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9권 - 5화
감동적인 부녀 상봉이었다.
부친을 보고 감격하며 우는 네펠리나의 모습이 그리드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잠시나마 광증을 극복해낸 네바르탄의 의지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지옥의 절대자와 천상의 신들이 협력하여 내린 저주.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저주를 딸과 대화하는 시간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극복해낸 것이다.
만인에게 존경 받아 마땅한 어버이의 의지였다.
그렇다.
그리드는 혈육의 정과 사랑을 뚜렷하게 느꼈다.
위태로운 상황을 잠시 잊고 네펠리나 부녀를 기꺼운 마음으로 응원했다.
그래서 애써 못 본 채 했다.
제 딸을 훑는 네바르탄의 두 눈에 서서히 깃드는 욕망을.
애써 듣지 못한 척 했다.
제 알을 품지 못하게 된 딸을 먹이로 삼겠다는 궤변을.
진심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진실 된 애정을 보인 직후가 아닌가.
어느새 다시 광증에 사로잡힌 네바르탄이 제 의지와 달리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네펠리나의 표정을 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바르탄은 아직 광증에 매몰되지 않았다.
본디의 올바른 정신으로 역겨운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그리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물론 겉으로 표출하진 않았다.
드래곤이 인간과 다른 종(種)이라는 점을 상기했다.
인간의 상식과 도덕을 강요해선 안 된단 사실을 알기에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자칫 네바르탄을 자극했다간 수천만 백성과 소중한 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거란 사실을 자각했다.
네펠리나가 겪게 될 수백 년 후의 미래엔 자신이 없을 거라는 부분까지도 고려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고했다는 의미다.
“헛소리 집어치워.”
하지만 끝내 참지 못했다.
네펠리나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너무 슬프고 괴로워 보였으니까.
그리드는 떠올렸다.
네펠리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왔다.
나뿐만 아니라 아이린과 로드 또한 그녀를 가족으로 대한다.
템빨단원들이 그녀의 친구였다.
그녀에게 드래곤의 잣대를 들이대선 안 되는 것이다.
그녀가 겪게 될 고통이 수백 년 후에나 닥쳐올 미래라고?
그때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딴 건 그녀를 외면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나로 인해 인간의 삶을 살아온 그녀를 끝까지 책임 질 의무가 내게는 있다.
게다가.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셈이지? 그나마 승산이 있을 때 도모하지 않고.
브라함이 용살을 종용하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중심부에 자리 잡은 템빨계.
그곳에서 그리드와 사도들은 급격히 강해진다.
지옥에서 무적의 위용을 선보였던 바알과 비교하면 아직 손색이 있을지 몰라도, 현재 이곳엔 결사들도 함께였다.
-결사들을 너의 신도로 삼아라.
그들을 템빨계의 주민으로 만들고 함께 싸운다면 용살도 꿈이 아니다...
재차 설득하는 브라함의 눈빛엔 용살을 향한 열망보다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드를 만나기 전까지.
어머니 베리아체를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경하고 사랑했던 그는 네펠리나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했다.
자신 역시 어머니께 버림받았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가 버림받은 배경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까닭에 추방당했던 것이다.
반면 네펠리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로 희생을 강요받을 뿐이다.
부친을 위해 복수하기를 꿈꿔온 마음이 철저히 짓밟혔다.
비참한 일이다.
브라함은 저 밥만 축내는 해츨링을 처음으로 가엾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오늘 이곳이 소멸할 듯하다.]
그리드의 도발적인 눈빛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이 바라보던 네바르탄이 급기야 선언했다.
제국의 심장부.
그리드가 일궈온 역사와 인연이 가득 모인 이곳을 멸망시키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드가 소리쳤다.
“너는 네펠리나의 기분은 헤아리지 않는 거냐!!”
[자식의 기분을 헤아린다? 불필요한 행위다. 저 아이는 내가 낳았으니 나의 소유물이며 내 뜻대로 다룸이 옳다.]
“자식의 꿈은 무시하고 공부만 시키는 부모랑 뭐가 다른데...!”
한국은 요즘에도 그런 풍토가 남아있나?
일부 플레이어들이 혀를 내두르는 가운데 네바르탄의 금빛 눈이 이내 완전히 새카맣게 물들었다.
초점이 사라져간다.
얼핏 뻥 뚫린 구멍 같았다.
이지 따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완연한 광기로 물든 것이다.
“지금이다.”
