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8권 - 9화
드래곤의 절대성은 선천적인 것이다.
타고난 육체와 마력, 그리고 권능으로 당연하게 군림해왔다.
한데 그 타고난 절대성이 무용지물이 된다면?
‘귀찮군.’
우선 자유가 억압됐다.
단 몇 번의 날갯짓으로 대륙을 횡단했던 속도가 발휘되질 않았다.
하야테가 반응했다.
놈의 용살검은 절대방어를 종종 무력화시킬 뿐만 아니라 움직임을 봉쇄시켰다.
비늘을 꿰뚫고 파고드는 칼날에 담긴 기파가 육체를 경직시키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하야테라는 존재 자체가 드래곤에게 상극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대개 소문이란 과장되게 마련인데 놈의 경우는 완전히 반대였다.
소문이 실제 실력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하물며 한 발 늦게 난입한 마리로즈는 또 어떤가?
베리아체의 정당한 계승자.
태초의 3악과 동등하되 지상에서도 아무런 페널티를 겪지 않는 저 돌연변이의 흡혈 능력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설마 하야테가 흘린 피를 섭취해서 용살자의 힘을 일부나마 구현해낼 줄이야?
베리아체가 지옥의 패권을 두고 바알과 다퉜을 당시 홀로 만마의 힘을 발휘했다는 풍문에 결코 과장이 없어보였다.
마리로즈의 개입은 번헬리어로 하여금 두 명의 용살자를 상대하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움직임이 한층 더 쉽게 봉쇄당했고 절대방어와 비늘에 더 큰 손색이 생겼다.
상황을 반전시키는 용도로 브레스를 활용했지만 그마저도 아쉬웠다.
아직 애송이인 검성이 행사하는 영향력이 은근히 거슬렸다.
크라우젤이라고 했나.
놈은 하야테와 검기로 교감하며 하야테의 의도를 읽어냈다.
스스로 움직이는 보검과 같았다.
하야테가 용살검과 함께 휘두르는 신병이기였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호흡을 베어 브레스의 발동을 끊어놓는 놈의 활약이 하야테와 마리로즈의 활약과 더불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번헬리어가 이 답답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의지할 수단은 많지 않았다.
첫째, 마법.
드래곤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마법을 아무런 제한 없이 다중 영창 가능하다.
고룡치고 계획적인 편에 속하는 번헬리어와 상성이 몹시 좋은 재능이었다.
번헬리어는 하위종의 마법을 공부한 덕분에 수백수천 개의 마법을 동시 전개할 수 있었다.
그 능력으로 하야테를 손쉽게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
한데 마리로즈의 존재가 그의 마법에 제약을 안겼다.
마력에 혼재 된 마기가 마리로즈의 의지를 거역하지 못하고 번헬리어에게 반기를 들었다. 마법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둘째, 물리력.
고룡은 거대하고 빠르다.
꼬리까지 포함해서 최대 수백 미터에 육박하는 몸집으로 발휘하는 힘에 한도가 없다고 봐야 무방했다.
게다가 영생의 생물답게 초고속 재생 능력을 겸비했다.
절대방어와 비늘이 꿰뚫리고 상처를 입을지언정 별 지장이 없단 의미다.
그 무적과도 같은 육체를 휘둘러대면 천재지변이 일어났고 적은 당연히 묵사발이 났다.
어디까지나 공격이 명중했을 때의 이야기긴 했다.
공격 면적이 넓은 만큼 드래곤의 공격 적중률은 사실상 100퍼센트에 가까웠지만 이번엔 상대가 너무 나빴다.
무신 제라툴을 정면에서 맞상대할 정도로 기술이 경지에 오른 하야테와 번헬리어의 마력 흐름을 통제하는 마리로즈 둘 모두 쉽사리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날파리 같은 놈들.’
날개 달린 짐승이 제 면상에 침을 뱉으며 생각한다.
이렇게 된 이상 해답은 하나뿐이라고.
용언.
드래곤의 권능 중 가장 강력한 언령으로 모든 불리한 상황을 뒤집어야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번헬리어가 다른 고룡처럼 강력한 용언을 구사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불리해질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번헬리어의 용언엔 하자가 있다.
일부 상위룡의 용언보다도 못할 정도였다.
당연하다.
크란벨이 말했던 바 있듯 용언이란 언약의 이행을 통해 단련하는 것.
