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9권 - 3화
“평범하더군.”
지옥에서 활동 중이던 사람들은 온갖 제약을 떠안고 있었다.
탈출 불가, 이동 스킬 사용 불가, 원거리 소통 불가 등등.
심지어 결사들은 능력치가 대폭 하락하는 디버프까지 겪었다.
갑작스럽게 지옥에 투입 된 그들은 헬가오를 레이드 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사실상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지옥이라는 곳은 별 거 없었다. 초월자와 용들이 활개 치는 지상과 비교해서 도리어 시시하던데.”
비반이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수라도가 닫히고 영웅들이 하나둘씩 귀환할 무렵이었다.
안도하고 환희하고 감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반 혼자만 무심하게 떠들었다.
제시카가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저, 저...”
반용족 왕 번츠델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나 잿더미를 뒤집어 쓴 다른 모두와 달리 멀끔한 모습으로 지껄이는 비반의 태도가 영 불쾌했던 것이다.
지옥 원정대는 크던 적던 활약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활약이 적었을지언정 비난해선 안 됐다.
비록 작은 활약일지언정 반드시 도움이 됐던 게 사실이며 모두 똑같이 목숨을 걸고 고생했으니까.
지옥에서 그들과 함께해온 번츠델이 잘 안다.
악룡 번헬리어의 혈통인 반용족.
번츠델은 그들의 왕답게 결코 선하지 않았고 인간을 하위종으로 인식했지만 지옥 원정대만큼은 존중하는 것이다.
그들의 고생을 부정하는 듯이 지껄이는 비반의 헛소리를 허투루 넘기지 못했다.
“늙으면 종종 망령을 부리는 인간이 있다더니 네놈이 딱 그런 경우구나. 염치도 없이 나이만 처먹은 네놈의 인생도 참으로 가엾다.”
“뭐라?”
다짜고짜 폭언을 들은 비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비반도 비반 나름대로 억울했다.
오로지 인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지옥에 투신했건만 악마는커녕 마물조차 한 마리 제대로 만나지 못한 탓이다.
그가 겪은 지옥이란 의외로 고요하고 평온한 세계였다.
제대로 훼방을 놓았던 제6위 대악마 발레포르를 처치한 이후.
지옥 어디로 향하든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가 없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지옥의 악마들과 마물들에게 검성이란 몇 안 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물며 비반은 뮐러의 스승이 아닌가.
그가 발레포르를 토벌했단 소문을 접한 악마들은 그를 의도적으로 피해 다녔다.
마주치는 즉시 죽을 거라는 생각으로 도망쳤다.
비반이 악마들을 만나지 못하고 헤매게 된 이유다.
한 번의 위기를 넘긴 이후부터 쭉 평온을 맛본 그는 지옥에 대해서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물이었다면 상황을 의심이라도 했을 테지만 비반의 오성엔 다소 하자가 있었다.
“이제 보니 반용족이군. 내가 네 시조하고 겸상하는 위계인데 네가 사람을 못 알아보고 주제넘게 구는 구나. 시조를 닮아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로군.”
“우리의 시조가 누구신진 알고 그딴 망발을 지껄이느냐? 무려 악룡 번헬리어 님이시다. 감히 그분을 모욕하지 마라. 그분은 사악하실 뿐이지 네놈처럼 미치진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
사람들이 무사 귀환한 지옥 원정대를 열렬히 환영하고 환호하는 가운데 두 명의 절대자가 분위기를 냉각시켰다.
그렇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비반이며 번츠델이며 절대자였다.
무심한 손짓 한 번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들.
그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싸움을 벌이게 생겼으니 여러 사람들이 난감해졌다.
“감히 청컨대 검성 님을 좀 진정시켜주실 순 없으신지...”
라우엘이 마침 가까이 있는 결사에게 공손히 부탁했다.
하필 6좌였다.
결사 중에서도 호전성이 으뜸인 무투가 켄 말이다.
“굳이? 번헬리어의 피를 이은 놈들은 어차피 다 죽어 마땅한데.”
