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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78화 (1,576/1,794)

템빨 78권 - 17화

그리드의 사도들에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팀플레이에서 더 큰 가치를 발휘한다는 점.

그들의 성격이 남을 보조하기에 적합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능력 자체가 특별했다.

피아로가 다스리는 자연의 기운은 아군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었고 메르세데스의 방패술과 기사도는 아군을 보호하는 한편 확고한 신념을 심어주었다.

브라함은 존재 자체가 마력을 사용하는 모든 아군에게 이롭게 작용했으며 적에겐 재앙이었다.

사리엘의 신성은 아군의 공포를 지웠고 네펠리나는...

...아무튼 그런 사도들 중에서도 아군과 가장 뛰어난 조화를 이루는 존재가 바로 지크였다.

지크가 아닌 지크프렉터였던 시절.

즉 칠악성의 ‘화신’에 불과했던 시절부터 모든 종류의 무술과 마법에 통달하고 그랜드마스터라고 칭송 받았던 그는 기본적으로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섭리를 꿰뚫어 보는 수준의 지혜를 지닌만큼 인간의 구조와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했는데, 이를 토대로 아군 개개인에게 적합한 버프를 제공했다.

심지어 실시간으로 변모하는 상황에 맞춰서 말이다.

그로인해 지크와 파티를 맺은 템빨단원들은 기적을 체험했다.

[당신에게 쓰인 룬어의 뜻이 바뀝니다.]

[공격력 상승 버프가 해제되고 회피율이 상승합니다.]

“...!”

실시간으로 바뀌는 버프는 일종의 암시가 되어주기도 했다.

템빨단원들은 바뀐 버프의 내용을 토대로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지각했다.

극검도 마찬가지였다.

거리에 들어온 악마의 몸을 양단한 후, 재차 다음 발검을 준비하던 그가 급히 몸을 수그렸다.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앞구르기를 하고 보았다.

다소 꼴불견일 거란 자각은 있었다.

-하여간에 체통을 모르는군.

이야루그트의 핀잔에 울컥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극검은 지크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가 내려준 버프가 분명한 근거를 토대로 발생했음을 알았다.

역시나.

퍼펑! 퍼퍼퍼퍼퍼펑!!

방금 전까지 극검이 있던 자리로 마법 폭격이 떨어졌다.

다만 극검이 굴러간 방향까지 폭격 범위에 포함된다는 점이 문제였다.

다행히 회피율 상승 버프 덕분에 치명상은 면했지만 극검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괜히 굴렀네.’

어차피 맞을 거면 차라리 가만히 있거나 고개만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일 걸 그랬다.

그럼 그리드나 크라우젤처럼 멋있어 보이기라도 했을 텐데.

“멋져요!”

극검의 걱정과 달리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좋기만 했다.

제3자가 봤을 땐 극검이 굴러서 마법을 피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칭찬하면서 힐을 주는 루비 덕분에 기운을 차린 극검이 호흡을 골랐다.

보폭을 넓히고 하단세를 취했다.

이야루그트는 칼집에서 벗어나 있었다.

투명한 붉은 검신을 타고 핏물이 회오리쳤다.

이미 벤 후다.

어느새 쾌속하게 펼쳐진 발검술이 전장의 한 면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표적이 된 악마의 육신이 좌우로 벌어졌고 놈 주변의 마물들이 달려오던 폼 그대로 잿빛으로 산화했다.

극검에게 적용된 버프도 진즉에 공격력 상승 버프로 돌아온 상태였다.

극검이 저 멀리 있는 지크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어이! 당신 최고야! 진짜 최고라고!!”

과연 이 외침이 전해질까.

전장은 워낙 시끄러웠고 극검과 지크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하물며 지크의 시선은 이쪽이 아닌 전방을 향해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적진 끝에 있는 두꺼비를 노려보며 전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 전체에 흩어져 있는 템빨단 전원에게 매번 새로운 버프를 주는 것이다.

마치 템빨단원 하나하나에게 시선이라도 붙여둔 것처럼.

이쯤 되며 지슈카와 같은 시야를 지닌 게 아닐까 싶었다.

전장 전체를 통찰하는 시야.

꽈아아앙!!

화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구름 위에서 쏘아진 것처럼, 포물선이 아닌 직선을 그리고 떨어지는 화살의 세례가 폭우와도 같았다.

그것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지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편하군.’

칠악성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기 전.

여섯 동료들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시절이 떠올랐다.

동료들은 항상 지크에게 길을 열어줬고 지크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난적을 무찌를 수 있었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대부분 죄 없는 자들이었다.

지크와 동료들이 치렀던 전쟁은 결코 성전(聖戰)이 아니었기에.

