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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72화 (1,570/1,794)

템빨 78권 - 11화

보통의 사람은 혜안을 모른다.

메르세데스의 푸른 눈동자가 간혹 투명하게 반짝일 때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단 아름답다는 감상을 품을 뿐이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착시쯤으로 여기면서다.

그러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좁고 긴 땅굴에 빼곡히 들어찬 검기의 숲.

숲의 음영이 드리운 공간에서 솟구치는 그림자 병사들.

어지럽게 나부끼며 시야와 공간을 협소하게 만드는 금속의 천.

악마의 춤사위로 보이지 않는 고고한 검무와 소리 없이 쏘아지는 화살 등등.

인류의 전설들을 상징하는 기술들을 모조리 회피하고 반격해낸 메르세데스의 실력을 섣불리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순보를 쓰지 않고 물 흐르듯 움직이는 그녀의 회피 동작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조금 전 드래곤과 싸울 때 하야테의 움직임은 빛이 번쩍이는 정도로 인식됐던 반면 그녀의 움직임은 사람들의 눈에도 어렴풋이 읽힐 정도였다.

한데 단 하나의 공격도 그녀의 몸에 닿지 못했다.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그녀가 전설을 넘어서는 무언가로 보였다.

그리드와 브라함처럼 신화의 주역이 됐거나 하야테처럼 절대자의 경지에 이르게 된 건 아닐까, 감히 그런 의문을 품게 될 정도였다.

놀란 건 악마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지옥 하늘뿐만 아니라 지상 하늘까지 투영되고 있는 붉은 달.

셀 수 없이 많은 눈동자를 끔뻑대는 그것의 본체가 이곳 지하에 잠들어 있다.

윤회의 강이 지옥의 본질과 관련 된 장소라면 이곳은 변질 된 지옥의 비밀을 품은 장소였다.

바알 입장에선 윤회의 강보다 중요한 곳이란 의미다.

늙은 악마들이 문지기로 종사하는 이유였다.

태초에 근접한 시대부터 살아온 그들은 무척 강력했다.

바알의 신임을 얻을 정도여서, 직접 부탁을 받고 이곳을 지키게 됐다.

대가로 영혼의 파편들을 이식 받아왔다...

세월이 흐를수록 고강해졌고 적수가 드물었다.

한데 고작 한 명의 인간이 활개를 치는 것이다.

일곱 악마가 쌓아올린 세월의 무게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노괴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있는 수천 년의 경험과 지혜를 얼굴에 주름 한 점 없는 여인이 읽어내고 차단했다.

노괴들의 눈에도 괴물로 보였다.

““인간이 맞나...? 혈통의 계보를 읊어봐라.””

““족보의 두께가 궁금하다.””

보통 인간이 아니다.

놈의 계보가 지상 따위에서 비롯됐을 리 없다.

필시 지옥이나 천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추측하는 악마들에게 메르세데스가 반문했다.

“악마도 족보를 아나요?”

근본 없는 잡것 취급하는 태도였다.

딱히 비하하는 기색이 아니라 더욱 열 받았다.

““바알이 야탄 신의 자식이라는 건... 인간들도 아는 상식일 텐데... 어찌 족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상식이 결여 된 백치인가.... 납득할 만하다. 인간의 몸으로 역천의 재능을 타고났으니... 감당 못할 수밖에...””

오래 산 악마들이기 때문일까.

유독 혈통에 집착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지옥 명가의 선조들쯤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메르세데스로서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바알은 야탄을 배신했는데 그런 패륜아를 주인으로 섬기는 악마들이 혈통을 운운하며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어차피 똑같은 패륜아들이라 족보 따위 신경도 안 쓸 거면서.”

““패륜...? 도리를 어겼다? 도리라는 건 인간들에게나 통용되는 개념...””

“도리도 모르면서 족보 운운하는 건가요.”

브라함과 후로이, 폰과 반트너 등.

그리드의 곁에는 말이 몹시 거친 인사가 많다.

하물며 라우엘, 데미안, 레가스처럼 자아가 무척 강한 사람도 많았다.

상대방을 배려하며 대화하는 습관을 들이기 힘든 것이다.

메르세데스도 영향을 받았다.

애초에 그녀는 대사하란 제국의 첫 번째 기사 출신이다.

그리드를 처음 만났을 당시 무릎을 꿇으란 명령을 서슴없이 내렸을 정도다.

말을 뱉기 전에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물론 호감을 품은 상대에겐 상냥했지만 적을 상대로는 무심하고 냉정했다.

늙은 악마들의 얼굴에 가득 찬 주름이 흉측하게 꿈틀댔다.

““지옥 출신이군.””

“...?”

갑자기?

악마들이 황당한 결론을 내리자 작은 얼굴을 기울이는 메르세데스.

영문 모르겠단 표정을 짓는 그녀의 청발이 잔잔한 물결처럼 흐트러지는 가운데 꽈아아앙!! 굉음이 폭발했다.

후방에서 소리 없이 활을 쏘던 악마가 대놓고 저격을 시도한 것이다.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기파가 담긴 화살이 여태껏 없던 속도로 쏘아져 메르세데스의 미간에 닿았다.

하지만 피부를 스칠 뿐이었다.

혜안을 재차 발동시킨 메르세데스가 회피했다.

애꿎은 벽면에 날아가 꽂힌 화살이 땅굴을 진동시켰고 푸른 검기의 숲이 해일처럼 날뛰어댔다.

제3자 입장에서 봐도 현장은 혼돈 그 자체였다.

온갖 기운과 기술이 뒤얽히며 폭발을 일으키는 통에 땅이 위아래로 솟구치길 반복했고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메르세데스가 보는 시야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어지러울 게 분명했다.

한데 정작 메르세데스는 균형을 잃지 않았다.