“꼭 그렇지만은...”
“응? 자네 손목에 그거 뭐야? 어째서 용의 흔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거지?”
“아, 이건 흑염룡이라고 제 영혼 속에 봉인 된...”
“심문을 할 필요가 있겠어.”
“잠깐. 잠시만요. 농담입니다.”
영웅들의 귀환에 열렬히 환호하는 사람들, 당장 싸울 기세인 비반과 번츠델, 어째선지 겁에 질린 네펠리나와 기겁하는 라우엘, 황당하게도 대악마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탑의 결사 쥬르네, 베티가 데려온 수십 마리의 멤피스 등등.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도무지 진정되질 않고 소란만 커져갔으니 수라도가 열려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때였다.
쿠오오오오오...
라인하르트 상공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새카만 용의 그림자였다.
“우와아아아아아!!”
드디어 주인공의 귀환이었다.
지상에서 그리드와 번헬리어의 활약을 지켜봤던 백성들이 목청껏 환호하며 그들을 환영해주었다. 광신도들의 집회를 연상시킬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과 애정이 쏟아졌다.
원정대원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원거리 소통 불가 페널티를 겪었던 그들은 그리드의 서사시를 접하지 못했었으니까.
서사시의 주인공이었던 그리드와 입장이 달랐다.
“번헬리어...!”
프론잘츠를 제외한 결사들이 질색하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어째선지 쥬르네의 곁을 지키고 섰던 대악마들도 쥬르네의 의지에 호응해서 싸울 채비를 갖췄다. 영 떨떠름한 표정들이었지만 거부하진 못했다.
“진정해라.”
하야테를 제외한 결사 중에서 가장 높은 격을 지닌 프론잘츠.
신의 원 덕분에 바알이 세운 법칙을 일부 부정하고 그리드의 서사시를 접했던 그가 결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쉽게 진정 될 리가 없다.
무려 고룡의 등장이었다.
심지어 네바르탄 다음으로 위협적이라고 평가 받는 악룡 번헬리어의 등장.
번헬리어의 포악성은 결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미식룡처럼 소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염룡처럼 체면을 중시하는 것도 아닌 놈은 광룡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
“조상께서...! 우리들의 시조께서 무지몽매한 자를 벌하고자 나타나셨다!!”
번츠델은 전율하고 있었다.
반용족 역사상 그 누가 시조와 마주했던가.
번츠델이 알기론 자신들이 최초였다.
별 미친놈이 반용족을 모욕한 순간 등장하신 시조의 모습에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잠시뿐이었다.
‘자칫 인간들을 해하시면 안 되는데?’
잠시 후 라인하르트가 불바다가 되고 템빨제국이 역사에서 소멸할 거란 사실을 떠올린 번츠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자신이 기껏 지켜낸 사람들이 죽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템빨신의 분노를 사는 것도 두려웠다.
번츠델의 혼란이 커지는 가운데.
챙! 채채채채채채채채챙!!
재상 라우엘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싶더니 수백 명의 기사가 일제히 검례를 올렸다.
도시를 가득 채운 백성들과 병사들은 거의 오열하며 절을 했다.
거의 템빨신이라도 영접한 기세.
그럴 만도 했다.
위대하신 드래곤을 목도했으니까.
번츠델은 인간들의 반응에 뿌듯해하는 한편 염려했다.
‘부디 이들을 좋게 봐주셔야...?’
기도하는 심정으로 함께 고개를 조아리던 번츠델의 사고가 멈췄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결사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있었다.
번츠델도, 결사들도 보고야 만 것이다.
점차로 가까워져 오는 번헬리어의 목덜미에 올라탄 인물을.
그리드였다.
“...”
여러 가지 의미에서 놀란 번츠델이 그대로 혼절했다.
다급히 달려온 반용족들이 그를 감싸고 부축했지만 한 발 늦었다.
천하의 반용족 왕이 게거품을 흘리는 추태를 만인이 목격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신경 쓰는 사람은 적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광신광룡에 쏠려 있었으니까.