신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휘둘렀던 저열한 폭력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지크는 칠악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하란 제국의 배후로 존재하던 시절의 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칠악성과 관련된 역사를 고치지 않았다.

칠악성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호소하기엔 너무 많은 죄악을 범했으니까.

그렇다.

지크의 궁극적인 목적은 동료들의 원혼을 달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단지 부수적인 바람일 뿐, 그의 진정한 목적은 한울 앞에서 밝혔던 것처럼 순수했다.

비열한 신들을 단죄하고 인간에게 보다 이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

그러므로 영웅이다.

그 위대한 영웅이 그리드를 지지하고 있었다.

성전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고 오로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신.

그의 템빨계가 온 세상을 뒤덮길 바라며.

“개골...! 오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체파르데아가 발악적으로 외쳤다.

가장 경계해야 할 인간 중 하나.

놈은 칠악성 지크의 실력을 인정하는 한편 지크의 사상만큼은 납득하지 못했다.

“나는 너와 같은 눈을 한 인간들을 셀 수 없이 목도해왔다...! 그건 광신도의 눈이야!! 개골!!”

야탄교에서 보았다.

지옥의 새로운 주인이자 유일한 왕.

위대한 바알이 아닌 오래 전 지옥을 버린 야탄을 섬기는 인간들.

아모락트에게 완전히 현혹된 놈들은 막말로 답이 없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야탄을 맹신했다.

지금의 지크가 그랬다.

한 점의 의문조차 깃들지 않은 올곧은 눈빛이 몹시 거슬려서, 배알이 꼴릴 정도였다.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놈과의 거리를 드디어 좁히는데 성공한 지크가 말했다.

“그대에겐 의심이 깃들었군.”

“무슨 헛소리...!! 개골!!”

콰앙!

체파르데의 길고 두꺼운 혀가 아래로 쑥 내려갔다.

단단한 지면을 박살내고 파고들었다.

바로 직후에 지크의 발밑으로 솟구쳐 올랐다.

커다란 얼굴의 울퉁불퉁한 피부에선 고름 같은 점액이 분출되는 중이었다.

강력한 독성을 지닌 점액이었다.

지크에게 단 한 방울도 닿지 못했다.

그를 둘러싼 여러 개의 룬어 중 하나가 면역의 뜻을 품었기에.

“바알과의 관계에서 어떤 이질감을 느꼈나?”

서걱!

검을 기울인 지크가 체파르데아의 혀를 잘라버렸다.

분수처럼 솟구친 핏물이 뿌연 안개로 변해 살포됐다.

적의 시야와 감각을 차단하며 중독 시키는 피안개였다.

체파르데아의 신체는 온통 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범한 인간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죽어버린다.

하지만 지크는 알고 있다.

체파르데아는 전대 바알의 계약자 아그너스와 함께 대륙을 횡단했다는 사실을.

본래라면 놈이 걸어온 모든 길에 인간의 시체가 즐비했어야 마땅한데 그러지 않았다.

바알의 오른팔을 자처하기엔 다소 순한 면이 있는 것이다.

“아니면 그대의 본능이 슬슬 바알을 거부하기 시작한 건가?”

“헛소리 작작해라, 개골!!”

체파르데아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저놈은 대체 무엇을 근거로 나와 바알의 관계를 이간한단 말인가?

바알은 위대하다.

오직 바알만이 지옥의 주인을 자처할 수 있으며 나의 충성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그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헌신할 각오가 되어있다.

...왜?

이래서야 저 광신도 놈과 내가 다를 게 뭐지?

문득 큰 의문을 느끼는 체파르데아의 커다란 눈이 흔들렸다.

불룩 튀어나온 채 뒤룩뒤룩 구르는 꼴이 곧 폭발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기만하는 자를 섬기지 마라.”

천상의 신들조차 인간을 기만했던 실정이다.

지옥의 주인이라고 다를까.

하물며 바알의 성정을 고려한다면, 바알의 측근들은 대부분 과거의 칠악성처럼 참담한 입장일 확률이 높았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은 체파르데아가 선한 존재일 수도 있다, 따위의 기대를 거는 게 아니라 단순한 동질감에서 우러나온 조언이었다.

손속에 자비는 없었다.

바알의 최측근을 잡아 죽일 절호의 찬스를 지크가 놓칠 리 만무했다.

물론 체파르데아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몸에 둘러친 점액으로 지크의 칼을 미끄러뜨렸다.

자꾸 잘리는 혀를 즉시 재생시켜 그물을 펼쳤다. 마물들의 공격이 단 하나라도 지크에게 닿을 수 있도록 활용했다.

마법에 조예가 깊은 대악마 셋을 소집해 지크의 룬어를 파괴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얼핏 무적처럼 보이는 지크의 공략법을 제대로 꿰뚫어 본 것이다.

