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80화 (1,578/1,794)

템빨 78권 - 19화

지옥의 달은 항상 만월이다.

인공적으로 덧씌워진 것에 불과하니까.

번헬리어가 움직일 때마다 하현으로, 상현으로 바뀌는 달의 모습이 이곳에선 생소한 것이다.

“제법 놀라는 녀석들도 있겠는데.”

흑요석처럼 새카만 비늘을 두른 번헬리어.

멀리서 봤을 땐 달을 가리는 그림자로 비출 법한 고룡의 비현실적인 거체를, 바알은 고즈넉하게 감상했다.

압도당한 기색이 아니다.

일말의 긴장감조차 엿볼 수 없었다.

비정상적인 반응.

그리드는 바알과 번헬리어의 관계를 보다 면밀하게 추측해보았다.

‘바알이 우위에 있나?’

지옥 도착 이후.

그리드는 아직까지 로그아웃 한 적이 없다.

약속 된 시간이 아니기에.

바깥 상황을 몰랐다.

번헬리어가 마리로즈에게 큰 낭패를 당했다는 소식을, 그녀가 번헬리어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던 원인이 바알에게 있다는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했단 뜻이다.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했다.

번헬리어가 바알에게 보내는 원한과 분노, 살의를 통해서다.

번헬리어는 바알을 명백히 증오하고 있었다.

뒤통수라도 세게 얻어맞은 건가 싶었는데, 번헬리어가 지옥에서 악룡으로 거듭났던 에피소드와 필시 관련이 있을 터였다.

‘확실해. 그 과정에서 바알이 번헬리어에게 어떤 족쇄를 채웠다.’

그래야만 번헬리어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

고룡 앞에서도 느긋한 바알의 태도를 납득 가능하다...

쿠구구구궁...

생각하는 그리드의 주변으로 거대한 그늘이 드리웠다.

번헬리어가 가까워질수록 확장되는 그림자였다.

[바알 네놈이 아주 같잖은 수작을 부렸더구나.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란 사실이야 진즉부터 알아봤다만, 태초부터 존재해온 위대한 고룡을 기만할 정도였나? 목숨이 10개라도 되는 거냐?]

번헬리어는 누가 봐도 흥분한 상태였다.

초연하여 경외감을 주었던 미식룡이나 다른 상위룡들과 달리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그러한 태도가 값싸게 느껴지진 않았다.

순수하게 위압적이었다.

그리드는 번헬리어가 숨결을 토할 때마다 반응하는 초월의 격 발생 메시지 탓에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번헬리어의 작은 행동, 혹은 한 마디가 실시간으로 초월자에게 위기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정작 정면에서 살기를 받아내는 바알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새삼스러운 질문이군. 광룡을 잊었나?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너희를 기만해왔다만.”

얼마 전 지상에 등장했을 때와 달리 평범한 인간 크기인 바알.

보는 이의 심상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모습을 지녔다고 했던가.

창백하되 매끄럽게 보였던 놈의 피부가 점차 돌처럼 단단해져가고 있었다.

머리에 달린 3개의 뿔이 비약적으로 높이 솟구친다 싶더니 몸집 또한 거대해졌다. 번헬리어와 나란히 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를 경악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어느새 자신에게 상태이상 ‘공포’가 적용되었음을 자각하고 이를 악 물었다.

‘쫄지 마.’

곁에 번헬리어가 있다.

바알을 당장 죽이겠다는 기세의 고룡이다.

광신광룡으로 고룡을 탈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정말로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기회.

기대조차 못했던 바알 레이드가 가능할 수도 있다...

몇 번이나 마음을 다스려 보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그리드가 바알에게 느끼는 공포는 시스템적인 문제다.

초월자나 신에게도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악의 근원.

그러므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게다가 번헬리어를 신뢰하기도 힘들었다.

번헬리어는 필시 그리드의 의도를 읽고 호응했지만 그것이 호의로 직결되진 않았다.

상황에 따라서 언제든지 마음을 바꿀 수 있단 의미다.

애초에 악룡이다.

쉽게 말해서 나쁜 놈이었다.

신뢰관계를 구축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입장에선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상대야.’

번헬리어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템빨신... 나를 배신할 생각일랑 마라. 네가 나를 욕보인다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빼앗겠다.]

쿠우웅.

그리드의 바로 곁에 착지한 번헬리어가 분명하게 경고했다.

그 역시 그리드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고개를 앞으로 서서히 숙였다.

그리드가 자신의 목덜미에 올라 탈 수 있도록.

그렇다.

비화 광신광룡의 내용은 번헬리어도 알고 있었다.

다른 고룡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광신광룡의 주역이 될 필요성을 느끼는 고룡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번헬리어 외에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이 번헬리어에게 몹시 큰 수치심과 회의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자신이 지옥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온 바알이다.

