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82화 (1,580/1,794)

템빨 78권 - 21화

바알의 적수는 드물다는 게 세간의 중론이었다.

Satisfy의 세계관을 보면 추측하기 쉽다.

지옥에 붙들린 수백수천 억 개의 영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영혼을 손아귀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존재.

바알의 중요도는 단순히 ‘강력하다.’는 설정을 지닌 무신 제라툴 등과 차원이 달랐다.

만약 바알이 죽는 날이 온다면.

그건 Satisfy의 스토리가 종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터였다.

쉬운 상대일 리가 없었고, 실제 바알은 사람들의 예상만큼이나 강력했다.

말 그대로 무적.

그리드와 번헬리어를 홀로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사도들과 결사들은 물론 하야테와 마리로즈가 여럿 합류해도 쓰러뜨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푸화하하학...!

바알의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기다란 팔이 손에 쥔 마검과 함께 통째로 잘려나가 허공을 맴돌았다.

그리드에 의해서다.

정확히는, 거대한 드래곤의 목덜미에 올라탄 그리드에 의해서.

“...드래곤을 탔다고?”

사람들이 경악했다.

나이, 성별, 입장과 관계없이 죄다 반응이 똑같았다.

환호성을 내지르는 건 기본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거나 발을 굴러대는 통에 뉴욕 타임스의 어떤 기자는 지구가 흔들렸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하야테, 마리로즈, 크라우젤이 힘을 합쳐야 간신히 발을 묶었던 악룡 번헬리어.

과거 국가대항전에서 공개됐던 능력치만큼이나 강력한 그 초월적인 존재를, 그리드는 ‘탑승’한 것이다.

싸워서 이겼다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다.

승리보다 훨씬 더 상위의 개념이었고 충격이었다.

상상을 초월했다는 표현은 진부할 정도의.

“미쳤어. 단단히 미쳤어...”

드래곤 나이트.

드래곤 슬레이어와 동격인 유일급 칭호의 등장이 무지막지한 파급력을 발휘했다.

이 순간 그리드의 모습이 만인의 뇌리에 못 박혔다.

새카만 마기를 흩뿌리는 용의 목덜미 위에서 주황색 신성을 난반사하는 신화적인 모습.

사람들은 직감했다.

지금 본 그리드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앞으로 평생토록 그리드를 닮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리게 되리라고.

『저건... 저쯤 되면 드래곤 슬레이어 이상 아닙니까?』

잠시 넋을 잃고 있던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이 무척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강의 인간이라고 믿어온 용살자 하야테를 부정하는 질문이었다.

비난을 감수했다.

한데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모두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용을 죽이는 자와 용을 다스리는 자.

굳이 우위를 꼽자면 당연히 후자가 우위에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이 순간의 그리드는 템빨신이 아니었다.

드래곤 나이트.

사람들은 그리드를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다.

사실 무엇으로 불리든 중요하진 않다.

대장장이, 황제, 신, 용을 타는 기사.

무엇이든 결국엔 그리드를 뜻하는 이름이니까.

평범했던 한 청년이 도달한 현재는, 결국 그리드였다.

“바아알!!”

번헬리어의 초고속 비행.

하야테조차 간신히 반응했던 속도를 그리드는 온전히 통제했다.

능력치가 3배씩 상승했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드는 번헬리어와 교감하고 있었다.

서로의 뜻을, 의지를 읽었다.

번헬리어는 그리드의 의도가 납득할 만한 것이라고 판단할 때마다 즉시 호응해주었다.

그리드가 원하는 방향으로 비행했다.

덕분에 그리드는 바알에게 빠르게 접근할 수 있었다.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치는 마법 폭격을 무사히 꿰뚫고 나아가 두 자루의 검을 각각 횡으로, 종으로 베었다.

지면이 아닌 용의 몸을 딛고 전개하는 검무다.

[<용(龍)>의 검무가 새롭게 해석됩니다.]