오래된 존재들을 좌시하기 힘든 이유다.

살면서 쌓아올린 경험과 지혜라는 건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

다소 시간이 지체될 것을 염려하던 지크가 문득 유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끄덕.

굳이 어떤 대화가 필요하진 않았다.

두 사람은 딱히 친분이 없었지만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지크는 유라와 그리드의 관계를 눈치 채고 그녀를 주시해왔다.

유라는 그리드에게 지크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둘이 같은 전장에 있는 이상 서로의 속내를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푸욱-!

지크의 검이 유라의 복부를 관통했다.

“...!?”

“...!!”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

템빨단원들은 물론이고 체파르데아와 대악마들까지 경악했다.

‘화, 환술...! 그래, 저놈들은 필시 환술에 당한 거야! 바알 전하께서 도와주신 게다! 개골!!’

체파르데아가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순간이었다.

푸우우욱!!

방금 막 유라의 복부를 꿰뚫었던 지크의 검이 체파르데아의 커다란 뒤통수를 꿰뚫었다.

무지막지한 위력을 담고서다.

촤르르륵!!

체파르데아를 찌른 지크의 검, 즉 사하란의 검에는 기다란 룬어들이 휘감겨 있었다.

파괴적인 단어들로 배합된 문장들이었다.

체파르데아의 점액을 손쉽게 파훼한 걸로 모자라 피부와 뼈를 두부처럼 가르고 재생력마저 억제했다.

“비겁, 한 놈드을...”

꿀럭꿀럭!

체파르데아가 연신 피를 토하며 간신히 말했다.

유라의 단전에 블랙홀이 열려있음을 한 발 늦게 발견하고서다.

지옥 도약 스킬의 응용이었다.

유라를 꿰뚫은 줄 알았던 지크의 검은 사실 지옥 도약에 삼켜졌을 뿐이고 그 끝에 체파르데아의 뒤통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한 입장에선 정말이지 욕밖에 안 나오는 완벽한 협공이었다.

사악한 악마의 관점에서 봐도 비겁했다.

“나의 신께서 귀공을 아끼시는 이유를 알겠소.”

“저도 당신이 신뢰 받는 이유를 알겠어요.”

푸화하학!!

서로를 치하하는 지크와 유라의 검이 체파르데아를 중심에 두고 교차했다.

세 갈래로 잘려나간 체파르데아의 눈이 까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잠깐.”

잘려나간 체파르데아의 육신의 틈새에서 시뻘건 손이 튀어나왔다.

두근!

전장의 공기가 바뀌었다.

템빨단원 전원은 물론 이민족 왕들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지크의 눈이 가라앉았다.

누구를 지켜야 하는가?

유라와 지슈카, 그리고 루비를 동시에 떠올리며 고민하는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단어가 못 박혀 있었다.

전멸.

[제1위 대악마 바알이 출현하였습니다.]

충격과 공포.

체파르데아의 육신을 찢어발기며 등장한 지옥의 절대자가 모두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바알은 침입자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을 보고 미소 짓는 체파르데아의 머리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뇌를 헤집을 뿐이다.

“이대로 죽으면 재미가 없지.”

“윽...? 바알...! 바아아알!!”

빛을 잃고 죽어가던 체파르데아의 두 눈이 갑자기 부릅떠졌다.

분노와 증오를 가득 담은 그의 시선은 지크가 아닌 바알에게 향해 있었다.

“네놈이...! 네놈이 야탄 신을...!”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바알에게 수백수천 번을 조롱당하고 살해당했던 기억들도 함께였다.

하지만 체파르데아는 자신이 겪어온 고통보다 주인께서 겪으신 모욕에 절망하며 분노했다.

진정한 주인을 잊고 욕했던 스스로를 증오했다.

바알의 표정이 굳었다.

“몇 번을 되풀이해도 변하질 않는군.”

그걸로 끝이었다.

잘려나간 몸을 질질 끌고 다가온 체파르데아의 노력을 지옥의 업화로 불태워 짓밟아버린 바알은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저 새끼 지금 우리 무시하는...! 읍읍!!”

고래고래 소리치던 반트너의 입이 닫혔다.

[당신에게 쓰인 룬어의 뜻이 바뀝니다.]

[상태이상 저항률 상승 버프가 상태이상 ‘침묵’으로 변경됩니다.]

의외로 지크에 의해서였다.

“...!”

어안이 벙벙해진 반트너가 지크에게 따지려다가 멈췄다.

지크가 비 오듯 흘리는 식은땀을 눈치 챈 것이다.

그의 강함을 알기에 더욱 더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바알이 하염없이 높은 벽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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