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8권 - 15화
원치 않게 태어났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지도 못했다.
폭력과 악의로 점철 된 지옥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간신히 지상에 도달하였을 때,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사회, 문화, 자연, 그리고 애정 따위들.
지옥에는 없던 것들이.
그는 배운 적도, 겪어본 적도 없었던 충만한 개념들이 지상에는 넘쳐흐르고 있었기에.
억울했다.
저절로 분노가 끓어오르며 폭주하고 말았다.
그 끝에 살해당했다.
허무에서 피어오른 오물의 최후였다.
두 번 다신 겪고 싶지 않은 삶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잔혹했다.
그에게도 영혼이라는 게 존재했고, 그 탓에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게 됐다.
재차 지옥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급기야 붉은 살덩이에게 삼켜졌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거리였던 자의마저 상실한 채, ‘나’가 아닌 살덩이의 일부로 전락한 그는 더 큰 원한과 분노를 키워갔다.
바로 그때 인마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지상의 달에 투영 된 살덩이의 시선 중 하나가 된 그는, 그리드의 삶을 관찰하게 되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완벽한 삶.
그리드가 부러웠다.
[네 삶을, 빼앗겠다.]
흑화 그리드가 펼친 금의 성역은 붉었다.
금속보단 굳은 핏물로 세운 듯한 협곡이 우후죽순으로 펼쳐졌다.
올곧은 길이 없었다.
혈관처럼 뻗어나간 수백수천 갈래의 길들은 하나 같이 위태로운 비탈길이었다. 그마저도 절대다수가 도중에 끊겼으며 어떤 것은 협곡의 벽면에 가로막혀 있었다.
좌우로 솟구친 협곡 사이를 관통하는 대로가 존재하는 그리드의 성역과는 달랐다.
확고한 신념을 지닌 그리드는 자신이 나아갈 길을 아는 반면 흑화 그리드는 혼돈을 헤매는 중이었다.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다.
“저... 불량배가.”
한 사람이 똑바로 서기도 비좁은 길 위.
그리드를 등지고 선 메르세데스가 조신하게 말했다.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던 기세를 보아 욕설이라도 토할 줄 알았는데, 어느새 호흡마저 차분하게 가라앉힌 상태다.
간신히 인내한 것이다.
감히 주군의 심상과 신격을 따라해 더럽힌 걸로 모자라 주군의 삶을 빼앗겠다고?
흑화 그리드의 흉악망측한 선언에 귀가 썩을 것만 같았던 그녀는 놈에게 쓰레기라는 욕설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곁에 그리드가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되도록 그리드 앞에선 정순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기에 참았다...
‘귀엽네.’
혼자 부들부들 거리는 메르세데스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던 그리드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그는 이성과 관련해서도 눈치가 백단에 가까웠다.
놀이기구 앞에서 눈을 반짝이면서도 겉으론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유라의 모습을 겪어보았기에 메르세데스의 내숭을 간파할 수 있었다.
투두둑...
그리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가벼운 걸음에 담긴 무게조차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비탈길 위에 태연히 서는 모습이 담대해 보인다.
“애썼다.”
“...?”
[...?]
메르세데스는 물론이고 흑화 그리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드가 치하하는 대상이 흑화 그리드였으니까.
잠시간의 정적 속에서, 그리드는 메르세데스의 보고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았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전음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온 정보다.
우선 저 붉은 살덩이가 지옥 달의 본체다.
어떤 주술로 인해 달에 투영되며, 이때 살덩이에 붙들린 영혼들이 지상 전역을 살피는 눈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혼들이 생전의 기억을 쫓으려하는 본능을 이용한 듯하다.
지옥 달이라는 게 처음부터 저런 모습이었던 건지, 언젠가부터 저것이 지옥 달의 역할을 빼앗은 건지까진 아직 알 수 없다.
또한 살덩이에 붙들린 영혼의 종류엔 일관성이 없었다.
자의식이 약한 갓난아이부터 역사상 유명한 위인에 이르기까지, 막말로 온갖 인간군상의 영혼들이 살덩이에 붙들려 있었다.
어째서 강력한 존재들의 영혼을 선별하지 않고 불특정 다수의 영혼을 이용하는가?
추측하기 쉬웠다.
단순하게는 더 다양한 곳을 살필 수 있는 ‘눈’을 얻기 위해서이고, 조금 더 심도 깊게 생각해보자면 신격을 쌓기 위함일 터였다.
