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8권 - 14화
흑기사 엘리고스의 서열이 20위인 이유는 하나다.
20번째 지옥 즉, 개의 아가리를 지킬 자격은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 외의 악마가 개의 아가리를 관리할 경우를 염려했다.
지옥과 지상을 잇는 출입구가 하찮은 변덕으로 열리고 닫혀 지옥이 싸구려 장터 따위로 변질 될 거란 걱정을 품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고, 상승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켈베로스와 함께 단지 제자리를 지켜왔다.
왜 굳이 그런 수고를 했는가?
엘리고스는 의외로 지옥예찬론자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자신이라는 위대한 존재의 근원이니까.
몹시 강력한 자부심을 지닌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시점부터 그리드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궤도를 장악하는 권능.
적의 수법을 모조리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무위를 절대적인 법칙으로 실천시키는 엘리고스의 권능은 상리를 벗어났다.
타고난 재능만큼은 지옥 전체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특출했기에 강력했다.
심지어 바알과 아모락트조차도 그를 존중할 정도였다.
엘리고스 본인도 자신의 적수가 드물다고 여겨왔다.
바알과 아모락트, 레라지에처럼 패배를 모르는 존재들과 일부 미지의 존재들을 제외하면 자신 역시 무적에 가깝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오늘 마주한 그리드야말로 무적이라는 말에 더 어울린다는 감상을 품고 말았다.
용의 비늘을 갑주 삼아 두른 놈은 쉽게 베이질 않았다. 간신히 베어봤자 금세 다시 회복하길 반복하며 엘리고스를 역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말이다.
엘리고스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100개의 흑금색 손이 그리드를 근원으로 삼았음을 엿봤다.
결코 훼손되지 않는 금속.
제압하고 구속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굽히거나 부러뜨릴 수 없는, 세계에서 가장 굴강한 물질.
그렇다.
엘리고스의 눈엔 그리드가 생물이 아닌 금속으로 보였다.
대적하기에는 허망한 구석이 있었다.
무위의 고하가 문제가 아니라, 저런 것하고 싸우는 일 자체가 손해란 의식이 점차로 강해지던 차였다.
이때 그리드가 승부를 서두르는 눈치였으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굳이 싸울 필요가 있느냔 의문이 그의 뇌리에 영감처럼 번진 상태였다.
“...계약을 맺자고?”
“그래.”
보통 악마와의 계약이라고 하면 영혼을 바쳐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실제론 전혀 달랐다.
유라와 붉은 악마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악마의 계약은 약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도리어 더 일반적이었다.
보통 악마가 인간에게 계약을 제안하는 경우는 자신이 아쉬운 입장에 놓였을 때니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자존심까지 버리고 계약을 제안한 마당에 무슨 염치로 영혼을 요구하겠는가?
악마와 계약하려면 영혼을 바쳐야한다는 소문은 대개 능력 없는 흑마법사들이 퍼뜨린 일종의 편견이었다.
“급한 상황이라는 건, 아마도 저 달과 관련이 있겠지.”
그리드는 자신의 사도들과 실시간으로 교감하고 있다.
하물며 메르세데스는 그리드의 기사이자 연인이었고, 가족이었다.
지옥이라는 환경과 먼 거리가 교감에 훼방을 놓고 있다지만 어렴풋이나마 그녀가 처한 상황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것과 같은 이치였다.
지옥을 지배하는 군주 중 하나인 엘리고스는 지금 이 순간 지옥 어딘가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을 희미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입장을 헤아렸다.
“네가 물러날 생각이라면 순순히 보내주겠다. 네가 내 약조를 신뢰할 수 있게끔 계약하자는 거고. 계약의 내용은 단순해. 네가 내 영토에 위해를 끼칠 의도를 품지 않는 이상 나는 너를 해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덤으로 네가 원하는 장소까지 단숨에 날려주지.”
“나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인데?”
그리드의 경계심이 한층 더 짙어졌다.
