. 그대는 나의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열중하길 바란다.]
네바르탄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미묘하게 부드러워진 말투로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드는 큰 아쉬움을 느끼는 한편 네바르탄의 입장을 이해했다.
광증이 언제 다시 도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화를 나눌 여력이 어디에 있겠나.
시간을 지체했다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지?
다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네바르탄이 끝내 네펠리나에겐 작별의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네펠리나가 서운해 할까 염려했다.
[잘 가요, 아버지.]
“...”
걱정하던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의외로 밝은 네펠리나의 목소리를 듣고 깨달은 것이다.
‘나의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열중하길 바란다.’
네바르탄은 이미 제 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사랑한다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네펠리나에게 확실하게 전달 됐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진 내가 네 아빠다.”
그리드가 네펠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본체가 되고도 동그란 뒤통수가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 목록을 불러왔다.
<마리로즈의 피>
★히든 퀘스트★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의 피를 얻어 광룡 네바르탄에게 수혈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보상:네바르탄의 광증 치료. 네바르탄과의 호감도 상승.
언젠가 미식룡 레이더스를 만족시켜준 대가로 얻은 퀘스트다.
당시만 해도 무슨 수로 마리로즈의 피를 구하라는 건지, 설령 피를 구하더라도 무슨 수로 네바르탄에게 그것을 수혈하라는 건지 막막하게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마리로즈는 여전히 두려웠지만 영 비현실적인 퀘스트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더스는 네바르탄을 돕고 싶었던 걸까?’
엘프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부모인 세계수를 미식(美食) 했던 미치광이.
천 년 동안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던 힐그램 가문을, 단지 맛에 질렸다는 이유로 멸문시키고자 했던 레이더스를 그리드는 썩 좋게 보지 못했었다.
저놈과 악룡이라는 놈이 대체 무슨 차이일까, 그런 생각을 품었을 정도다.
하지만 여러 드래곤을 만나본 끝에 깨달았다.
레이더스는 굉장히 온순한 드래곤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봐도 미묘하게 착한(?) 편에 속하는.
그가 동족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그리드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네펠리나의 중얼거림이 들려 온 까닭이다.
[우, 우리는 결합해야 하는데, 이, 인간의 기준으로는 꽤나 거북하지 않느냐...?]
“뭐가?”
[으, 응? 네, 네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느니라.]
“...? 그래, 아무튼 괜찮다니 다행이야.”
그리드와 네펠리나의 대화는 미묘하게 어긋났다.
결합의 뜻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리드는 딱히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 상황 자체가 마냥 기뻐서 들떴다.
드디어 아버지를 만난 네펠리나가 자칫 실망할까 걱정이었는데 전부 잘 해결되지 않았나.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은 그녀는 앞으로 훨씬 더 훌륭한 드래곤으로 성장해줄 것이었다.
실제로 초월룡이라는 이명을 얻기도 했고.
‘템빨룡이 아닌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앞으론 네펠리나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언제든지 드래곤 나이트 효과를 누리게 된 것이다.
신화 등급으로 전직했을 때와 비견 될 정도로 거대한 기쁨이 그리드를 충만하게 만드는 그때였다.
[초월룡 ‘네펠리나’의 체력이 한계입니다.]
[네펠리나가 더 이상 당신을 태우지 못합니다.]
[네펠리나에게 충분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
네펠리나의 큼지막한 두 눈이 돌연 X자가 되더니 몸이 축 늘어졌다.
덕분에 그녀의 등에서 떨어진 그리드가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실화냐?’
단 1분.
네펠리나가 해츨링의 한계를 초월하고 그리드를 태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60초에 불과했다.
***
“무슨 경차가 연비까지 나빠?”
첫차부터 고급 스포츠 세단을 구매했던 그리드는 경차를 타본 적이 없다. 그래서 편견에 의거해서 투덜거렸다.
“그리드 너는 가끔씩 알아 듣기 힘든 말을 하는구나.”
“미, 미안, 혼잣말이야.”
어색하게 미소 짓는 그리드와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네펠리나.
믿기 힘든 업적을 남긴 듀오 곁으로 결사들과 사도들이 다가왔다.
“수고했다.”
“광룡마저 물러나게 만드셨군요...”
표정들이 하나 같이 묘했다.