살덩이로부터 분리 된 흑화 그리드가 신격을 보유한 이유는 저 영혼들의 숭배를 받아서일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흑화 그리드가 단순히 그리드로부터 파생 된 존재이기 때문에 신격을 쌓았다고 보기엔 신격이라는 개념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그리드는 알 수 있었다.
흑화 그리드가 나름대로 노력해왔다는 사실을.
“너는... 나를 관찰하면서 나를 닮기 위해 노력했겠지. 다른 모든 영혼들이 그런 너의 모습을 목격했기에 숭배 받은 거고.”
영혼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이라는 건 뭘까.
정신적 수양?
나를 가상의 적으로 삼고 섀도 복싱이라도 반복 했으려나.
아무튼 보통 노력이 아니었으니 급기야 다른 영혼들의 희망이 되고 귀감이 되어 숭배 받았겠지.
나를 닮았으면 그럴 만도 해.
묘한 뿌듯함을 느끼는 그리드에게 흑화 그리드가 으르렁거렸다.
[헛소리, 마라.]
정작 흑화 그리드는 본인의 상태를 모르는 듯했다.
그가 신격의 본질을 알 리 없으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 그리드로부터 비롯된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꼴이다.
“씁쓸한 일이군.”
스륵.
그리드가 검을 뽑았다.
흑화 그리드가 등지고 있는 거대하고 붉은 살덩이를 노려보면서다.
‘그 안에 몇 명의 신이 담겼지?’
저것의 파편이 흑화 그리드의 육체를 빚은 이유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흑화 그리드를 평소부터 유심히 지켜보다가 어떤 의도를 갖고 기회를 준 게 아니라, 단순히 상황에 어울리는 패를 꺼내 쓴 느낌에 가까울 터였다.
지독히 무심한 살덩이의 심상을 느끼면서 추측해본 그리드가 <아이템 합체>를 전개했다.
흑화 그리드가 즉시 반응했다.
살덩이의 파편으로 빚은 검들.
그리드의 신검들과 꼭 닮은 모양인 그것들을 하나씩 합쳐갔다.
기괴했다.
검에서 튀어나온 핏줄 다발이 서로 얽히고설킨 끝에 꿈틀꿈틀 하나가 되어가는 광경은.
[비웃, 어라.]
본인도 이건 하찮은 흉내에 불과하다는 자각이 있는 걸까.
흑화 그리드의 안색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수치심을 견디기 힘든 것처럼.
하지만 이내 눈빛을 칼날처럼 벼렸다.
매서운 기세와 달리 칼자루를 쥔 손은 느슨해진다.
어깨에 힘을 빼고 고즈넉하게 서는 자세가 언제라도 검무를 펼치기 좋아 보였다.
그리드는 그에게 어떤 혐오를 느끼지 못했다.
과거에 마주했을 때는 나를 꼭 닮은 모습에 불쾌했었고, 나를 원망하는 모습에 동정하는 한편 혐오감을 느꼈었지만.
이젠 그냥 가엾다.
어떤 형태로든 신이 됐다는 사실에 조금 기특하기도 했다.
“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옥을 정화해주마.”
윤회하지 못하고 지옥에 묶인 영혼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비단 파그마와 알렉스 뿐만 아니라 그리드가 직간접적으로 아는 인물들 대다수가 흑화 그리드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여태껏 그리드와 함께 싸워온 병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저 살덩이나 윤회의 강에 붙들린 채 절규하는 중이다.
흑화 그리드의 존재가 그 참혹한 현실을 실감시키고 있었다.
“천(天).”
그리드가 스스로를 하늘이라고 선언했다.
뒤로 쏜 브레스를 타고 질주하여 흑화 그리드의 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템빨신의 희생을 그리는 위(爲)의 검무를 선두로 삼은 것이다.
최근에야 익힌 검무이므로 흑화 그리드에겐 낯설었다.
갑자기 휘청거린다 싶더니 불쑥 접근해 있는 그리드를 보고 깜짝 놀라며 응수했다.
자신 역시 천의 검무를 펼쳐보였는데, 극(極)을 위시했다.
스스로 거리를 내어준 그리드를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심산으로 힘껏 검을 내리꽂았다.
하지만 그의 검은 그리드에게 파고들지 못했다.
비장함에 압도되어 주춤거리더니 급기야 도리어 뒤로 밀려났다.
필중의 검무인 극이 캐스팅 단계부터 취소 된 것이다.
콰드드득!!
그리드가 승천했다.
흑화 그리드의 명치에 맞대고 있던 어깨를 앞으로 밀쳐냄과 동시에 반대편 손에 쥔 검을 아래서부터 위로 휘둘렀다.
