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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77화 (1,575/1,794)

템빨 78권 - 16화

[커헉...! 크아아아아악!!]

6융합 검무의 폭풍에 휩쓸린 흑화 그리드가 날카로운 비명을 토했다.

붉은 살덩이의 도움을 받아서다.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그의 몸뚱이를 살덩이가 실시간으로 수복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그나마 비명이라도 토하는 것이다.

전혀 고맙지 않았다.

끔찍한 고통이 되풀이 됐으니까.

차라리 즉사하는 편이 행복했으리라.

‘참혹하군.’

그리드의 마음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저 붉은 살덩이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강제로 붙들고 마음껏 휘두르고 있다.

상시 눈으로 활용하는 한편 흑화 그리드 같은 병기를 생산해댔으며, 궁극적으론 신앙의 생산 도구로 써먹었다.

여러모로 악질인 놈이다.

당장에 터뜨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차치해도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저것은 하나의 ‘세계’다.

붙들고 있는 영혼들을 세계의 주민으로 삼고 신앙을 생산해낼 정도다.

그리드 혼자서 감당할 확신이 없다는 뜻이다.

설령 승산을 엿봤다고 해도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을 거다.

저것은 잘려나간 살덩이로 흑화 그리드 같은 병기를 빚는다.

흑화 그리드 다음엔 또 어떤 괴물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당장 흑화 그리드만 해도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서 6융합 검무를 소모한 마당인데, 그 이상의 괴물이 튀어나온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우선 물러나셔야 해요. 저 혼자서는 폐하께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합니다.”

메르세데스가 종용했다.

앙 다문 입술과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분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저것이 쏘는 영혼의 종류를 구분하는 정도인데 그마저도 큰 의미가 없어서...”

위협적이지 않은 영혼이라도 몸에 닿을 때마다 피해를 누적시킨다.

메르세데스가 직접 체험했다.

영혼에 담긴 원한 등의 감정들이 자신을 차츰 잠식해나가던 감각이 지금도 생생히 떠올랐다.

두 번 다신 겪고 싶지 않은 허무가 그곳에 있었다.

저 붉은 살덩이를 상대로 장기전을 도모하기 위해선 놈이 쏘는 영혼을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아야한다는 전제가 붙는 것이다.

100개의 갓 핸드를 운용하는 그리드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덩이에 붙들린 영혼의 숫자는 무량대수였으니까.

놈이 그중 일부만 동시에 발사해도 필중의 묘리가 담겼다.

그리드와 사도들은 물론이고 결사들과 템빨단원까지 전원 집결해야 거기에 저항할 희망이 생겼다.

영혼을 대신 맞아줄 방패가 하나라도 더 있어야 그리드가 자유로워졌다.

“음... 저것에 약점은 있나?”

“핵이 되는 영혼이 약점이예요.”

흑화 그리드에게도 영혼이 생긴 마당이다.

붉은 살덩이에게도 당연히 영혼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강제로 붙들린 영혼들과 차별화되는 살덩이의 근간이었다.

하지만 위치를 실시간으로 바꾸고 다른 영혼과 융합되길 반복하며 흔적을 지우는 탓에 혜안으로도 감시하기가 힘들었다.

[흑화 그리드를 해치웠습니다.]

[타인이 펼친 5융합 검무가 당신에게 어떤 영감을 줍니다...]

[검무 창조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

...

..

마침 흑화 그리드가 죽었다.

소멸은 아니다.

육신이 지워지고 새카만 영혼이 남았다.

재차 살덩이에 흡수되었는데, 저항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기에 안타까웠다.

투둑, 투두둑.

흑화 그리드의 육신과 무기를 이뤘던 살덩이의 파편들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꿈틀꿈틀 움직여 서로에게 이끌리는 모양새가 슬라임의 재생 과정과 닮아있었다.

““저건...?””

검성의 영혼을 이식 받았다고 믿어온 악마.

그는 그리드가 난입한 이후 내내 넋 나간 얼굴로 있었다.

급기야 그리드가 6융합 검무를 썼을 때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한데 불쑥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살덩이들을 삿대질로 가리키면서다.

““검성...! 검성이오!””

언제부터 검성이 개나 소의 이름이 됐을까.

비반과 크라우젤이 퍽이나 불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에 있을 뮐러도 마찬가지겠...

‘...아니, 뮐러가 죽은 게 맞나?’

