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9권 - 2화
싸움에도 손맛이라는 게 있다.
대부분 ‘이번 공격은 제대로 먹혔다.’ 따위의 감상을 동반하며 느껴지는 감각이다.
키보드나 마우스 등을 이용하는 고전 게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상대방의 스펙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도 대상이 곧 쓰러질 거란 사실을 직감하곤 하는데, 이와 같은 감각들은 대부분 쌓아올린 경험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의 기반은 몹시 탄탄했다.
무수히 많은 강적들과 싸워왔으니까.
타인이 그를 평가함에 있어서 세월이 무색하게 만든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
별 거 없다.
단기간 내에 많은 경험을 쌓아 올린 덕분이다.
그리드의 1년은 누군가의 10년, 혹은 100년보다 값졌다.
끈기를 무기로 삼는 자의 최대 강점이다.
신이 된 이후에도 자신보다 강한 적들을 수두룩하게 만나온 그리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탈감에 빠지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 포기를 모른 채 저항해왔고 그 모든 게 경험이 되었다.
‘부족해.’
그러므로 직감한다.
바알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면서도 바알이 죽지 않을 거란 사실을 눈치 챘다.
단숨에 고갈 된 바알의 생명력 게이지가 오히려 그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 됐다.’
물론 현재 그리드는 풀 버프 상태다.
방금 전 녹은 ‘사탕’을 제외하고 가능한 모든 강화 효과를 덕지덕지 중첩시켜놓고 있었다.
증폭공 등의 액티브 스킬을 포함해 레이단 연금술 시설에서 제조한 강화 물약들까지.
심지어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 덕분에 격이 크게 오른 상태였다.
크란벨의 뿔이 4개의 <상징>을 모조리 활성화시키고 있단 의미다.
현재 바알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고 있는 위룡극파살연은 역대 최강의 검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어쩌면 전무후무 최강의 검무일 확률이 높았다.
고룡에 탑승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하지만...
단 한 방으로 바알을 죽음으로 인도할 정도일까?
그리드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바알이 이 세계에 불필요한 존재라고 단언하되 힘마저 부정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대상에게 33,333,333,333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침 입힌 피해량의 총합이 알림창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올 수 없는 수치를 토대로 바알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떠올린 까닭이다.
기만.
바알은 자신을 창조한 신조차 배신한 존재다.
같은 날 태어난 형제 베리아체와 자신을 맹신하는 최측근들을 기만해온 놈의 입장에서 타인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눈치 챘나. 기왕이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수천수만 개로 찢겨나간 바알의 살점들이 ‘입’을 달고 지껄인다.
피식피식 흘리는 비웃음이 지독한 음률을 이뤘다.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부분의 버프 효과가 끝났거나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메시지들이 그의 시야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드의 상태를 파악한 번헬리어가 날갯짓을 멈췄다.
바알로부터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의태였던 거냐?”
바알이 지옥에 새로운 법칙을 세우기 전까지.
집요할 정도로 유라에게 집착하며 의태를 보냈다는 아모락트의 경우를 떠올린 그리드가 질문하자 바알의 비웃음이 커졌다.
“나는 죽음을 체험해 보고 싶다는 바람을 이미 고백했다만.”
그런 내가 죽음이 두렵다고 의태 따위를 앞세우겠나.
피식거리며 지껄이는 바알의 살점들이 한 점으로 빠르게 모였다.
그리고 다시 형상을 갖췄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게 부활한 바알의 모습이 번헬리어를 침음하게 만들었다.
뿔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정돈시킨 바알이 어깨를 으쓱였다.
“실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조금 전, 너는 분명히 나를 죽였으니까. 다만 큰 의미가 없을 뿐이야.”
[저놈이랑 대화하지 마라.]
번헬리어가 바알의 말을 다급히 끊었다.
안 그래도 절망하고 있을 그리드가 큰 동요를 일으킬까 염려한 것이다.
번헬리어는 그리드를 운명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잘못 되면 자신 역시 잘못 될 거란 사실을 이해하고 있단 말이다...
안 그래도 네바르탄에게 중상을 입은 그는 바알에게 상성에서 밀린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지옥 전체가 자신을 거부하는 듯한 압박감을 견디는 것만으로 벅찼다.
