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8권 - 10화
사람들은 하야테가 최강이라고 믿었다.
최근에야 불쑥 등장한 인물임에도, 심지어 어떤 활약을 선보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최강으로 인식했단 말이다.
의심 할 여지가 없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인류 역사상 유일한 절대자.
그 누가 그의 실력에 의문을 품겠는가.
비록 그리드의 열여덟 번째 서사시가 하야테를 겁에 질린 은둔자처럼 묘사한 부분이 있다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절대자의 고독과 공포를 이해하는 한편 절대자의 힘을 당연하게 기대했다.
그리드를 의지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온 그를 순수하게 환영하고 응원해주었다.
오늘날 하야테가 보여준 활약은 응원에 대한 화답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했다.
날갯짓 한 번으로 재해를 일으키는 드래곤을 상대로 용감무쌍하게 맞선 그는 끝내 사람들을 지켜냈다.
그리드와 사도들이 자리를 비운 지상에서 자신의 책임을 완수했다.
“...우와아아아아!!”
드래곤이 떠나간 자리.
고고히 선 하야테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검을 거두고 나서야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지옥 같던 전투가 끝났음을 드디어 실감했다.
갈가리 찢겨나갈 뻔했던 몸에 맺힌 핏물을 대충 닦아내며 하야테를 둘러쌌다.
헹가래라도 쳐줄 기세였다.
꽈아아아앙...
번헬리어가 떠나간 방향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폭발음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
하지만 최소 크라우젤의 귀에나 들리는 소음이었다.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 채 들떠 있었다.
그들에게 승패의 결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
하야테의 표정은 늘 그렇듯이 평온했다.
몹시 고귀한 귀족처럼 차분할 뿐이다.
하지만 속으론 매우 얼떨떨해 하고 있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독하게 싸워온 그의 입장에서 사람들의 환호는 낯선 것이었기에.
정신이 없으면서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기쁘다... 라는 표현을 써도 될 것만 같았다.
그러자 문득 어떤 바람을 품게 됐다.
지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동료들 또한 지금의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람.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오.’
이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도 된다.
비반이 자신의 정체를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녀도 화장실 청소를 떠맡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도래했다.
기왕이면 만끽해야지 않겠나.
꽈앙, 꽈아아앙...
아까보다 더 먼 곳에서 연달아 폭음이 들려왔다.
급기야 마주친 번헬리어와 네바르탄이 얽힌 채 싸우는 소리였다.
전투는 다행히 외진 곳에서 발생했다.
하야테의 계산대로였다.
용들은 죽은 신화 포식자의 마력 잔재가 떠돌고 있는 숲을 향해 본능적으로 이끌리고 있었다.
“대수림의 질풍을 토벌한 인물은 과연 그대였구려.”
하야테가 마침 지상에 내려온 마리로즈에게 말했다.
마리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쯤 감긴 눈으로 주섬주섬 양산을 주워 펼칠 뿐이었다.
지금은 깊은 밤임에도 그랬다.
그녀가 쓰는 양산이 햇볕 따위를 가리기 위한 용도가 아님을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미모를 가리는 용도였구나.
사람들이 쉽게 추측하는 가운데 마리로즈는 어둠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하야테와 크라우젤에게 일별조차 던지지 않았다.
함께 고룡의 침략을 막아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야테와 크라우젤은 그녀의 태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번헬리어와 싸우던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리로즈의 시선은 수시로 하늘의 한쪽으로 향했고 그 방향엔 그리드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그리드였다.
마치 칭찬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뭔가를 해낼 때마다 그리드를 돌아보며 방글방글 웃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리드가 걱정되는 구려.”
마리로즈가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야테가 말했다.
현장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죄다 마리로즈의 매혹에 걸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반면 흐트러짐 없던 크라우젤이 고개를 기울였다.
“걱정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연신 성숙한 표정을 짓던 것과 별개로 순수한 면이 돋보이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드에게 위해를 끼칠 것 같진 않더군요.”
크라우젤은 그리드 다음으로 많은 NPC와 호감을 쌓아온 인물이다.
전 랭킹 1위답게 대상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 언행에 변화를 주었다.
상대방에게 쉽게 호감을 얻도록 스타일을 맞춘단 의미다.
하여 평소보다 더욱 예스럽게 말했다.
도포를 걸친 모습과 잘 어울렸다.
하야테와 더불어 사극이라도 찍는 것 같았다.
마침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곡해하였소.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마리로즈가 아닌 그리드의 태도인 것을.”
“그리드의 태도가 어찌...”
“곁에 여성이 몹시 많더구려.”
“...”
“족히 10명은 거느릴 기세이던데...”
사람들이 한층 더 귀를 기울였다.
그리드의 여성 편력은 예전부터 유명했으니까.
사람들은 무려 천 년을 넘게 살아온 하야테가 그리드의 태도를 비난할 거라고 예상했다.
옛 고사들을 예로 들며 영웅일수록 미인을 조심해야 한다느니 일편단심이어야 한다느니 어른다운 조언을 해주리라 믿었다.
벌써부터 내심 통쾌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하야테가 꺼내는 말은 무척 뜻밖이었다.
“하물며 출신도 다양하지. 핏줄이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을 테니 후계 다툼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오. 큰 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부인들의 사이가 가까워지게끔 중심을 잘 잡아줄 필요가 있는데 외유가 너무 잦소.”
“...”
“물론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세상의 잘못이 크다곤 하나 마리로즈는 도리어 그리드보다 강하지 않소. 어딜 가든 늘 곁에 둬도 하등 문제가 없을 터인데 왜 굳이 방치하는 건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하야테는 무려 천 년 전 시대의 귀족이었다.