그리드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이쯤 되면 뮐러는 살아있다고 믿어야 옳지 않나 싶었다.

크레이슐러의 말에 따르면, 뮐러가 죽음을 원했던 이유는 ‘안식’을 바라서였으니까.

한데 정작 죽음은 안식이 아니었다.

바알에 의해 변질 된 지옥이 영혼들의 윤회를 막고 있었다.

뮐러가 그 사실을 몰랐을까?

그럴 리 없다.

민간은 모르는 신화 포식자를 구원하는 동아줄이 되어줬던 인물이 죽음의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몰랐다면 그게 도리어 이치에 어긋났다.

뮐러는 어느 시점부터 깨달았을 것이다.

죽어봤자 살아있는 것보다 못하단 사실을.

기억을 잃은 채 천상에 올라 신들의 병졸로 전락하느냐, 기억을 유지한 채 지옥에 떨어져 영겁의 고통을 받느냐.

죽음 끝에 도사리는 선택이 그뿐이란 사실을 알고도 과연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뮐러의 기록들은 상당수가 소실 됐지만, 결국 뮐러는 잊히지 않았어.’

먼 과거의 뮐러가 죽음을 준비했던 건 진실이다.

그와 관련 된 기록들이 대거 지워졌음이 증거다.

하지만 정작 뮐러는 잊히지 않았다.

이는 뮐러가 어느 시점부터 죽음을 거부했다는 증거가 됐다.

물론 아직까진 추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살덩이가 빚고 있는 저 새로운 육신의 주인이 뮐러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뮐러는 고작 저딴 과정으로 세간에 모습을 드러낼 만큼 값싼 존재가 아니니까.

““거, 검성...! 뮐러!?””

악마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연신 호들갑을 떨어댔다.

무게감 있는 외모와 달리 꽤나 방정맞은 놈이었다.

파지직!

혀를 내두르는 그리드의 눈동자가 백열했다.

전광이 맺힌 느낌.

얼핏 메르세데스의 혜안과 닮은 듯했지만 전혀 달랐다.

신비로움과는 거리가 멀고 대단히 위압적이었다.

<템빨신의 관조>다.

대상 아이템을 확인 시 해당 아이템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하며 능력치와 옵션을 확인하고 복제할 수 있다.

단, 아이템을 복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제작한 아이템을 재료로 사용해야 한다.

또한 복제 대상 아이템과 재료로 쓰는 아이템의 등급 차이가 1등급 이내여야 하며 재료로 사용한 아이템은 복구되지 않는다.

등등.

얼핏 봤을 땐 기존 파그마의 눈이 사실상 이름만 바뀐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금은 효과가 강화됐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 대폭 줄고 적용 대상이 보다 광범위해졌다.

스킬 이름에 무려 신의 이름이 들어갔으니 진화는 필연이다.

[대상 관조에 실패하였습니다.]

‘역시 안 되나.’

살덩이의 파편이 무기를 빚었던 점에 착안했다.

살덩이 자체를 관조할 순 없을까 시도했는데, 거저먹으려는 심보였는지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드가 아쉬워하는 순간이었다.

[대상 관조에 성공하였습니다.]

살덩이가 인간의 형상을 완전히 갖췄을 무렵.

그가 무장하고 있는 갑옷과 검의 정보는 템빨신의 관조에 낱낱이 파헤쳐졌다.

<엘더의 펄션>과 <엘더의 갑옷>.

매우 뛰어난 성능의 레전드리 아이템이었다.

그리드가 직접 만든 것보단 다소 못하고 보스 드롭 아이템보단 훨씬 나은 수준.

그리드가 봤을 땐 성능 자체에 큰 감흥이 없었지만 문제는 아이템 설명에 있었다.

검성 시해자가 사용하던 검과 갑옷이라는 설명.

‘검성 시해자?’

...검성은 사실 동네북인가.

검성 중에서도 역대 최강이었다는 뮐러와 그의 스승인 비반, 그리고 그리드도 선망하는 천재 크라우젤 정도만 특별할 뿐.

사실 검성도 보통의 전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생각하는 그리드에게 엘더가 쇄도해왔다.

상체를 크게 기울이며 쏘는 검격이 무지막지하게 쾌속했다.

그리드의 눈 밑으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인공 감각으로 검로를 읽음과 동시에 베인 느낌.

만약 그리드가 엘더의 검의 정보를 미리 숙지하지 못했다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공격 시 ‘늘어난다.’는 정보 말이다.