적어도 상처가 완전히 회복 될 때까지 그리드가 시간을 벌어주길 바랐다.
“사람들이 너를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인식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나?”
정작 그리드는 태연했다.
좌절하기는커녕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질 않았다.
바알을 난도질하고 있을 때부터 지금의 전개를 예측했으니까.
번헬리어가 그런 모습을 기이하게 여기는 반면 바알은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다.
“바로 그거다.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는 이상 나는 죽지 않아.”
바알은 온갖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해왔다.
그리드도 몇 번이나 마주쳤다.
그건 진짜 바알이 아닌 바알의 의식 파편.
즉,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인간에겐 커다란 공포로 다가왔다는 점이 문제였다.
인간들의 공포가 바알을 구성하는 편린으로 거듭났다.
그게 또 증식의 이능과 맞물려버렸다.
사람들이 저마다 바알의 모습을 다르게 인식하는 원인이었고 바알은 하나이되 여럿이 되고 말았다.
[역시 인류는 멸망해야 옳다.]
바알의 실체를 단숨에 이해한 번헬리어가 중얼거렸다.
괜한 헛소리가 아니라 굉장히 진지했다.
안 그래도 자신의 태도를 멋대로 해석한 인류에게 살심을 품었던지라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알이랑 같이 죽어주지 않으려나.’
번헬리어를 게슴츠레 노려보는 그리드의 표정이 점차로 차분해지고 있었다.
바알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연기가 아니군.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어. 의외로 포기가 빠른 성격인가?”
좌측으로, 우측으로 느린 회전을 반복하던 바알의 눈동자들이 어느새 멈춰 있었다.
미세하게 확장 된 채 그의 기분을 대변해주는 중이다.
흥분하고 있다.
절대자도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란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즐거운 것이었다.
그리드가 검을 고쳐 쥐었다.
[<템빨신의 분노>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증폭공>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벨리알의 힘>의 지속 시간이...]
[<베리드의 힘>의...]
...
..
실시간으로 약해지는 걸 느끼면서다.
당연히 바알도 느꼈다.
절대자란 달리 말해서 최상위 포식자다.
특히 바알의 경우, 자신 외의 존재를 손쉽게 사냥감으로 인식했다.
사냥꾼은 사냥감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아니군. 자포자기하는 거였어.”
꿈도 희망도 잃은 것인가.
훌륭한 장난감이 되어줄 거라고 기대했건만, 결국 다른 놈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되지 않았나.
“진정으로 아쉽다.”
어중간한 힘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아직 놈에게 나를 죽일 힘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나의 무한한 힘을 실감하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희망을 간직한 채 발버둥 쳤을 터인데.
“재밌는 볼거리를 놓쳤...”
바알이 문득 입을 닫았다.
그리드가 두른 신성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저것이 언제부터 이토록 눈부셨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지 않았었나?
나와 번헬리어의 마기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고작이었...
[종국에 신께서 악마들의 왕을 벌하셨나니.]
“너의 근원 중 하나가 인간들의 공포라면.”
“무슨...”
한 걸음, 두 걸음.
바알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또 다시 무구의 비가 쏟아져서?
아니, 지옥의 하늘은 고요했다.
별 하나 없어 새카만 하늘에 붉은 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바알이 뒷걸음 친 이유는 단순히 심리적인 압박감 때문이었다.
“공포 따위, 지우면 그만이야.”
[악마들의 왕이 벌벌 떨며 신을 멀리했다.]
“...사기다. 이건 명백한 왜곡이야.”
바알은 단지 한 번 육신을 잃었다.
금방 다시 수복했고 명백히 템빨신을 압박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기 직전이었다.
한데 두 눈 뜨고 상황을 목격했을 지상의 인간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시켜버렸다.
템빨신이 고작 한 번 나를 죽였단 이유로 템빨신을 숭배하였다.
내게 품었던 두려움을 상당량 떨쳐냈다.
이건... 이건 명백히 잘못 됐다.
세상 전체가 합심해서 내게 사기를 치는 격이다.
황당해하는 바알의 귓전에 번헬리어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확실히. 인간들의 눈에는 그리 비췄을 만도 하다. 그리드는 용중용인 나, 위대하신 고룡 번헬리어의 목덜미에 올라탄 채 네놈을 베어낸 것이다. 그 시점부터 이미 결과 따윈 중요한 게 아니겠지.]