자체적으로 신격을 생산해대는 붉은 살덩이조차 복제할 수 없는 드래곤 웨폰의 거력이 용(龍)의 검무와 맞물려 흑화 그리드의 새카만 기운을 잠식해갔다.
이내 베어냈다.
[...!!]
흑화 그리드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끝에 잘려나간 감각.
신격이 훼손될 때 느끼는 고통이다.
그리드는 늘 감수해왔다.
템빨신이 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번 넝마가 되어가며 싸웠던 그에게 편했던 순간은 적다.
남들이 봤을 땐 쉽게 찾아왔던 행운들조차 그런 고통들을 감수했기에 거머쥘 수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드만이 흑화 그리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붉은 살덩이가 붙들고 있는 무량대수의 영혼들 전부가 흑화 그리드의 영혼처럼 발전해왔을까?
아니라고 단언하다.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이 녀석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
“나중에 승천시켜줄 테니, 그때까진 죽어 있어.”
[놈...!!]
쿠르르르릉!!
협곡이 녹아내렸다.
홍수를 이룬 핏물이 수백수천 자루의 병기로 모습을 바꿔갔다.
모조리 그리드를 노리고 쏘아졌다.
흑화 그리드와 실시간으로 검격을 교환 중인 그리드의 무방비한 후위를 노렸다.
물론 그리드는 전 방위로 인공감각을 펼쳐놓은 상태였다.
자신을 중심에 두고 공전하는 갓 핸드들의 손을 이용해서 은사의 입자를 실시간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병기들의 기척을 느꼈다.
형태와 궤도, 거기에 실린 의도까지 파악했다.
흑화 그리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더 득달같이 검을 휘둘러댔다.
회(回)의 검무를 최대한 융합해서 펼치며 시간을 끌었다. 그리드가 자신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그리드의 갓 핸드가 총 30개라는 사실을 계산하면서다.
금의 성역으로도 구현할 수 없는 신물.
그것들이 종횡무진 날뛸지언정 그 수십 배에 해당하는 병기의 폭우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큰 타격을 입히거나 무구의 비를 소모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그렇다.
흑화 그리드는 소모전을 유도하고 있었다.
바로 등 뒤에 저 붉은 살덩이가 있는 이상 자신의 체력은 무한하다는 점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었다.
촤르르르륵!!
[...!?]
탐욕은 무한히 증식한다.
그리드가 늘 상공에 띄워놓고 다니는 탐욕의 질량은 비행정을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여서, 고도에 따라 자칫 검은 태양으로 보이게 됐을 정도다.
하지만 비행정을 만들기 위해선 라드볼프 형제의 도움을 받는 편이 좋았다. 장기 프로젝트로 구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여 그리드는 탐욕의 여유분을 다른 방식으로 소모했다.
70개의 갓 핸드를 추가로 생산했다.
이제 그의 등 뒤로 떠오르는 갓 핸드는 인공 감각을 펼치고 있는 갓 핸드들을 포함해 총 100개다.
그것들이 동시에 선회하며 회의 검무를 펼치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초월자나 절대자와는 다른, ‘지배자’의 권능을 보는 듯했다.
압도적이었다.
[군, 림...]
푸푹! 푸푸푸푸푸푸푸푸푸푹!!
부릅뜬 눈으로 감상을 읊는 흑화 그리드의 몸에 수천 자루의 병장기가 꽂혀들었다.
자신의 심상으로 빚은 무기에 스스로 꿰뚫려 고슴도치가 되어가는 광경은 그의 정신세계가 굉장히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쓰러지지 않는다.
흑화 그리드의 근원은 그리드니까.
끈기로 버텨내는 것이다.
창칼에 꿰뚫린 몸으로 5융합 검무를 펼치기 시작하는 그의 동작을, 그리드가 고스란히 답습하며 말했다.
“언젠간 ‘너’로 다시 시작해라.”
[닥...쳐라! 나는...! 네가 될...!]
똑같다.
똑같은 검무로 맞붙는다면 놈도 성치 못하다.
회복력에서 우위에 있는 내게 기회가 올 것이다.
그리드의 보폭과 검로가 자신의 것과 똑같단 사실을 눈치 챈 흑화 그리드가 희망을 품고서 검무를 완성시킨 순간이었다.
저벅.
그리드가 반 보 더 걸었다.
[...!]
꽈르르르르르르르릉!!
흑화 그리드의 5융합 검무를 집어삼킨 그리드의 6융합 검무가 새카만 신격을, 붉은 협곡을 반으로 갈랐다.
노을빛 신성이 세계를 물들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