푸화하학!!

엘더의 얼굴이 꿰뚫렸다.

무기의 기능을 믿고 거리가 충분히 닿지 않은 시점부터 상체를 기울인 허점을 공략 당했다.

순보로 전진해온 그리드의 살(殺)을 허용하고 말았다.

좁혀진 거리는 엘더의 길게 늘어난 검을 도리어 약점으로 만들었다.

충분히 전진하지 못하고 검면의 하단부만 간신히 그리드의 눈가를 스쳤을 뿐이다.

‘불사.’

엘더는 얼굴이 반파되고도 죽지 않았다.

불사로 얻은 유예다.

오래 전 시대의 전설이라는 증거였다.

붉은 살덩이가 그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휘리릭!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비틀비틀, 살아남아 검을 회수하는 엘더의 동작 자체가 위협적인 검술로 작용했다. 그리드의 옆구리를 스쳤다.

하지만 위력이 다소 부족했다. 드래곤 아머를 꿰뚫기엔 불충분했다.

그리드의 커다란 손이 엘더의 안면을 덮고 있었다.

꽈아아앙!!

엘더가 뒤통수부터 지면에 처박혔다.

놈의 단전을 무릎으로 짓눌러 완전히 제압한 그리드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붉은 살덩이를 노려봤다.

100개의 갓 핸드 중 일부가 엘더의 사지를 구속하고 있었다.

꿈틀꿈틀 발버둥 치던 엘더는 정확히 5초가 지난 후 참수 당했다.

단순한 전설로는 템빨신을 전혀 감당할 수 없었다.

하물며 상향평준화 된 시대에서 잊힌 먼 과거의 전설들은.

““어...? 어어?””

엘더의 검기를 읽고 검성이라고 믿었던 악마가 이젠 완전히 백치처럼 굴었다.

그리드의 압도적인 무력이 그에겐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어렴풋이 들어온 템빨신의 신화를 떠올려도 그랬다.

‘고작 몇 년 전에 신이 된 자가 저 정도라고?’

조금 전.

100개의 흑금색 손이 일제히 검술을 구사하던 장관이 악마의 머릿속에 다시금 재생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리드에게 경외심을 품어갔고 그의 심경 또한 템빨신의 20번째 서사시에 기록됐다.

“일단 물러나자. 다른 동료들과 합류해야겠어.”

살덩이로부터 시선을 뗀 그리드가 메르세데스를 재촉했다.

간신히 인내하면서다.

그의 마음 같아서야 당장 살덩이와 총력전을 벌이고 싶었다.

애초에 살덩이를 죽여야 지상에 투영되는 지옥 달을 없앨 수 있는 상황이다.

당연히 싸워야하고 당연히 없애야 할 놈이었다.

최대한 빨리 저놈을 없애 이 순간에도 고통 받고 있을 아이린과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게 그리드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혼자선 승산이 적다.

6융합 검무 하나를 소모한 것도 문제였다.

조금 차분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네.”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로 차갑게 식은 그리드의 모습을 오래간만에 목도한 그녀의 심장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콩닥콩닥 뛰었다.

‘둘 다 정신이 나갔군?’

예민한 감각으로 핑크빛 기류를 읽은 악마가 혀를 내두르는 사이에 엘더의 영혼을 회수한 붉은 살덩이가 재차 다른 인간의 모습을 빚고 있었다.

이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외치듯, 수천 개의 영혼을 폭우처럼 흩뿌리면서였다.

갓 핸드들이 회를 조합한 검무로 막았다.

스킬이 쿨타임에 걸리자 똘똘 뭉쳐 장벽을 세우기도 했다.

그조차도 꿰뚫리면 마지막 수단으로 태극권을 펼쳤는데, 영혼의 성질에 따라 효용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개 호전적인 성격의 영혼들이 부드러움에 제압당했다.

영혼은 물리적인 성질이 아닌 영적인 개념임에도 그랬다.

갓 핸드 자체가 그리드를 닮아 신성을 둘러쳤으니까.

그것이 어떤 개념이든 간섭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 무협 영화에서 출연 제의가 올 수도?’

Satisfy의 기술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수준을 넘어서 현실의 기술을 Satisfy에서 구현하기 시작한 그리드.

그를 두고 어떤 논란이 생기진 않았다.

이미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그와 같은 변화를 보여 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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