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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83화 (79권) (1,581/1,794)

템빨 79권 - 1화

하야테의 용살검은 검기를 결집시켜서 빚는 무기다.

바알의 마검도 비슷했다.

바알의 마력은 마법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물질을 실재시키는 매개였다.

심상이 얼개를 이루는 기운의 유형화.

절대자의 상징과도 같은 기술이다.

검을 빚는 마당에 갑옷이라고 빚지 못하겠는가.

바알이 낙룡극연살파를 맞받아치는 동안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른 흑광은 실시간으로 그의 몸을 감쌌던 갑옷이 파괴 된 흔적이기도 했다.

무적의 호신강기를 심상으로 그려 만든 갑옷.

지옥 절대자의 심상이었다.

한데 뚫렸다.

처참하게 찢겨나갔다.

“...”

바알의 본신은 의식의 파편 따위완 무게감이 달랐다.

입으로 피를 토하는 추태를 보이지 않았다.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소리 없이 삼키면서 지면에 처박힌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전후좌우 사방으로 펼쳐진 넓은 시야로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확인하면서다. 지옥 전역으로 뻗쳐놓은 감각도로 재차 살피건대 이 떨림은 거짓이 아닌 진짜였다.

내 심장을 직접 보는 것도 오랜만이로군.

초고속 재생의 권능으로 빠르게 회복되어가는 가슴의 상처를 빤히 응시하던 바알이 이내 미소 지었다.

“드디어.”

바알은 지옥강의 업화보다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오랜 세월 열망해온 긴장감이 비로소 도래하였기에.

“제대로 된 장난감을 구했군.”

바알은 누구보다도 많은 죽음을 목격해왔다.

죽어 지옥에 떨어진 모든 존재가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모순되게도 자신은 죽음을 꿈꾸게 되었다.

저토록 하찮은 존재들조차 죽음으로써 삶이 소중했음을 깨닫지 않나.

자연히 죽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해소할 수 없는 호기심이란 대개 뒤틀린 열망으로 변질되는 법이다.

바알은 죽고 싶어졌다.

죽을 수 없다면 죽음에 가까운 위기라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다.

예를 들어 베리아체와 대적했을 때처럼.

살아있음을 실감하기 위해서.

[시시한 개소리군.]

바알이 읊조리는 사연을 듣던 번헬리어가 귀가 썩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드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바알에게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을 거라는 기대 따위, 그에겐 처음부터 없었다.

바알은 순수한 악이니까.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닌 입체적인 인물들과 경우가 달랐다.

저건 그냥 쓰레기다.

반드시 소거해야 한다.

바알의 죽음이 Satisfy의 엔딩을 가속시킬 거라고?

엔딩...

엔딩이 어디에 있는데?

당신이 살아가는 세상에도 엔딩이 존재하나?

“...세계야.”

“?”

“너 따윈 없어도 되는 세계라고!!”

꽈아아앙!!

고함을 내지른 그리드가 재차 검무를 전개했다.

단일 검무부터 5융합 검무에 이르기까지 거의 난사를 해댔다.

광증의 영향을 받아 ‘피아 식별 불능’이라는 디버프를 얻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회(回)의 사용은 의식적으로 피했다.

[이놈 진짜 뭐냐!!]

번헬리어가 기겁하며 몸부림쳤다.

그리드의 칼이 자신의 미간에 꽂혀댔으니까.

그렇다.

그리드는 바알과 번헬리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드래곤 나이트 효과를 누리고 있단 사실조차 망각한 채, 자신이 딛고 선 존재 또한 적이라고 착각했다.

광증의 영향이다.

그리드는 두 명의 바알과 얽히고설킨 입장에 놓였다.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 일단 마구잡이로 공격하고 보았다.

그것이 광증 때문인지, 바알의 수작질인지 그리드 입장에선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신성으로 마기를 구현하는 미친 짓을 벌였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마신으로 변질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국이야.”

고룡의 힘과 특성을 재현하는 검무라.

강력하지만 부작용이 너무 크군.

쯧, 혀를 찬 바알이 손가락을 퉁겼다.

기다란 손톱과 손톱이 서로 스치며 눈서리 같은 파편을 나부꼈다.