<낙룡극연살파(落龍極聯殺派)>를 연계하는 도중이었다.

수백 개의 마법진을 그리는 한편 잘려나간 팔을 이기어검마냥 운용하며 저항하는 바알의 가드를 드래곤 브레스로 무력화시킨 직후.

낙에 이어 용의 검무를 추는 순간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번쩍였다.

섬전처럼 다가왔다.

새로운 용의 검무.

그리드는 명백한 변화를 느꼈다.

검무를 처음부터 다시 춰야 한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검을 도중에 거뒀다.

[원숭이 같은 놈...!]

번헬리어의 폭언이 뒤따랐다.

기껏 검무의 발동 타이밍에 맞춰서 브레스를 쏘았건만, 그리드 이 빌어먹을 놈이 도중에 갑자기 검을 거둔 것이다.

목덜미에 태운 순간부터 교감하며 제법 쓸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과연 하찮은 인간 출신의 신답게 무지몽매했다.

제 발로 기회를 놓치는 꼴이 꼭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를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드는 무시하고 재차 검무의 기수식을 취했다.

번헬리어에게 다시 한 번 전진을 강요했다.

번헬리어가 어쩔 수 없이 호응했다.

바알은 그새 상처를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검을 거둔 그 짧은 시간 동안 잘려나간 팔을 어깨에 붙여버렸다.

“아직은 합이 맞질 않는 건가?”

여유를 되찾고 이죽거리는 낯짝이 참으로 재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번헬리어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번에도 역시 그리드의 검무 발동 타이밍에 맞춰서 브레스를 쏘았다.

하지만 바알은 두 번 당해주지 않았다.

온갖 결계와 봉인 술식으로도 브레스를 약화시킬 수 없단 사실을 앞서 확인한 그는 이번엔 직접 마검을 휘둘러서 브레스를 베어버렸다.

새카만 검의 궤적이 허공에서 수십 차례 꺾였다.

5회 중첩 된 브레스의 기세를 누르고, 베고, 흘리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도자기를 깎는 도공을 보는 듯했다.

장인 정신이 느껴질 정도의 기예였다.

꽈창!!

급기야 브레스의 궤도가 완전히 뒤틀렸다.

다섯 줄기로 나뉘어선 바알에게 닿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의 눈에는 직선으로 뻗어나간 레이저가 바알에게 닿기 직전에 저절로 흩어지는 광경으로 보였다.

바알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단 의미다.

그리드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초월의 격이 바알의 검기 파장을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인공 감각이 바람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면, 그리드 또한 바알의 검로를 놓쳤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놓쳤어도 괜찮다.

그리드는 번헬리어의 브레스가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다.

바알의 팔이 회복된 시점부터 예상하고 대비했다.

“...!”

바알이 짐짓 놀랐다.

조금 전 벤 것과 똑같은 형태의 브레스가 코앞에 직면해 있었으니까.

[뭐냐?]

번헬리어도 놀랐다.

‘자신의 브레스’가 그리드의 입에서 쏘아졌으니 놀랄 수밖에.

물론 위력은 온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룡의 브레스를 재현한 것이다.

설령 온전하지 못할지언정 그리드가 앞서 쏘았던 브레스와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을 지녔다.

꽈아아아아앙!!

바알이 재차 검을 휘둘러 브레스를 베어내는 그때.

번헬리어가 몸을 크게 웅크렸다.

그리드를 태우고 있는 목덜미가 바알의 머리 위로 향하도록 각도를 맞췄다.

바알의 정수리를 시야에 담은 그리드가 두 자루 드래곤 웨폰을 휘둘렀다.

또 다시 6융합 검무였다.

한데 동작이 종전과 달랐다.

정확히는 용의 검무가 바뀌었다.

단순히 용의 기세를 재현하려고 애썼던 기존의 용(龍)과도, 청룡의 고매한 모습을 동경했던 파그마의 용(龍)과도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이것은, 고룡과 함께 호흡하는 그리드의 검무다.