브라함이 신호를 보냈다.
사리분별 못하는 놈을 유인하는 건 몹시 쉽다는 뒷말을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덧붙이면서다.
꽈아아아아아앙!!
네바르탄의 거대한 앞발이 그리드를 덮쳤다.
특별한 묘리가 담기진 않았다.
단순히 거슬리는 벌레를 처리하는 동작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간신히 반응한 그리드가 모든 버프 스킬을 두르고 드래곤 웨폰을 교차시켰다.
네바르탄의 앞발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의 등 뒤엔 여전히 무수히 많은 인파가 있었으니까.
템빨단원들과 기사들이 아직 백성들을 전부 대피시키지 못했다.
“아...!”
곳곳에서 탄식이 터졌다.
그리드의 허리가 기이하게 꺾이는 광경을 어렴풋이 목격한 탓이다. 용의 발짓에 검으로 맞서는 순간 뒤통수가 거의 땅에 맞닿았을 지경이었다.
그대로 몸이 뒤로 접혀서 죽는 게 아닐까 싶었다.
바알과 싸울 때도 보여줬던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리드의 위기를 직감했다.
“어...? 어어?”
그리드가 등지고 선 사람들은 달랐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똑똑히 목격했다.
네바르탄의 앞발이 그리드를 짓뭉개지 못하고 서서히 뒤로 밀려나는 광경을.
“...우오오오오!!”
그리드의 기합이 커질수록 네바르탄의 앞발은 지면에서 멀어졌다.
두 자루 드래곤 웨폰이 네바르탄의 앞발에 깃든 힘과 무게를 견뎌내고 밀어내고 있었다.
<패배를 모르는 힘>
즉, 살레오스의 힘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다.
살레오스의 힘으로는 3위 이상의 대악마와 신들, 그리고 드래곤을 이기지 못한다. 비기는 게 최대였다.
현재 그리드를 지탱하는 힘은 20번째 서사시를 쓰고 얻은 보상이었다.
[신께선 꺾이지 않음을 증명하셨다.]
그리드는 바알이 휘두르는 마검의 위력을 견디지 못했었다.
바알과 검격을 나눌 때마다 양팔이 휘거나 허리가 뒤로 크게 젖혀지면서 신음했었다.
바알의 마검은 급기야 그리드를 검과 갑옷째로 짓뭉갰고 그리드는 한 줄기 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리드가 꺾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끝내 꺾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틴 끝에 바알에게 패배하지 않았다.
만인이 목격한 그때의 서사가 지금의 그리드를 지탱하는 것이다.
그리드는 꺾이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힘에 맞설지언정 그것에 짓눌리지 않았다.
그런 법칙이 세워졌다.
서사시의 한 구절이 만든 법칙이다.
꽈아아앙!!
급기야 네바르탄의 앞발을 완전히 떨쳐낸 그리드가 그대로 도약했다.
템빨계를 향해 나아갔다.
크롸라라라라라!!
네바르탄이 브레스를 쏘면서 추격했다.
브레스의 충격 파동이 도시의 건물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다행히 건물들은 텅텅 비어있었다.
죄다 영웅들을 환영하기 위해 광장에 모인 상태였으니까.
무너진 건물들은 가리온이 즉시즉시 수복했다.
파앗!
그리드는 순보를 썼다.
즉시 템빨계 안으로 돌입했다.
그와 동시에 브레스가 그를 덮쳤다.
브레스의 속도가 순보의 속도를 따라잡은 것이다.
꾸와아아아아아앙!!
“그리드!!”
“폐하!!”
브레스에 휩쓸리는 그리드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드가 잿더미가 되는 광경을 상상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브레스가 관통하고 지나간 자리에 선 그리드는 멀쩡했다.
검붉은 피만 몇 바가지 쏟아낼 뿐, 신체의 어떤 부위가 결손 되는 등의 치명상은 면했다.
크란벨의 브레스에 스친 여파로 팔을 잃었을 때와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리드는 드래곤 아머를 무장하고 있었다.
20번째 서사시를 쓰고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뿐더러 네바르탄은 용언을 쓰지 않았다.
크란벨의 브레스가 그리드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배경엔 용언의 힘이 있었다.
당시 용언에 커다란 압박을 받았던 그리드는 모든 능력치가 절반 가까이 떨어진 상태였다.
반면 지옥에서 번헬리어의 브레스를 맞았을 때나 지금 이 순간은 용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일체의 약화 효과 없이 브레스를 감당했기에 버텨냈다.