인간들의 눈에 비치는 그리드는 하염없이 거룩했을 터이다.
설령 끝내 바알에게 패배했을지라도 찬란한 미래를 그렸으리라.
한데 심지어 바알은 그리드를 바로 죽이지도 않았다.
죽이기는커녕 두 손 놓고 서서 지껄이다가 인간들이 결과마저 멋대로 해석하게 만들었다.
여파는 컸다.
바알의 격이 실시간으로 훼손됐다.
무한대에 이르렀을 목숨 또한 크게 떨어졌을 테지.
[죽고 싶다더니 제 발로 명줄을 줄였군 그래?]
“병신 용이.”
바알이 급기야 정색했다.
평소 품어온 과격한 생각을 당사자 앞에서 입 밖에 꺼낼 정도로 동요했다.
이 순간 바알은 평소와 달랐다.
흘러가는 상황을 즐기지 못하고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죽음이 새삼 두려워져서가 아니라 너무 황당해서였다.
솔직히 당황했다.
...실수다.
번헬리어 저놈처럼 나를 입만 산 놈으로 오해하는 놈들이 생길 게 뻔했으니까.
상상해본 적 없는 수치심이 바알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쿠와아아앙!!
바알의 마검이 휘몰아쳤다.
표현 그대로다.
검신이 요란하게 회전해대며 영역을 점차 확장했다.
바알은 폭풍을 거머쥐고 있었다.
검은 서리가 나부끼는 폭풍이었다.
“꺼져라.”
바알은 지옥의 왕이다.
그리드가 템빨계에서 더욱 강해지듯 바알의 마기와 심상 또한 지옥에서 더욱 단단하게 단련됐다. 완전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했다.
쩌저저저저저저정!!
바알이 서리 폭풍을 크게 휘두르자 번헬리어를 제외한 모든 침입자가 꽁꽁 얼어붙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바알의 심상이 얼린 대상은 바알 외의 존재가 간섭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지옥 각지에서 활동 중인 결사들과 사도들, 템빨단원들과 플레이어들 전원 당장에 목숨을 잃는 불상사를 면했다.
앞서 얼었던 그리드와 달리 생명력을 잃지도 않았다.
제아무리 바알의 심상이라도 수백수천 킬로미터 바깥에 있는 대상을 죽이진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태초신들조차 언급하길 꺼려하는 ‘전지전능’을 자처했으리라. 천상의 머저리들처럼.
“이번만큼은 내 실수를 인정하지.”
“...!”
지상에서 하늘을 올려보던 사람들도, 외부에서 언론을 통해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등골이 오싹해지고 말았다.
바알의 시선이 ‘나’를 보는 듯했으니까.
쿠와아아아아앙!!
바알이 재차 휘두른 폭풍이 꽁꽁 얼어붙은 침입자들의 몸을 날려버렸다.
지옥에서 추방시키는 손짓이었다.
침입자를 지옥에 억류시키는 권한이 있는 마당에 추방시키는 권한이 없겠는가.
[크윽...!]
휘리릭!
번헬리어가 다급히 뻗은 꼬리가 그리드를 가둬두고 있는 얼음 덩어리를 휘감았다.
자신 역시 추방당하기 위함이다.
이대로 혼자 남았다간 어떤 험한 꼴을 당하게 될지 뻔했으니까.
[바알! 다음에 만날 때는 다를 것이다!!]
그건 네가 지껄일 말이 아니라는 듯이, 바알은 번헬리어가 아닌 그리드를 바라보았다.
얼음 속에 갇힌 그리드의 두 눈이 바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사냥감을 노릴 때의 맹금의 눈처럼 날카롭고 사나운 눈으로.
[<수라도(修羅道)>가 닫힙니다.]
인계의 하늘에 영사되던 지옥달이 무량대수의 눈을 감았다.
지옥의 풍경들이 흩어져 사라져갔다.
로드와 함께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던 아이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영웅들이 하나둘씩 돌아온다 싶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라인하르트를 까맣게 물들인 까닭이다.
드래곤의 그림자였다.
목덜미에 그리드를 태우고 돌아온 드래곤.
여러 사람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옥에서 활동하느라 그리드의 소식을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반용족왕 번츠델이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