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8권 - 8화
본디 흡혈은 생존 수단이 아니다.
살기 위해 다른 종족의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들은 결함품에 불과했다.
흡혈 없이도 활동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브라함이 증명한다.
직계의 힘을 되찾고 다시금 뱀파이어가 된 그는, 그 이후로도 타인의 피를 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쁘지 않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훑어낸 피.
하늘에서 쏟아진 그 검붉은 혈액은 공교롭게도 하야테의 피였다.
인류 최후의 보루인 드래곤 슬레이어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하야테와 번헬리어의 격전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심지어 대국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염 된 하늘을 바둑판 삼은 흑돌과 백돌이 서로를 에워싸기 위해 노력하는 광경쯤으로 인식했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형체가 색으로 분간 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번헬리어가 흑색이고 하야테가 흰색과 닮은 은색이었다.
서로 쫓고 쫓기는 색이 여러 선과 점을 이루고, 뭉쳤다가 퍼지기를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이 별자리의 생성 과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핏 아름다웠다.
무지막지한 폭음이 연달아 뒤따르지만 않았어도 하염없이 감상했으리라.
꽈과과과광...!
색과 색, 혹은 빛과 빛이 수십 개 추가로 떠오를 때마다 이어지는 폭음은 천둥 따위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안 그래도 무너져 내리고 있는 대지 곳곳에 울림이 전달되어 더 큰 지진을 발생시켰다.
사람들은 두려웠다.
종말 직전의 세계에 놓인 심정이었다.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하야테가 연달아 큰 상처를 입었단 사실을 알게 됐다간 더 큰 불안에 빠질 터였다.
하지만 마리로즈 입장에선 오히려 상황이 좋았다.
브라함과 달리 어머니의 모든 능력을 계승한 그녀는 흡혈이란 행위를 진정으로 활용할 줄 알았으니까.
스윽.
마리로즈가 피 묻은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갔다.
붉은 입술이 요염하게 반들거리며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녀의 미모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종말을 떠올리던 사람들이 위기를 망각하고 황홀경에 빠지게 만들 지경으로, 사람을 안락사로 이끄는 용도로 활용 될 만했다.
축복보단 저주에 가까운 느낌.
특히 당사자에게 큰 저주일 것 같았다.
마리로즈에게 매료 된 사람들은 그녀를 가엾게 여겼다.
너무 아름다운 탓에 누구와도 진실로 교감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상상의 나래를 찰나지간에 펼쳤다.
당당하면서도 가련하고, 요염하면서도 청순한 그녀의 복합적인 인상이 자연히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마리로즈는 개의치 않았다.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익숙한 그녀는 다만 용살자의 피를 음미할 뿐이었다.
‘낭군의 것처럼 달콤하진 않네.’
맛 또한 향과 같았다.
그냥 딱 나쁘지 않은 수준.
뇌리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옛 기억을 참고하자면, 격이 높은 존재의 피일수록 달콤한 법이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별로였다.
그리드의 피를 먼저 맛본 여파가 아닐까.
그리드의 맛에 익숙해진 탓에 다른 맛엔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된 게 아닐까.
‘아아.’
흰 뺨 위로 홍조를 띄운 마리로즈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완전한 구속을 느꼈다.
마음과 정신에 이어 몸까지 그리드를 좇기 시작했으니 완벽하게 지배당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수많은 존재들이 그녀에게 집착해왔고 그녀를 구속하기 위해 노력했건만 오히려 그녀를 기피해온 그리드가 그녀를 구속해버린 것이다.
평생토록 쌓아올린 신앙을 등지고 스스로의 영혼을 관에 가둬버린 어떤 교황이 이 사실을 알았다간 통탄할 것이 분명했다.
“어...?”
마리로즈를 멍하니 바라보던 사람들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옷깃이 흩날린다 싶더니 그녀를 중심으로 은빛 파동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기운을 연상시켰다.
꽈아아아앙...!
사람들의 몸이 크게 기울어졌다.