냉기가 일대를 가득 채웠다.

뼈를 시리게 만드는 추위가 부지불식간에 몰려왔다.

뜨거운 불의 강물이 흐르는 지옥에선 체험하기 힘든 기온이었다.

지옥의 주인이 지옥의 생태계를 부정하고 있었다.

“아직은 이르다. 조금 더 발전해서 와라.”

쩌저정!!

전설 중에서도 검성 뮐러가 유독 높이 평가 받는 이유는 그의 검술이 절세의 경지에 도달해서가 아니다.

기술의 완성이라는 것은 소위 장인이라 불리는 평범한 인간들도 해낼 수 있는 거니까.

지옥이 뮐러에게 잃은 가장 큰 것은 고작 9위의 대악마 헬가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뮐러를 잊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순전히 ‘심검’에 있었다.

심즉살(心卽殺).

마음을 먹는 즉시 대상을 베는 경지.

즉, 뮐러는 심상을 완성시켰던 존재다.

바알이나 하야테 같은 절대자들처럼.

“...!!”

새카만 얼음이 그리드를 가뒀다.

그리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어버렸다.

호흡이 멈췄고 생명력의 손실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무장하고 있는 아이템이 모조리 기능을 멈췄다.

드래곤 아머도 예외가 아니었다.

탐욕으로 만들어져 내구력이 무한인 아이템들조차도 냉각 효과 탓에 기능을 정지했을 정도다.

바알의 심상이다.

[어이...! 어이!! 정신 차려라!!]

머리 위에서 날뛰어대는 그리드를 연신 욕하며 몸부림치던 번헬리어가 활공했다.

꽁꽁 얼어붙은 그리드를 몇 번이나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드는 자신을 휘감은 죽음의 얼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고룡의 기사가 되어 격을 몇 단계나 끌어올리고도.

기껏 이 몸의 등을 빌려줬건만 고작 이딴 수작질에 당한다고?

번헬리어는 자신의 가치까지 덩달아 깎여나간 심정이라 불쾌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그리드를 차마 욕하진 못했다.

‘당연한 거다.’

그리드.

이놈은 어지간한 해츨링보다 훨씬 더 어리다.

인간의 나이로도 젊었고 신이 된지는 채 몇 년이 안 됐다.

사실상 갓 태어난 수준으로 응애 소리나 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이런 놈에게 나는 의지하고 있었던 건가.

새삼 깨닫고 황당해서 실소를 흘린 번헬리어가 용언을 읊었다.

[너는, 위대하다.]

지키지 않을 약속을 지껄이지 않았다.

타인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는 시도도 없었다.

번헬리어.

매번 언약의 맹세를 어긴 탓에 용언을 연마하지 못한 악룡.

그의 용언이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서 쓰였다.

꽤나 낯설었다.

어색하고 불쾌한 감정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하지만 딱히 어렵지는 않았다.

번헬리어는 단지 그리드를 인정했을 뿐이다.

거기에 어떤 수고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콰창!

효과가 즉시 나타났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고룡이 인정한 진실이 섭리가 되었다.

그리드를 꽁꽁 얼렸던 얼음 표면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끊는 균열이었다.

“무의미한 짓을.”

바알이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번헬리어의 개입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리드의 한계를 점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리드가 입에 문 사탕은 녹아 사라진 상태였고, 의식도 온전치 않았으니까.

날뛰는 동안 상처도 제법 크게 늘어났다.

바알이 입었던 상처와 비교하면 경미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리드의 몸이 바알의 몸과 비교해서 연약하다는 점을 감안해야했다.

바알은 피부는 드래곤의 비늘만큼이나 단단하다.

절대방어를 지니지 못한 대신 초고속 재생과 증식 능력을 갖췄다.

반면 그리드는 인신이다. 초월자 수준의 인간과 비교해서 몸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데 넝마다.

망가지기 직전의 장난감인 것이다.

그걸 억지로 움직이는 번헬리어가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번헬리어, 내가 널 살려두는 이유를 간과하지 마라...?”

서늘하게 말하던 바알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 두 걸음, 세 걸음, 점차로 가속해서 물러서더니 급기야 전개 중인 마법진의 80프로를 방어술식으로 교체했다.