고작(?) 반용족 왕이 추태를 부렸다고 해서 관심이 분산 될 리 만무했다.
“이젠 하다하다 고룡을 타다니...”
“그것도 번헬리어를 말이지.”
상황을 파악한 결사들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하야테를 바라볼 때와 닮아 있었다.
무한한 존경이 담긴 눈빛이었다.
사람이 누군가를 존경함에 있어서 연령 따윈 중요한 개념이 아닌 것이다.
몹시 훈훈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와중이었다.
“배, 배신자!!”
작은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쥔 네펠리나가 소리쳤다.
목소리에 원망이 담겼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에게 번헬리어는 부친에게 광증을 안긴 원수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번헬리어를 죽이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한데 하나밖에 없는 동료라고 믿어온 그리드가 번헬리어의 목덜미에 올라탄 채 돌아온 것이다.
무지막지한 서운함과 배신감이 몰려왔다...
정신이 얼마나 아찔했으면 시야가 뿌옇게 변했을 지경이다.
“...”
사람들이 네펠리나를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려 해츨링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댔으니 충격이 컸다.
크고 동그란 눈동자가 눈물로 일렁이는 광경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탄식하는 사람이 많았다.
네펠리나의 겉모습은 여전히 작고 귀여운 소녀였으니까.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녀를 가엾게 여겼다.
“네펠리나, 오해야.”
번헬리어의 목덜미에서 뛰어내린 그리드가 네펠리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달래주었다.
“내가 번헬리어와 손을 잡은 건 맞지만 친구가 된 건 아니라고. 나중에 꼭 같이 죽이자. 응?”
“끅...! 으아아앙!!”
안도한 걸까.
급기야 체통을 잃고 오열하기 시작한 네펠리나가 그리드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영락없는 부녀 관계였다.
종족을 초월한 우정에 사람들이 감동하는 반면 번헬리어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역시 여기서 죄다 죽여 놔야...]
안 그래도 인류를 전멸시킬 필요성을 느꼈던 번헬리어다.
한데 면전에서 다짜고짜 살해 예고까지 받았다.
결사들의 존재 역시 거슬렸다.
애초에 그리드와의 협력 관계는 일시적이었던 바.
이참에 모조리 죽여 놓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
화기애애한 인간들 틈에서 홀로 살의를 피어 올리던 번헬리어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네펠리나의 심장에 담긴, 아직은 미약한 마력의 형태를 읽은 까닭이다.
[네놈, 네바르탄의 여식...?]
깨달음과 동시였다.
날개를 활짝 펼친 번헬리어가 다급히 날아올랐다.
번쩍!
마침 저 멀리서 나타난 빛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일부 초월자들은 빛이 발생시킨 파장을 눈치 챘다.
지옥 달이 사라지고 푸름을 되찾은 맑은 하늘을 거듭 출렁이게 만드는 충격파가 가까워짐을 느꼈다.
“브레스...!”
결사들은 드래곤과 싸운 경험이 많다.
하여 브레스의 기척을 느낀 즉시 산개했다.
하지만 도중에 행동을 바꿨다.
현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면면을 떠올린 까닭이다.
이를 악 문 그들이 도리어 브레스를 향해서 뛰어들었다.
꽈앙!
쿠과과과과과과광!!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이 라인하르트 전역에서 펼쳐졌다.
결사들이 브레스를 막기 위해 전개한 마법들, 그리고 사도들과 템빨단원들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펼친 마법들이었다.
[광룡 네바르탄이 출현하였습니다!]
최악의 상황.
결사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지옥에서 지금 막 돌아온 터라 대부분 크게 지친 상황에서 감당하기 힘든 대적이 출현했으니 긴장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드의 긴장감이 가장 컸다.
전력이 가장 많이 소모 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드였으니까.
혼란 속에서.
“아버님!!”
네펠리나가 절규하듯 외쳤다.
번헬리어보다 머리 하나는 거대한 거룡의 몸체가 우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