자칫 호의로도 해석할 수 있는 계약의 내용이 영 수상했던 것이다.
그에게 엘리고스가 솔직하게 말했다.
“네가 두렵다.”
“...?”
“...고, 켈베로스가 신음하는 것이 가여워서 말이지.”
끼잉, 끼이잉...
몸집의 크기만 놓고 보면 거의 드래곤처럼 거대한 켈베로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3개의 대가리를 돌려 엘리고스를 바라보는 눈빛에 원망이 가득 담겼다.
마치 헛소리 좀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준 엘리고스가 재촉했다.
“이쯤하면 납득할 수 있지 않나? 바쁘다면서 언제까지 망설일 참이지?”
“그래, 제안을 받아들이마.”
그리드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눈앞에 떠오른 <엘리고스와의 계약> 내용에 아무런 문제점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선택이다.”
엘리고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템빨신의 서사시에 기록되는 중이었다.
영겁의 세월 동안 지옥의 입구를 지켜온 신화 속의 괴수 켈베로스가 템빨신의 위용에 겁을 먹고 물러났다...
상황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이상 믿지 못할 파격적인 구절이 20번째 서사시에 추가됐다.
***
채챙! 채채채챙!!
흑화 그리드와 검격을 교환할수록 극적제승의 검기가 꺼질 듯이 흔들렸다.
흩날리는 검기의 잔재가 재차 결집하지 못하고 소멸하길 반복하자 수십 미터까지 솟구쳤던 검기가 어느새 백호검의 규격을 간신히 커버하는 수준으로 작아졌다.
연속되는 전투를 치른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강적까지 등장하자 메르세데스의 체력에 금방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현명하지, 못했다.]
흑화 그리드가 메르세데스를 질책하듯이 말했다.
마치 걱정해주는 듯했다.
물론 그럴 리 없다.
흑화 그리드의 검을 흘려내면서, 메르세데스는 의문에 휩싸였다.
‘맞아. 현명하지 못했어.’
메르세데스의 본래 목적은 지옥 달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일단 어디에 있는지만 찾아내고 그리드에게 보고를 해야 옳았다.
이후 달을 처리하는 건 그리드와 사도들이 모두 합류한 후에 진행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달의 위치를 찾아낸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굳이 지하까지 내려왔고 끝내 저 살덩이를 직접 없애려고 했다.
지하까지 내려왔을 때까진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메르세데스는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저것의 끔찍한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으니까.
메르세데스는 그리드와 사도들을 이곳에 데려오기에 앞서 저것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성을 느꼈다.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메르세데스는 언젠가부터 저것에 집착하고 말았다.
저 붉은 살덩이를 자신이 지금 당장 없애야 한다는 초조함에 휩싸였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평정을 잃은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서워... 슬퍼... 살려줘... 아파... 추워... 구해줘...
살덩이가 쏘는 영혼 세례는 쉽게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하지가 않았다.
워낙 빠른데다가 동시에 쇄도하는 숫자가 수십 수백이었으니까.
메르세데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위험한 영혼과 위험하지 않은 영혼을 판별해서 이중 위험한 영혼의 공격만을 피하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영혼들.
공격성은 없고 단순히 원한만 품은 영혼들은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분명히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 최선이 문제였다.
메르세데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혼들의 영향을 받아갔다.
원혼들의 고통과 분노, 슬픔을 자신의 영혼에 새기며 지옥과 저 살덩이에게 원한을 키워갔다.
반드시 없애고 말겠다는 살심을 품게 된 계기다.
촤아아악!!
흑화 그리드와 살덩이의 협공은 몹시 위협적이었다.
그리드가 직접 만들고 입혀준 갑옷 곳곳이 찢겨나가길 반복했다.
갑옷 틈새로 드러나는 살결은 희지 않고 붉었다.
어느새 피범벅이 된 메르세데스는 자신의 처지보다 그리드를 걱정하고 있었다.
‘주군, 이것은. 위험해요.’