여기까지가 놈의 예측 범위 내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번헬리어에겐 놈의 예측을 어긋나게 만들 변수가 필요했고 마침 이곳엔 그리드가 있었다.

이프리트가 제 아비에게 한 방 크게 먹일 수 있도록 도운 놈.

과연 허명이 아니라는 듯이, 놈은 시험 삼아 쏜 브레스를 견뎌냈다.

하야테처럼 브레스의 기운을 약화시킨 것도 아닌데 버텼다.

단순히 단단하기만 따지면 용살자 이상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저런 놈은 처음 봤다.

필시 도움이 될 터였다...

“나는, 배신하지 않아.”

그리드가 선언했다.

브레스를 허용한 여파로 주르륵, 입을 열 때마다 검은 피를 흘려댔지만 표정만큼은 진지했다.

신의 약속이다.

그것에 깃든 무게를 온전히 헤아리는 존재가 바로 고룡이었다.

[나 또한 이번 한 번 만큼은 너를 배신하지 않겠다.]

그리드의 진심을 읽은 번헬리어 역시 언약을 맺었다.

그것이 반드시 지켜져 용언으로 승화 될 것인지, 늘 그랬듯 덧없이 흩어져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할 것인지...

번헬리어 본인조차 예측할 수 없었다.

결코 자랑은 아니지만, 그의 포악한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흔들리게 될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용 중 하나가 템빨신 앞에 고개를 숙였다.]

모든 장면이 20번째 서사시에 기록되고 있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장면들이 그리드에게 유리하게 해석됐다.

번헬리어는 단순히 그리드를 탑승시키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뿐이지만, 서사시엔 마치 굴종이라도 한 것처럼 묘사됐다.

그리드는 뜨끔했으나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내가 일부러 왜곡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의 집필자가 하느님이 아니듯, 본래 신화란 인간에 의해서 쓰이는 것이다.

그 내용을 그리드가 직접 정정하는 것도 웃겼다.

애초에 정정할 권한도 없고.

[언젠간 반드시 인류를 멸망시키겠다...]

상황을 눈치 챈 번헬리어가 무서운 말을 지껄여댔다.

때마침 기습을 날려 번헬리어의 정신을 분산시킨 바알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큭.”

그리드가 번헬리어의 목덜미에 탑승하지 못하고 추락했다.

안 그래도 공포와 함께 연계 된 상태이상 혼란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든 상황이어서, 바알의 쾌속한 기습에 제대로 적중당하고 말았다.

‘검술이 주력인가?’

바알은 하야테와 닮은 면이 있었다.

하야테가 유형화시킨 기로 용살검을 빚듯이 마기로 새카만 검을 빚어냈다.

개세적인 위력을 품었다.

단순히 강력한 수준을 넘어서 대상에게 접근할수록 온갖 상태이상을 유발한다.

말 그대로 마검이었다.

마검의 가장 위협적인 면모는 ‘면역 체계 파괴’라는 디버프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 있었다.

파그마의 후예가 된 이후부터 쭉 당연하게 누려온 상태 이상 면역 기능이 대부분 무력해졌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최종 보스 중 하나가 이 정도도 못하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그리고 내겐 이 시련을 극복할 의무가 있다.

침착하자.

절망할 필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이 됐을 뿐이다.

그리드가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퍼엉!

횡으로 휘둘렀던 검을 회수하여 번헬리어의 브레스를 쳐낸 바알이 반대편 손을 뻗어 마법을 날렸다.

수십 종류의 마법진이 불시에 생성됐다.

<지공>과 <거세안>의 효과로도 전부 파훼하는 게 불가능했다.

추락 중이던 그리드에게 재차 대미지가 누적되었고 바알의 공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대한 발꿈치를 내리찍어 그리드의 정수리를 가격했다.

어느새 그리드의 어깨 위에 얹어진 놈의 손가락이 드래곤 아머를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고 있었다.

충격 여파로 어깨뼈와 쇄골이 골절되며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 그리드의 복부를 마검이 쑤시고 헤집어놓았다.

그리드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단순히 고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였다.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바알의 공세가 워낙 쾌속하고 복잡했다.

지크처럼 검술, 무술, 마법 모든 분야에 통달해 있었고 위력은 지크를 초월했으니까.

‘악마 새끼가, 뭔?’

지옥의 절대자가 강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절세의 기술까지 갖췄을 줄은 몰랐다.

애초에 악마란 배움을 등한시하고 타고난 권능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닌가?

단탈리안이나 이야루그트 등,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랬다.

하물며 즐거움을 추구하는 바알이 뭔가를 배우고, 단련해왔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었다.

혼란과 경악으로 물든 그리드의 눈빛을 읽은 바알이 설명해주었다.

왠지 즐거운 눈치였다.

“지상에 남아있는 인류의 역사는 대부분 승자의 기록이지.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반면 지옥은 모든 망자의 역사를 총람한다. 인간이 쌓아올린 지식과 기술을 너희들 인간보다 도리어 내가 더 많이 숙지하고 있단 말이다.”