급기야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 마리로즈가 있던 자리가 움푹 파였단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달의 표면처럼.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되어 있었다.
마침 하늘을 반으로 가른 저 새카만 드래곤 브레스의 파장이 여기까지 미친 걸까?
의문과 걱정에 휩싸였던 사람들이 이질적인 광경을 한 발 늦게 인식했다.
고이 접힌 양산이 크레이터 중심부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어떤 폭발에 휩쓸린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
번헬리어는 태초부터 당연히 군림해왔다.
지옥의 마기를 삼킨 뒤론 한층 더 발전해서 그야말로 전능한 존재로 거듭났다.
고등한 마력에 더불어 온갖 사악한 기운을 활용할 수 있게 됐으니 스스로를 무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다른 고룡들과 섣불리 다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설령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지언정 위기를 쉽게 모면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
번헬리어가 상정했던 위기는 대부분 동급의 존재들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고룡이나 태초신급이 아닌 이상에야 그 외의 존재는 딱히 의식하지 않았다.
드래곤 슬레이어?
인간 중 유일한 절대자?
일단 마주칠 수만 있으면 쉽게 짓밟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한데 실제 상황은 믿음과 크게 달랐다.
쉽게 짓밟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지 않으면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영 불쾌했다.
절대방어.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지켜줬던 그 타고난 권능이 종종 무력해질 때면 발가벗겨지는 심정이었다.
갑옷으로 둘러친 피부와 비늘이 잘려나갈 때면 약간의 위기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그 광오한 이름처럼 위협적인 존재가 맞았다.
하필 자신이 놈과 마주친 점에 대해서 약간의 짜증을 느낄 정도였다.
‘이놈을 처리하는 건 내가 아닌 다른 놈들이었어야 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볼거리였을 것이다.
필시 즐겁게 감상했을 터였다.
한데 내가 볼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쯤 잠결에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다른 고룡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화가 치솟았다.
놈들이 나를 비웃고 있을 수도 있단 생각에 평정심이 흔들렸다.
지옥 마기의 부작용이다.
마기의 근원은 분노, 증오, 슬픔, 혼란 등이 뒤섞인 혼돈이다.
꽤 오랜 세월 동안 혼돈을 식량처럼 섭취해온 번헬리어는 다른 고룡들과 비교해서 감정을 쉽사리 제어하지 못했다.
노골적인 감정의 표출을 즐기는 트라우카와는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지옥의 마기를 흡수하고 나서야 무적을 자처했고, 무적을 자처하고 나서야 위기를 ‘모면’할 자신감을 쌓아올린 번헬리어와 달리 트라우카는 광오했다.
탄생 순간부터 자신을 무적이라고 믿었다.
존재하는 동안 겪게 될 위기는 상정 자체를 안 했다.
그러면서 또 의외로 신중한 것을 보면 허풍 같기도 했지만... 아무튼 번헬리어는 허풍을 칠 여력조차 없었다.
감정에 자주 매몰됐다.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는 약점으로, 광룡 네바르탄과 엮이길 극도로 꺼려하는 이유였다.
‘평정심. 초조해 할 이유가 없다.’
번헬리어가 마음을 다스렸다.
감히 함부로 날뛰어대는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수차례 수모를 겪으면서도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현장에 네바르탄이 난입하기 전에 하야테를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을 품으면서다.
하야테는 의외로 뛰어난 솜씨로 버티고 있을 뿐이지 번헬리어에게 실제적인 위협은 주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진 그랬다.
[...!?]
크라우젤이 인지하지 못하는 속도를 유지하면 브레스의 발동이 끊길 일이 없다.
그 부분을 자각한 채 광속으로 비행하며 브레스를 방출하던 번헬리어가 급정지했다.
고속 이동의 여파로 궤도가 온전치 않던 브레스가 한풀 더 기세가 꺾여선 애꿎은 지점을 갈랐다.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번헬리어의 감각은 온통 아래로 쏠렸다.
또 다른 드래곤 슬레이어가 도달해오고 있었다.