남성 한 명이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는 풍속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낄 순 있어도 비난하진 않았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가장 오픈 된 마인드를 지닌 셈이다.
‘스벌...’
‘그리드는 최악의 남자가 맞다.’
하야테가 기대와 전혀 다른 말을 하자 실망한 사람들이 질투심에 치를 떨었다.
하루아침에 무너졌던 일상이 희미하게나마 되돌아오고 있단 증거였다.
***
지상의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일상을 되찾게 된 배경엔 당연히 지옥 원정대의 활약이 있었다.
하야테와 크라우젤이 드래곤을 상대로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지옥의 상황은 실시간으로 흘러갔다.
지옥 각지에서 활동 중인 템빨단과 사도들, 그리고 결사들이 악마들의 숫자를 차츰 줄여나갔다.
절망뿐이었던 상황에 희망이 도래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진 그랬다.
‘윽.’
메르세데스가 비명을 삼켰다.
혜안으로 지옥 달의 본체가 머무는 위치를 찾아낸 그녀는 의외로 하늘이 아닌 지하로 침투했는데 엄청난 악마들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대악마나 바알의 심복들과는 다른, 보다 태초에 가까운 악마들이었다.
지옥 달과 가까워질수록, 지하 깊은 곳으로 향해갈수록 늙은 악마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백발이 성성했고 피부엔 주름이 가득했다.
생김새만 봐도 연륜이 느껴졌는데 그래서일까.
하나 같이 고강한 실력을 지녔다.
거침없이 전진하던 메르세데스의 두 다리가 어느새 완전히 멈춰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이곳은... 그 정도 격으로... 도달할 장소가... 아니다...””
도대체 얼마 만에 입을 열기에 저러는 걸까.
말할 때마다 쩍쩍 갈라지는 메마른 목소리가 소름 돋는다.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지옥 달의 정체가 셀 수 없이 많은 영혼을 지닌 생물이란 사실을 간파했을 때부터 굳었던 얼굴이 급기야 차갑게 식어갔다.
“이곳은 정확히 뭘 하는 곳이죠?”
““네게는... 들을 자격이... 없다.””
스카카카칵!!
악마들이 메마른 손을 휘저어 댈 때마다 검기가 솟구쳤다.
또렷한 검의 형체를 이뤘는데 그 색채가 녹음처럼 푸르렀다.
말 그대로 검의 숲이 피어났다.
메르세데스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투명한 눈동자가 일순 탁해지며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건?’
악마들의 영혼이 겹쳐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악마들의 몸에 다른 영혼이 깃들어 있는 느낌이다.
한데 그 영혼이 품은 기세가 누군가와 무척 흡사했다.
비반.
‘검성?’
콰르르르륵!!
무쌍검법이되 비반의 검술과는 조금 다른.
그런 검술이 악마들의 손끝에서 구현됐다.
숲을 이룬 검기가 돌풍처럼 휘몰아치며 악마들의 검로에 호응하였고 메르세데스는 선혈을 흩뿌렸다.
치치치칙!
급소를 파고드는 검기를 쳐내는 메르세데스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방패의 밑면을 바닥에 꽂아 간신히 멈춰 선 그녀가 악마들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리드가 정성껏 만들어준 갑옷이 엉망이 됐음을 자각하면서다.
왼쪽 어깨 부근의 흑색 음각이 지워졌다는 사실이 그녀를 분노케 만들었다.
그리드의 이니셜이 지워졌으니까.
“전설들의 영혼을 이식하는 실험이라도 해왔나 보군요.”
몬스터들의 피로 붉게 물든 카오스 산맥의 절경을 바라보며 잠들었던 ‘그날’.
메르세데스는 그리드의 품에 안긴 채 어떤 이야기를 들었었다.
번헨 열도 일화.
필시 대단한 무용담이었지만 그리드의 표정은 어두웠다.
바알과 계약했던 시절의 파그마가 전대 전설들의 영혼을 이용해 데스 나이트를 만들었다는 점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계약자들의 경험을 토대로 삼은 실험인가요.”
““순서가... 잘못 됐군... 하찮은 추론이다.””
콰르륵!!
그림자가 몰려왔다.
은익을 펼친 메르세데스가 명암을 뚜렷하게 만들어 대응했다.
자신의 그림자에서 솟구쳐 나오는 암살자의 경로를 읽고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그림자를 꿰뚫지 못했다.
펄럭이며 내려앉은 천이 그녀의 검날을 무디게 만들었다.
의외로 무거운 천이었다.
혜안으로 천의 소재를 파악한 메르세데스가 조금 당황했다.
무려 금속으로 짜인 천이었으니까.
쩌어엉!!
그리드의 검무를 닮은 찌르기가 메르세데스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쯤 되자 지상의 사람들도 눈치 챘다.
저 어둡고 깊은 토굴의 늙은 악마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놈들은 인간들의 전설을 구현하고 있었다.
““우리가... 문지기에 불과하단 사실을... 간과하지 마라.””
친절한 척 지껄였지만 악마는 악마였다.
일곱이나 되는 악마가 메르세데스를 철저하게 포위했다.
순순히 돌려보낼 생각 따위 없어보였다.
사실상 일곱 명의 전설에게 포위당한 셈인 메르세데스의 상황은 누가 봐도 심각했다.
“...후우.”
심호흡하는 메르세데스의 숨결이 악마들의 예민한 감각을 자극했다.
악마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메르세데스를 공격했다.
일곱의 악마가 전설이 된 일곱 종류의 비기를 동시에 시전하는 광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순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재현되는 느낌이었다.
메르세데스의 투명한 눈동자에 그 광경이 모조리 잡혔다.
혜안.
신조차도 경계한다는 재능이 만개하여 전설이 된 기술들을 파훼하고 악마들의 목을 베어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