감탄하거나 경악하는 수준들을 넘어서 숫제 기이한 걸 본 듯한 반응.
하야테를 처음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그리드가 절대자의 반열에 올랐음을 그들도 눈치 챈 것이다.
“그... 미안하다.”
브라함이 다짜고짜 사과했다.
오만한 표정은 평소와 같았지만 그리드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했다.
어울리지 않게 떳떳하지 못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브라함은 자칫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 뻔했다.
템빨계에서 싸우면 승산이 있을 거라는 그의 판단이 전투를 발생시킨 거니까.
만약 네바르탄이 끝까지 광증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템빨계는 물론이고 라인하르트 전체가 폐허가 됐을 것이다.
죄책감에 짓눌려 서서히 고개를 떨구는 그의 두 손을 그리드가 맞잡아주었다.
“괜찮아요. 당신이 설득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전 싸웠을 겁니다.”
사실 참았을 확률이 높긴 하다...
네펠리나가 가여운 것과 별개로 그리드는 냉정하고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하는 위치였다.
하지만 브라함의 트롤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새삼 지적하기엔 입이 아팠다.
브라함 스스로 반성하고 있었으니 앞으론 조금 더 신중해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여기서 더 말해봤자 잔소리밖에 안 돼.’
게다가 사실 브라함을 책망하는 건 염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드 역시 브라함의 의견이 옳다고 판단했기에 네바르탄과 싸울 각오를 다졌다.
이제 와서 브라함 한 명에게 책임을 전가해봤자 인성에 심각한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꼴밖에 안 됐다.
“그리드!”
“...!”
분위기를 수습한 이후.
템빨계에서 나온 그리드 일행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템빨단원들이 짜놓는 진영에 감탄한 것이다.
아스모펠을 비롯한 적기사 출신들이 이끄는 기사단과 블란드의 농민군, 마안족, 마탑의 마법사들과 울족 등등, 거기에 더해서 수만의 병력이 템빨단을 필두로 도열하고 있었다.
하늘 곳곳에 별빛처럼 수 놓여 있는 파마의 화살들이 프론잘츠를 감탄시켰다.
“하나 같이 비범한 것이 진심으로 드래곤과 싸울 각오였군. 이게 일국이 가질 수 있는 전력인가?”
무력만 놓고 보면 거인국의 전성기마저 초월한다.
그리드와 사도들을 제외해도 말이다.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유라, 지슈카, 페이커, 크리스, 하스터 등등.
템빨국엔 전설만 해도 다수였다.
당장 야탄교가 라인하르트 한복판에 대악마를 소환하는 미친 짓을 벌여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을 수준이었다.
근데 문제는 야탄교조차 대부분 템빨국에 우호적인 상황이다.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바꿔 놨다.
“그리드 님, 일단 논공행상부터...”
광룡 네바르탄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동안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던 라우엘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여전히 손을 덜덜 떤다.
아무래도 오늘 나라가 망할 거라고 생각했던 눈치였다.
“그래, 일단 장소를 옮기자. 연회도 준비하고.”
시스템적 논공행상은 진즉 끝났다.
수라도가 닫힌 시점에 30명의 상위 전공자가 발표됐고 보상이 지급됐다.
난이도 높은 대규모 퀘스트였던지라 참가자 전원이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고생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국고(國庫)가 하는 것이다.
제국은.
즉, 그리드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의욕을 불어넣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세상에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잠시 후.
“자네?”
템빨성 앞 광장.
구경꾼을 포함해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모인 현장에서 비반이 크라우젤을 발견했다.
“자네가 왜 여기에 있나?”
공을 세운 사람들이 착석한 자리를 차지한 크라우젤이 영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비반 공이야 말로 왜 여기에 계시는지...?”
크라우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응수했다.
다른 결사들은 후배에게 무슨 상을 받느냐며 탑으로 돌아간 마당에 비반 혼자서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호오... 내가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했다? 당대 검성이 보기에 전대 검성은 퇴물이다?”
“곡해하시는군요. 성격이 한층 더 괴팍해지신 듯한데...”
차츰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그리드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비반 저 양반 좀 누가 어떻게 해봐.”
아직 밝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수천수만 개의 별들이 라인하르트의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영웅들의 모습을 담기 위한 각국 방송사의 카메라들이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평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