착각이 아닌 진짜다.
[네놈, 뭐냐?]
절대방어와 비늘만으론 완전한 보호를 약속 받지 못하는 상황.
치욕을 감수하고 마력 베리어를 둘러친 번헬리어가 하야테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만큼 상황이 충격적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세상을 속여 왔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태껏 진실을 눈치 챈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 믿기지 않았고, 그러므로 큰 경계심을 품었다.
그렇다.
번헬리어는 마리로즈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하야테의 피를 먹고 용살자의 힘을 일부 재현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까이 있음을 눈치 챘다.
지옥의 마기를 받아들인 여파다.
마기를 지배하는 입장에 있는 태초의 3악이 그에겐 상극이었다.
바알이 번헬리어에게 채워놓은 은밀한 족쇄가 이 순간 마리로즈에게 이롭게 작용하는 것이다.
콰자자자자장!!
섬섬옥수를 감싼 채 흐르는 은빛의 기파가 번헬리어의 베리어를 아래서부터 꿰뚫고 들어왔다.
용살검이되 용살검과 달랐다.
검의 형상이 아닌 다섯 줄기 손톱의 형상을 이루고 마력과 신체의 약점을 동시에 찢어발겼다.
번헬리어가 품고 있는 마기를 흐트러뜨렸다.
새카만 마력의 베리어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네놈...!]
자신과 눈높이를 맞춰오는 불청객의 얼굴을 본 번헬리어가 치를 떨었다.
너울거리는 흑발과 붉은 눈동자.
입 꼬리가 올라갈수록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뾰족한 송곳니가 그녀의 정체를 알려줬다.
[베리아체의...!]
서걱!!
마침 내리꽂힌 진짜 용살검이 번헬리어의 비늘을 베었다.
목덜미를 노렸지만 어깨로 스쳤다.
고개를 뒤로 젖힌 번헬리어의 울대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브레스의 전조.
협공을 펼쳐온 하야테와 마리로즈를 동시에 겨냥하는 각도였다.
사선으로 내렸던 검을 상단으로 세우는 하야테의 등 뒤로 도포가 펄럭였다.
크라우젤의 것이다.
[대상의 스킬 캐스팅을 취소시켰습니다.]
호흡을 베는 검이 드디어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마리로즈의 예상치 못한 난입이 큰 기회로 작용했다.
“흐흠.”
마리로즈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브레스의 전조를 개의치 않고 돌진하는 하야테를 보면서 자신 역시 눈치껏 앞으로 나아갔는데, 웬 인간이 큰 활약을 해준 것이다.
낯이 익었다.
그리드 다음으로 활약해온 인간이니만큼 여기저기서 풍문으로 많이 접했다.
“검성. 너도 나쁘진 않네.”
쿠콰카카카카카카캉!!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하야테의 용살검이 앞장서 번헬리어를 난도질했고 덕분에 크라우젤의 궁극기들도 미세하게나마 효과를 발휘했다.
마리로즈가 보조했다.
용살의 기운을 빌린 마력으로 번헬리어의 마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억압하면서 두 사람의 공격을 한층 더 위력적으로 벼렸다.
[...!]
이를 악 문 번헬리어가 비명을 삼켜냈다.
단순히 체면을 지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네바르탄을 의식해서였다.
소란의 규모를 이 이상으로 키웠다간 네바르탄이 도착하는 시간이 빨라질 거라고 판단했다.
쩌저정!!
심장으로 꽂혀오는 용살검은 폴리모프로 피하고,
콰자작!!
인간 신체의 섬세함을 활용해 반격을 꽂는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마력과 혼재되어 있는 마기가 통제되질 않았다.
오히려 마리로즈의 의지에 호응한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사실상 마법이 봉인됐고 육체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바알...!!]
본인의 상태를 자각할수록 번헬리어는 눈앞의 적들이 아닌 바알을 원망했다. 놈에게 원한을 키워갔다.
지옥의 바알이 끅끅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