콰쾅! 쿠콰쾅!!

바알의 움직임엔 한 순간의 빈틈도 없었다.

쉬지 않고 이어졌다.

영원히 이어지는 단 한 번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생물인 것처럼, 온갖 종류의 기술을 시간 차 없이 연계시켰다.

관절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궤도에서 닥쳐오는 공격들을 보면.

그나마 인공 감각과 초월의 격이 없었다면 단 하나도 피하지 못했을 거다.

[뭐 하냐, 네놈?]

안 그래도 포악하게 생긴 번헬리어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드가 불쑥 정신을 차렸다.

공격을 막는데 급급하다 보니 어느새 번헬리어와의 거리가 한창 멀어져 있었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바알의 몸은 번헬리어와 비견 될 정도로 거대해진 상태다.

놈이 내뻗는 손과 발은 수십 미터의 거리까지 닿았다.

최초에 번헬리어와 나란히 있던 그리드의 위치를 떠올려 보면, 바알의 공격 범위엔 그리드뿐만이 아닌 번헬리어가 포함됐어야 옳다.

한데 바알의 공격은 오직 그리드에게만 닿고 있었다.

그리드가 집중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유심히 관찰했다.

바알의 거대한 몸이 움직일 때마다 번헬리어의 몸과 겹쳐졌다.

한데 번헬리어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실제로 바알의 팔과 다리는 번헬리어의 몸에 아무런 물리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마치 유령처럼 관통하고 있었다.

번헬리어가 유체화라도 쓴 걸까?

아니다.

바알의 거체가 가짜일 뿐이다.

그리드는 상기했다.

바알이 거대해 보이는 이유는 자신이 그를 두려워해서임을.

실제 바알의 몸은 번헬리어처럼 거대하지 않은 것이다.

‘현혹되지 말고... 우선 거리를 제대로 가늠해야 돼.’

타앙, 타앙, 타탕, 타타탕...

그리드가 인공 감각에 걸리는 충격들의 간격을 쟀다.

얼핏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듯했다.

바알의 팔이 인공 감각의 범위보다 훨씬 더 길었으니까.

바알이 단 한 번 휘두른 팔이 인공 감각의 전체 면적을 휘감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아주 약간의 텀이 존재했다.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리자 간신히 눈치 챌 수 있었다.

저건 단순히 빠른 거다.

‘3미터, 1미터...’

충격의 전달 속도를 토대로 바알의 실제 크기와 마검의 길이를 가늠한 그리드가 고개를 좌측으로 기울였다. 상태이상 혼란의 여파로 명령값이 반대로 먹혔다. 고개가 우측으로 기울었다.

시각적으로 봤을 땐 자살행위였다.

바알이 휘두르는 마검에 스스로 목을 들이미는 꼴로 보였으니까.

스윽.

하지만 칼날은 그리드의 목을 베지 못하고 관통했다. 환영처럼 스쳤다.

실제 바알의 칼날은 아직 그리드에게 닿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이제야 슬슬 귓불에 닿아왔다.

안 그래도 몸이 생각과 반대로 움직이는 와중에 핑이 무작위로 튀는 환경에 놓인 느낌.

바알의 일격, 일격이 절대방어를 꿰뚫고 수만 단위 데미지를 입혀오는 것과 별개로 전투의 난이도와 피로도가 너무 높다.

쩌어어엉!!

처음으로, 그리드의 검과 바알의 검이 맞물렸다.

마검이 그리드를 베지 못하고 드래곤 웨폰에 가로막혔다.

“...적응이, 상당히 빠르군?”

바알의 눈이 반개했다. 여러 개의 눈동자 중 일부가 눈꺼풀에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됐다.

바알 고유의 습관이다.

감탄할 때나 보이는 반응.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가 감탄하는 경우는 보통 없으니까.

‘근력이 대체 몇이야?’

그리드는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드래곤 웨폰의 검신이 살짝 휜 것을 목격해서다.

찌릿찌릿, 요란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양팔은 덤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마저 터뜨리는 그의 등 뒤로 번헬리어가 나타났다.

현재 지옥은 대부분의 이동 기술을 차단하는 술법이 가동되고 있었지만 고룡의 텔레포트까지 봉할 순 없던 것이다.

[어서 타라!]

번헬리어가 재촉했다.

처음과 달리 억양이 제법 온화했다.

그리드의 선전에 감탄한 건 바알만이 아닌 것이다.

그리드가 도약했다.

일단은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를 활성화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어딜.”

바알이 따라붙었다.

여전히 마검과 맞물려 있는 드래곤 웨폰을 힘으로 짓누르며 초근접전을 유도했다. 지근거리에서 쏘아지는 마법과 스킬들이 그리드에게 무지막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웃는 바알의 얼굴이 그리드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때.

꽈아아아아아아앙!!

그리드의 입에서 브레스가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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