쇄도해오는 영혼의 형태를 구분하는 정도로 공략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살덩이가 쏘는 영혼 세례는 형태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똑같이 위협적이었다. 전투 내내 피해는 누적될 수밖에 없으며, 그리드와 사도들이라도 저항하기 힘든 정신적 타격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살덩이를 베면 벨수록 적이 늘어난다.
살덩이는 제 몸에서 떨어져나간 살로 자신이 흡수한 영혼의 주인을 빚는 게 가능했다.
...가만, 영혼의 주인?
까아아앙!!
흑화 그리드의 검격을 막아내고 시선을 교환하는 메르세데스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차갑게만 보였던 흑화 그리드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다.
[도망, 쳤어야지.]
“...!”
흑화 그리드는 그리드의 부산물이다.
흑화 상태였던 그리드의 분신이 소멸하지 않고 지옥을 배회했던 흔적에 불과했다.
하지만 녀석은 점차 이지를 갖췄었다.
지옥을 배회하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자신을 누군가의 부산물이 아닌 ‘나’로 인식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때부터 영혼이 깃들었단 말인가.
깨닫고 경악하는 메르세데스의 복부를 무릎으로 올려 찬 흑화 그리드가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팔로 둘렀다. 그대로 목을 꽉 조이며 속삭였다.
[메르세데스. 달의 눈을 통해서, 너를 보았다.]
그리드에게 살해당하고 다시 지옥에 떨어졌던 흑화 그리드의 영혼.
그는 저 살덩이에게 영혼이 붙들린 채 종종 지상을 엿봤다.
지옥 달이 지상에 떠오른 날마다, 자신의 근원이 되는 본체의 삶을 주시했다.
놈이 무엇을 증오하고 무엇을 사랑하는지.
늘 질투하면서도 때때로 공감하며 지켜봤다.
[사랑, 한다.]
오싹...!
[이렇게 된 이상, 너는 내 것이다.]
메르세데스는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거대한 뱀처럼 자신의 목을 조여 오는 흑화 그리드의 뒤틀린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흑화 그리드의 집착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영원, 히.]
죽어라.
죽어...! 죽어!!
네 영혼 또한 영원토록 저것에 갇힌 채 나와 함께하는 거다...!
광기에 물든 흑화 그리드의 외침이 점차 아득해질 무렵이었다.
““네놈은?””
검성의 영혼을 이식 받았다고 믿어온 악마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긴 세월을 살아온 만큼 어지간한 일엔 놀라지도 않을 텐데 경악하는 반응이 기이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점차 의식을 잃어가던 메르세데스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숨통이 트이며 진득한 지옥의 공기가 그녀의 폐부로 흘러들어왔다.
번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낙법을 취했다.
상처가 무색하게도 나비처럼 우아하게 지상에 착지했다.
그리고 보았다.
두 명의 그리드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수고했어, 메르.”
메르세데스를 등진 채 말하는 그리드의 호흡이 다소 거칠었다.
상당히 지쳤다는 반증.
반면 흑화 그리드의 일그러진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붉은 살덩이가 놈에게 더 많은 영혼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리드. 네 삶을, 엿봤다.]
후욱-
앞서 메르세데스에게 베였던 살덩이의 파편 중 일부가 흑화 그리드의 손으로 날아와 잡혔다. 그리고 빠르게 검과 갑옷의 형상을 갖춰갔다.
현재 그리드가 무장하고 있는 장비를 고스란히 빼닮은 형태였다.
[네가 강해질수록, 나 또한 강해졌다.]
흑화 그리드를 중심으로 검은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다.
얼핏 마기를 닮았지만, 아니다.
““신격...!””
목격자들의 경악성이 울리는 가운데.
[네 삶을 빼앗을 자격이, 내게는 있다.]
금의 성역이 열렸다.
열기가 아닌 한기가, 위엄이 아닌 절망이 감도는 협곡.
흑화 그리드의 심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