드래곤이 타고난 모든 힘들 중에서 유일하게 연마가 필요했다.
악룡으로 타락할 정도로 심성에 문제가 있는 번헬리어가 언약을 이행한 횟수는 당연히 적으므로 그의 용언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이참에 단련하면 된다.’
번헬리어는 위기를 기회로 여겼다.
오늘의 굴욕을 초월의 발판으로 삼으리라 다짐했다.
[나는, 일만의 인간을 죽일 것이다.]
갑작스러운 헛소리.
번헬리어가 지껄인 순간 하야테 일행은 몸이 가벼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자신들을 짓누르고 있던 용언의 압박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
“흐음.”
마리로즈와 하야테, 그리고 크라우젤 세 사람은 번헬리어의 의도를 즉시 눈치 챘다.
경지의 고하와 관계없이 오성의 수준만큼은 같은 것이다.
다만 반응이 달랐다.
마리로즈는 하품을 할 뿐이었고 하야테는 즉시 지상으로 하강했다.
크라우젤은...
꽈장창창!!
백호검을 깨뜨렸다.
그리드와 함께 만든 성장형 아이템의 궁극.
몇 년의 세월 동안 자신과 함께 발전해온 신화급 아이템을 영구히 손실시켰다.
하야테를 지키기 위해서다.
크롸라라라라라라!!
번헬리어의 광속이 유지되지 않았던 원인은 용살검에 있었다.
용살검과 충돌할 때마다 경직됐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느려진 것일 뿐, 용살검의 영향 범위 바깥에서 번헬리어는 여전히 자유로웠다.
하야테가 없는 곳을 노리는 놈의 속도는 민간이 아예 인식할 수 없단 말과 같았다.
“...?”
어지럽게 점멸하며 하늘을 수놓던 흑색 점이 살짝 커진 느낌이다.
지상의 인간들이 그런 생각을 품었을 땐 이미 번헬리어의 그림자가 땅을 뒤덮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는 거대한 용의 모습이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비명보다 불어 닥치는 광풍의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단순히 ‘이동’했을 뿐인 번헬리어에 의해서 생성 된 폭풍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채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인파를 휩쓸어버렸다.
나약한 인간의 살과 뼈 따위는 쉽게 찢어발기는 파괴력을 품은 채였다.
피픽!
사람들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며 선혈이 맺힐 무렵.
콰앙!
번헬리어를 뒤쫓아 내려온 하야테가 인파 사이에 착지했다.
입자 단위로 쪼개서 퍼뜨린 용살검의 기파로 사람들을 감싸면서다.
덕분에 사람들이 지켜졌다.
다만 하야테는 허점을 드러냈다.
단순히 언약의 이행을 통해 용언을 강화시킬 심산이었던 번헬리어 입장에선 넝쿨째 굴러온 호박으로 보였다.
고작 만 명의 인간을 죽이는 일.
언약을 지켜봤자 용언이 극적으로 성장할 일은 없었다.
내심 아쉬웠던 상황에서 하야테가 자충수를 두었으니 번헬리어에겐 엄청난 행운이었다.
놈이 즉시 하야테를 발로 찍어 눌렀다.
용살검의 기파를 분산시킨 여파로 호신강기가 약해진 하야테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신속하게 공략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략은 실패하고 말았다.
촤르르르륵!
유리조각처럼 투명한 무언가의 파편들이 하야테의 호신강기와 결합되어 있었다.
검기의 결손을 메워주는 백호검의 파편이었다.
검의 희생.
한 자루의 검을 희생시켜 대상을 보호한다.
대상이 검기를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는 제한이 붙은 탓에 활용성이 낮았지만, 희생하는 검의 등급과 위력이 강할수록 효과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장점이 있었다.
덕분에 번헬리어의 거대한 발에 짓밟히고도 하야테는 멀쩡히 견뎌낼 수 있었다.
“고룡 중에 정상이 없다지만.”
“...”
사람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집채보다 거대한 드래곤의 발.
자신들을 개미처럼 짓뭉개 죽였어야 할 그것을 서서히 들어 올리는 절대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흩어졌던 용살검은 어느새 다시 한 점으로 모여 검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하야테의 손에 쥐어진 채 번헬리어의 발바닥을 조금씩 파고들어갔다.