쩌정!

쩌저저저저저저저정!!

무구의 비가 그를 덮쳤다.

하나하나에 심상이 깃들어 있었다.

어느새 좌우로 솟구친 높은 협곡이 그의 이목을 끌었다.

금의 성역이다.

번헬리어의 용언 덕분에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즉시 펼친 심상세계였다.

드래곤 나이트 효과를 얻기 전까진 별 효과가 없을 거란 생각에 억제했지만 이젠 아니다.

고룡을 타고 높아진 격을 믿었다.

실제로 바알은 그리드의 심상을 차단하지 못했다.

“흑철로 다진 협곡...”

이것이 너의 심상인가.

생명 따위 없는 금속의 세계라.

나보다 더 황폐한 놈이다.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바알이 한 발 늦게 눈치 챘다.

협곡의 중심부에서부터 샘솟는 기운을.

주작의 심장이 내뿜는 기운이었다.

그리드의 심상은 따스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바알의 심상과는 달랐다.

“하핫...! 크하하핫!!”

바알이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할 만한 장난감이 자신과 대척하는 입장에 있었으니 어떤 운명마저 느낀 것이다.

너무 즐거워서 황홀해질 지경이었다.

“다만, 아직은 일러.”

웃음을 뚝 그친 바알이 정색했다.

흑철로 이루어진 협곡.

고작 흑철은 내게 큰 위해를 가하지 못한다.

확실히, 저놈에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재차 확신한 바알이 마검을 쥔 손을 길게 늘어뜨렸다.

자신을 빤히 노려본 채 호흡을 고르는 그리드와, 그를 목덜미에 태우고 있는 병신 같은 고룡을 동시에 시야에 담았다.

“백만대군 몰살검.”

무패왕 마드라.

대천사로 간택되지 않을까 싶었던 인간이다.

하지만 놈은 의외로 천국에 오르지 못했다.

미련 때문인지 지상에 남았던 넋이 하필 파그마에게 붙들렸던 여파다.

덕분에 놈의 영혼은 지옥 지하에 묻히게 되었고 생전 놈이 쌓아올렸던 지식과 기술은 바알의 소유가 되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앙...!

개세적인 위력의 검기가 횡으로 뻗어나갔다.

바알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단숨에 베어버리는 검기였다.

흑철의 협곡들이 항거하지 못하고 잘려나가 단면을 드러냈고 협곡은 평야가 되었다.

번헬리어의 절대방어와 마법, 비늘도 속절없이 썰렸다.

목덜미까지 드리운 검기를 보면서, 번헬리어는 얼핏 죽음을 예감했다.

그를 지켜낸 것이 그리드였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

썰려나간 협곡의 흑철들이 빚어낸 모습이다.

수백수천 개의 발할라가 그리드와 번헬리어의 전면으로 떠올라 그들을 검기로부터 지켜주었다.

베이고, 부서질 때마다 새롭게 형태를 다지며 그들을 수호했다.

‘칸,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당신의 갑옷이 점차 무용해지고 있음을 실감해왔다.

적들이 강해질수록, 내가 사는 세상이 거대해질수록.

점차 고단해지는 현실이 당신의 갑옷을 벗게끔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끝내 새로운 갑옷을 만들지 못하고 당신의 갑옷으로 내 몸을 감싸온 이유는, 당신을 의지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내가 사귄 최초의 벗.

숨이 끊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직 나의 안위를 걱정해주었던 가족.

당신의 애정과 호의가 여전히 나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멸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선 안 된다.

무패왕의 검술이란 그런 것이었다.

한데 그리드의 심상이 얼개를 이룬 저 갑옷들은 쉽사리 베이질 않았다.

설령 베일지라도 즉시 다시 짜였다.

바알은 눈치 챘다.

저것이 그리드가 가장 의지하는 심상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파사삭!

깨어지고 조립되길 반복하는 갑옷들의 파편 사이로 그리드가 튀어나왔다. 손으로 내뿜은 브레스로 가속력을 얻은 채다.

백만대적검의 사용 여파로 동작에 제한이 생긴 바알의 정면으로 난입했다.

“위룡극파살연(爲龍極派殺聯).”

이번에 바알은, 처음부터 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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