[<용(龍)>의 검무가 악룡(惡龍)의 검무로 진화합니다.]

악룡 번헬리어.

태초부터 존재해온 고룡 중 하나.

이 순간 그리드와 같은 눈높이에서 교감하는 그의 존재 자체가 그리드에겐 영감이었다.

새로운 검무의 근원으로 삼기에 적합했다.

<용(龍)-번헬리어>

사악한 고룡 번헬리어의 힘과 기세를 재현하는 검무입니다.

자체적인 ‘광증’을 일으킵니다.

표적으로 지정한 대상에게 돌진하여 물리공격력 2만 퍼센트의 피해를 입히고 최소 2개 이상의 상태이상을 반드시 유발합니다. 발생하는 상태이상은 무작위.

대상의 격이 낮을 경우 99퍼센트의 확률로 즉사시킵니다.

스킬 검기 소모:800

스킬 마나 소모:50,0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

사람들이 아연실색했다.

그리드의 뒤틀린 미소를 목격해서가 아니다.

찬란한 주황색 신성이 검게 물들며 용의 날개처럼 펼쳐지는 광경에 이목을 사로잡힌 그들은 그리드의 표정 변화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놈 대체 뭐냐?]

번헬리어의 커다란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는 사악하므로 신성에 민감하다.

그리드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리드가 어떠한 종류의 신인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었다.

오로지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신.

천상의 신들과는 다른 고결하고 강직한 신이었다.

그래서 본능적인 혐오를 느꼈었다.

바알을 죽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다지만, 바알 다음으로 싫은 놈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단 말이다...

한데 이 순간 갑자기 바뀌었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엄청난 일체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바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처음부터 알아봤다.”

저놈이 정상은 아니라는 걸.

꽈아아앙!!

읊조리던 바알이 추락했다.

그리드가 재현한 악룡의 기세를 온전히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짤랑...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슬그머니 미소 지은 바알이 질문했다.

추락하는 자세 그대로 6융합 검무의 연계기를 맞받아치면서.

“네 잠재력은 뭐지?”

궁극의 무.

종종 치우의 가호로 오해 받는 그것의 정체는 가호와 거리가 멀다.

대상이 언젠가 개화하게 될 잠재력.

즉, 미래였다.

바알은 궁금했다.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내 의식의 편린조차 감당하지 못했던 눈앞의 존재가 어떤 미래를 지녔기에 벌써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쩌정!

쩌저저저저저정!!

그리드와 바알의 검광이 어지럽게 얽히고 있었다.

바람의 흐름에 색을 덧칠하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현란했다.

“바아아알!!”

그리드는 바알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화에 응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오로지 분노만 키웠다.

고양감이나 광증의 영향이라기엔 순수했다.

그래.

그리드는 순수하게 바알을 증오했다.

놈을 잡아 죽이는 순간을 이미 오래 전부터 꿈꿔왔다.

지금.

어쩌면 두 번 다신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를 얻은 지금이야말로 반드시 놈을 없애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느꼈다.

서걱!

츠카카칵!!

그리드의 몸에도, 바알의 몸에도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서로의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발생하는 충격파에 의해서다.

그리드에겐 치명적이지 않았다. 견딜 만했다.

바알의 상처는 더욱 사소했다. 생채기에 불과했다.

한데 그 생채기가 바알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궁극의 무가 발생합니다!]

그리드의 궁극이 바알에게 스턴을 건 것이다.

“...핫!”

눈을 반개하며 웃는 바알의 가슴을,

푸우우욱!!

[대상에게 503,691,044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두 자루 드래곤 웨폰이 꿰뚫고 찢어발겼다.

드래곤 나이트 효과를 등에 업고 악룡의 춤사위까지 펼친 그리드의 6융합 검무는, 비록 끝자락에서야 바알에게 적중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무지막지한 위력을 발휘했다.

(78권 끝)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