“명예조차 모르는 자가 있었을 줄이야. 실망이 크오.”
[천 년을 넘게 숨어 지내온 쥐새끼가 명예를 운운한다고?]
번헬리어가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마음의 여유가 적다는 증거였다.
대륙 전역에 펼쳐놓은 기감에 네바르탄이 잠에서 깬 기척이 잡혔으니까.
곧, 놈이 온다.
어서 눈앞의 놈들을 없애야 옳은데 여의치가 않다.
단순히 퇴각하는 건 심각한 문제가 된다.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내가 도망치는 행위가 전투에 참가한 놈들의 업적이 되어 엄청난 격을 선사하고 말 것이다. 후환이 될 수도 있다.
요점은 단순했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징벌을 내리마.]
거친 숨결을 토하며 말하는 번헬리어의 기세가 한 순간에 바뀌었다.
대륙 전역에 펼쳐놓았던 기감을 집중시킨 결과였다.
놈을 조금씩 밀어내던 하야테가 흠칫 놀라 뒷걸음치고 말았고, 번헬리어의 시선은 상공으로 향했다.
언젠가부터 조용하다 싶더니 꾸벅꾸벅 조는 마리로즈의 모습이 먼저 포착됐다.
번헬리어는 애써 무시했다.
넝마가 된 채 호흡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있는 크라우젤을 시야에 담았다.
“...!”
노림수를 읽은 하야테가 급히 도약하려다가 멈췄다.
마리로즈가 나태의 저주에 시달리자 드디어 해방 된 마력을 번헬리어가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수백수천 개의 마법이 동시에 전개되어 인간들을 겨냥했다.
하야테는 그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하늘 위 크라우젤이 미소 짓고 있었다.
괘념치 말라는 듯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새카만 기둥이 솟구쳤다.
드래곤 브레스가 크라우젤의 몸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때마침 인간들을 노리고 쏘아진 마법들을 베어내는 하야테의 비명이 처절했다.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순간이었다.
애초부터 전투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 순간의 결과만을 놓고 번헬리어가 승자라고 인식했다.
[다음 징벌을 고대하고 있어라.]
그대로 등 돌린 번헬리어가 날개를 활짝 펴고 떠났다.
명백한 줄행랑이었으나 사람들의 눈에는 승자의 여유로 미화됐다.
하야테는 차마 놈을 뒤쫓지 못했다.
용살검이 드래곤을 상대로 상성상 우위에 있다지만 하야테의 육체는 번헬리어의 육체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했다. 번헬리어와 충돌을 거듭할 때마다 뼈와 살이 분리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고 체력을 급격히 소모했다.
인간이 초월을 거듭해 절대자가 됐다 한들 어찌 고룡과 비하겠나.
번헬리어가 네바르탄을 의식하며 초조해했듯이 하야테는 자신의 체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초조함을 느꼈었다.
현 상태에서 번헬리어를 뒤쫓을지언정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없음을 인지했다.
‘그나마 뱀파이어 공작이 함께였다면 추격해 보았겠지만.’
이미 반쯤 잠든 그녀에겐 기대를 걸 수 없는 상황이다.
부디 네바르탄이 번헬리어를 추격하는데 성공해서 서로가 심대한 타격을 입기를 바랄 수밖에.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서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하야테의 얼굴에 회안이 가득했다.
크라우젤.
당대의 검성이자 선구자.
그에게 의지가 되기는커녕 도움만 받다가 희생시켰음에 한탄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당신께서 무사하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
부활 포인트가 가까웠던 덕분에 금방 현장으로 되돌아온 크라우젤이 분위기를 잠시 냉각시켰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하야테는 플레이어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튼 크라우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검을 잃었고 경험치도 절반 이상 잃었지만 높은 격과 칭호를 쌓은 덕분이다.
고룡과 싸우면서 하야테를 지켜냈으니 당연히 얻어야 할 권리였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익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을 때의 이야기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크라우젤의 속은 타들어갔다.
‘내 검...’
무려 그리드가 나의 바람에 맞춰서 만들어준 이상적인 검이었다.
노말 등급부터 함께 발전하며 영혼의 동반자로 거듭난 검이었다.
가장 소중한 보물을 잃은 셈이다.
그나마 하야테에게 도움이 됐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지만 멘탈이 멀쩡하긴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