‘본능대로 움직이는 놈이 용언을 쓸 리가 없지.’
광룡.
네바르탄은 미쳤다.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
지체 않고 그리드를 뒤따라온 모습이 증명하고 있다.
놈은, 스스로 템빨계에 투신했다.
지상에 떨어져 수모를 겪었던 무신 제라툴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신세로 전락했다.
“영락없는 도마뱀이군.”
먼저 템빨계에 도착해 있던 브라함이 준비해뒀던 마법을 펼쳤다.
자색의 마력으로 펼치는 마법이다.
마법에 당연하게 저항하는 존재들을 겨냥한 심상이 깃든 마력.
그것이 빚어낸 빛의 창은 몹시 거대하고 날카로워서 네바르탄의 거체를 대각선으로 관통했다.
피를 토하며 잠시 경직 된 네바르탄의 머리 위로 운석이 떨어지기도 했다.
온갖 대마법이 시간 차 없이 연계됐다.
20번째 서사시의 제목은 ‘지옥’이다.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지옥에서 활약했던 사도들의 서사 또한 서사시에 기록됐다.
20번째 서사시는 그리드뿐만 아니라 그의 사도들까지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그리드의 서사시에 포함되고 온전한 실력을 되찾은 하야테의 경우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디코이.”
연속적으로 마법을 얻어맞고 흥분한 네바르탄의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브라함의 마력이 만든 분신들에 현혹되어 그것들을 향해 브레스를 쏴댔다.
브레스의 기세가 종전과 달리 약했다.
제아무리 고룡이라도 얼마 전 탄생한 새로운 신계의 환경에는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브라함의 마법은 템빨계 밖에서 쓸 때보다 훨씬 더 완전했다.
그의 마력이 빚은 분신들은 브라함이나 그리드와 똑같은 기척을 지녔다.
정신 나간 도마뱀을 낚기엔 충분했다.
“그, 그리드...!”
허겁지겁 템빨계로 뒤쫓아 온 네펠리나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드의 이름을 외치는 음성에 어떤 확신이 없었다.
굳이 나를 위해서 아버지와 싸우는 게 옳은 거냐.
자칫 나 때문에 모두가 위험에 빠지는 거 아니냐...
그녀의 떨리는 음성엔 의문과 불안, 혼란과 슬픔만이 가득했다.
“괜찮아.”
그리드가 미소 띤 얼굴로 답했다.
템빨계 전역에 번졌던 노을빛 신성이 그의 검 끝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템빨계 내에서 템빨신과 그를 섬기는 하위 신들은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제거됩니다.
-템빨신이 허락하지 않은 대상이 템빨계에 진입할 경우 격이 대폭 약화되고 모든 능력치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신계의 차원 효과다.
아스가르드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암시이기도 해서 마음이 썩 편치만은 않았지만, 아무튼 이곳에서 그리드는 가히 무적에 가깝다.
“위룡극파살연(爲龍極派殺聯).”
정면으로 관통하고,
“낙룡극연살파(落龍極聯殺派).”
아래로 내려찍으며 꿰뚫고,
“초연룡극살파(超聯龍極殺派).”
새로운 검무를 만들어 위로 올려친다.
서사시 보상으로 얻은 신위 덕분에 가능했다.
“위룡극파살연.”
다시 꿰뚫고,
“낙룡극연살파.”
다시 짓누르고,
“초연룡극살파.”
다시 올려친다.
무한히 반복할 순 없었다.
회복 속도가 워낙 빠른 까닭에 평상시엔 거의 무한에 가깝게 다뤘던 검기가 순식간에 고갈됐다.
6융합 검무의 연속이란 그만큼 부담이 컸다.
크롸라라라라라라!!
비늘이 처참히 깨어지고 사지가 잘려나가고도 기세를 잃지 않은 네바르탄의 거대한 주둥이가 그리드를 코앞에 둔 채 브레스를 쏘았다.
검기의 고갈 여파로 반응이 느려진 그리드였지만 안색 하나 바뀌지 않는다.
꽈아아아앙!!
그의 발밑에서 솟구쳐 올라온 용살검이 브레스를 막아냈으니까.
“템빨신교에는 진즉에 가입했다오.”
그리드를 등지고 서며 슬며시 웃는 하야테의 좌우로 결사들과 사도들이 도열했다.
20번째 서사시의 주역들.
그들은 템빨계의 주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