좌우가 나선으로 뒤틀리고 위아래가 반전되는 혼돈 속에서도 그녀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무쌍심법의 호흡이 담긴 검로를 날카롭게 운용하는 한편 거대한 방패를 벽처럼 세워 악마들의 공격을 차단했다.

그리드의 배려가 담긴 방패였다.

방패 상단을 장식하는 빗금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닌 시야 확보용이었다.

메르세데스가 방패 너머의 적을 관찰하는 용도로 활용했다.

방패 중단을 장식하는 빗금들은 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용도였다.

메르세데스의 칼이 그 빗금 사이로 튀어나와 거리를 좁혀온 악마의 복부를 관통했다.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메르세데스는 기사도를 쓸 때마다 강해지는 전설의 기사이며, 그리드가 만든 아이템을 무장할 때마다 추가로 강해지는 템빨신의 사도였으나, 기사라는 직업 자체가 본래 한계가 있었다.

공수 밸런스가 완벽한 나머지 어떤 부분에 특출한 점이 없었다.

그나마 메르세데스는 혜안을 통한 통찰로 공격력이나 방어력을 상황에 따라 추가 상승시켰으나 자신보다 기본 체급이 높은 적을 상대론 뚜렷한 강점을 보이기 힘들었다.

애초에 밸런스가 좋다는 건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압도할 때나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밸런스를 버려서라도 회심의 일격을 휘둘러야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에겐 그런 게 없었다.

모든 능력치가 균등하고 특출한 부분이 없다보니 노회한 악마들을 상대로 승기를 잡지 못했다.

다만 안정적으로 버텨낼 뿐이다.

바로 그게 그녀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만약 현재 그녀의 곁에 다른 사도나 그리드가 있었다면.

아니, 템빨단의 정예만 있었어도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가 악마들의 공세를 읽고 막아내는 동안 다른 한 명이 악마를 하나씩 제압해나갔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 혼자선 할 수 있는 일이 적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이 상태론 힘들어.’

메르세데스의 임무는 지옥 달을 파훼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현재 지상의 하늘을 지옥도로 물들이고 있는 그것의 원리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강구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한데 문턱에 걸려 넘어지기 직전이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뭔가 큰 단서를 얻을 수 있을 텐데, 힘이 부족해서 벅찼다.

결국 실력이 부족하단 의미다.

그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간극을 느꼈다.

그녀가 무신 제라툴에게 대놓고 살기를 드러냈던 이유가 뭐겠는가?

감히 그리드를 모욕한 제라툴을 자신이 벌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이 순간의 현실은 당시의 그녀가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에겐 이상을 관찰할 힘이.

즉, 그리드의 적들을 베어낼 능력이 없다.

적들의 수준이 불쑥 높아졌다.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리드의 남다른 성장속도가 세계의 수준을 덩달아 끌어올린 느낌이었다.

하기야 바알이 갑자기 수라도를 연 이유도 그리드를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가속 된 세계의 흐름에 순응하기 위해선 나 또한 덩달아 변화를 맞이할 필요가...

[당신의 사도 ‘메르세데스’가 새로운 기사도를 세웁니다.]

메르세데스의 몸에 상처가 늘어날 때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만 메르세데스의 검이 악마의 몸에 상처를 늘리지 못할 땐 변화가 생겼다.

극적이며 연속적인 변화였다.

우선, 은빛의 날개로 형상화되었던 메르세데스의 검기가 변했다.

깃털이 낱낱이 흩어지더니 칼날의 조각이 되었다.

차륜처럼 회전하며 메르세데스의 몸을, 혹은 검을 감쌌다.

몸을 감쌀 때는 적의 공격을 반사하는 공능을 발휘했고 검을 감쌀 때는 적의 방어를 파훼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메르세데스의 움직임을 보조하며 가속과 민첩성에 도움을 줬던 은익이 공격적인 진화를 이룬 것이다.

또한 메르세데스의 검술에도 변화가 생겼다.

검로에 방패가 뒤따르지 않고 새로운 검로가 추가되는 식이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적을 압박하거나 그녀의 측면을 지켰던 방패가 이제는 발판으로 활용되는 횟수가 부쩍 늘어났다.

지형지물로 활용된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방패의 위치가 쉴 틈 없이 유동적으로 바뀌며 그녀의 검로에 변칙성을 더해줬다.

방패 자체가 워낙 크고 튼튼해서 적의 동선을 차단하는 역할도 여전히 겸비했다.

““...””

악마들의 표정이 바뀌어갔다.

혜안의 성능에 상당히 놀랐을 뿐, 승기엔 변화가 없다는 점을 확인한 이후 쭉 차분했던 그들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어렸다.

메르세데스가 극적 상승을 이뤘단 증거다.

그녀는 조금 전과 달랐다.

우선 마음가짐부터가 바뀌었다.

자신이 저 문지기 악마들을 돌파해야하는 이유를 다르게 자각한 것부터가 달랐다.

당장 수행 중인 임무 때문이 아니다.

내가 저들을 베어 죽여야 하는 이유는 저들이 언젠가 주인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극적제승.”

적을 물리치고 전승한다.

메르세데스의 새로운 마음가짐이 담긴 선언이 실체적인 힘으로 구현되었다.

광채를 발하기 시작한 검이 급격히 거대해진다 싶더니 검림(劍林)을 초토화시켰다.

그대로 뻗어나가 악마들의 진영을 흐트러뜨리고 땅굴 깊숙이 꽂혀 들어갔다.

쿠르르르릉...

지하가 통째로 흔들렸다.

무너진 천장을 타고 하강하는 메르세데스의 투명한 눈동자가 차츰 붉게 물들어갔다.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붉은 구체가 그녀의 눈동자에 투영 된 여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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