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8권 - 7화
드래곤 하트를 회전하며 정제 된 마력이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 숨결로 쏘아지는 것.
그게 바로 브레스다.
강력한 속성이 깃든 이유다.
심장과 호흡.
드래곤 브레스의 작동엔 생명의 근원을 뜻하는 개념이 둘씩이나 포함됐고 대개 근원이 속성이 되는 법이니까.
[검성인가. 다만 탑에 있는 백치와는 결이 다르구나.]
비반은 이미 쏘아진 브레스를 물리적인 힘으로 베어버린다는 풍문이 있다.
반면 크라우젤은 호흡을 베어서 브레스의 작동 자체를 끊어버렸다.
의지의 행사를 사전에 차단당한 셈이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위대한 고룡이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수모였다.
파장이 컸다.
전설 이상의 업적을 남긴 크라우젤의 격이 실시간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정작 번헬리어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을 발판삼아 발전해버린 인간을 도리어 유쾌하게 평가했다.
[뮐러와도 다르다. 보고 배울 선대들이 있음에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건가.]
“...”
번헬리어의 태도가 하야테를 동요시켰다.
콧대 높은 고룡, 심지어 악룡이 일개 인간에게 흥미를 보인다는 점만 해도 경천동지 할 사건인데 뮐러의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이다.
일부 고룡이 뮐러를 돌연변이 취급하며 혐오했다는 비화를 떠올려봤을 때 결코 호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겉으론 유쾌하게 지껄이고 있지만 속으론 무지막지한 살심을 품었을 게 뻔했다.
[썩 좋은 변수는 아니다. 네 재능은 소멸하는 편이 좋겠다.]
크륵, 크르륵...
거친 숨결과 함께 번지는 번헬리어의 음성이 대륙 전역을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바다에선 해일이 일어났고 화산에선 용암이 분출됐으며 가리온이 자리를 비운 지상은 연달아 지진을 일으키며 평야에 협곡을 만들어댔다.
기본적으로 악과 마가 깃든 음성에 노골적인 살기까지 실리자 그 자체가 재해가 되는 것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크라우젤이었다.
온갖 상태 이상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상태 이상은,
[번헬리언의 용언이 당신의 재능을 소멸시킵니다.]
[대부분의 패시브 스킬이 일시적으로 봉인 됩니다.]
패시브 스킬의 봉인.
무지막지한 압박감에 짓눌린 크라우젤이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하야테가 번헬리어의 꼬리치기를 막아내며 잠깐 경직시키기 전까진 번헬리어의 저 거대한 몸집을 식별할 수가 없었다.
워낙 빠른 탓에 멀리서부터 시야에 담았음에도 움직임을 끝없이 놓쳤었다.
그나마 초감각의 보조가 있기에 희미하게나마 기척을 잡은 게 한계였다.
그리고 검성의 초감각은 패시브가 아닌 스탯이다.
아직, 싸울 수 있다.
“생각보다 더 도움이 못 될 것 같군요. 감안해주십시오.”
번헬리어의 브레스를 끊고 격이 오른 건 사실이다.
하지만 크라우젤에게 초월의 격은 오래 전부터 익숙해진 개념이었다.
동대륙에서 반신들과 싸우고, 정령계에선 바람의 정령왕을 토벌하여 하나의 차원을 정화하는데 성공하고, 다시 지상에 돌아와선 뮐러의 제자를 자처하는 장님 검객의 추격을 당하고, 뮐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장악하고 있던 무후총의 간부들과 전쟁을 치르고, 전직 퀘스트 때문에 오른 그레니어에선 산군에게 시련을 겪는 등.
굵직한 사건들을 연달아 겪고 해결해온 크라우젤은 자신의 격을 수차례 쌓아올렸다.
고작 하나의 격이 올랐다고 해서 급격한 성장이 이뤄지진 않는단 사실을 파악하고 있단 의미다.
대적 불가.
악룡 번헬리어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그 사실을 명확하게 실감한 크라우젤이 목표치를 낮췄다.
“제가 잠시 시간을 벌 동안 물러나시는 게 가장 현명해보이긴 합니다.”
하야테를 마냥 보좌하기 보단 하야테가 즉시 후퇴하도록 종용했다.
하야테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물러나선 안 되오.”
그는 세상에 유일한 드래곤 슬레이어다.
날뛰기 시작한 악룡을 막아 설 의무가 있었다.
죽음이 두려워 숨어 지냈던 과거에도 지금과 같은 순간을 맞이했다면 필시 똑같이 행동했으리라.
하야테의 결의에 찬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크라우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하시죠.”
몇 달 전.
바람의 정령왕을 베어냈을 무렵 크라우젤은 영문 모를 상황을 겪었다.
당연히 그리드의 권한이었어야 할 선구자의 자격이 자신에게 양도 된 것이다.
필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이유를 깨닫는다.
“다만, 반드시 살아남아주십시오. 죽는 건 제가 대신 합니다.”
희생.
본래 그리드가 맡았어야 할 역할.
하지만 그리드는 너무 많은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고 차선으로 내가 선택 됐을 확률이 높다.
상황을 파악한 크라우젤은 원망하지 않고 영광으로 삼았다.
그리드의 책임을 기꺼이 나눴다.
목례로 감사를 표한 하야테가 설명했다.
“드래곤 하트를 노릴 셈이오. 그게 드래곤의 기세를 죽일 유일한 방법이니까.”
화룡 이프리트가 죽은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는 브레스의 다중 중첩에 있었다.
고룡이 아닌 그녀는 <드래곤 레이지> 상태만으로 5회의 브레스를 중첩시키는 번헬리어와 입장이 달랐다.
브레스를 중첩시킬 때마다 얻는 부담감이 몹시 컸고 그로인해 드래곤 하트에 과부하가 걸렸다.
안 그래도 뿔을 잃고 약화 된 상태에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염룡 트라우카의 레어에 도착할 무렵부터 그녀는 사실상 죽어있었다고 봐야 무방했다.
하물며 드래곤 하트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힌다?
아무리 고룡이라도 족히 수십 년은 회복에 전념해야할 터였다.
물론 상처 따위 신경 안 쓰고 영원히 활동할 수도 있겠지만... 고룡의 경쟁자는 고룡이다.
완전하지 못한 상태로 활동하다가 다른 고룡의 표적이 되어 위기를 겪고 싶진 않겠지.
[내 심장을 노린다?]
하야테가 자신의 노림수를 대놓고 입 밖에 꺼낸 이유는 별 거 없다.
일자로 응축시킨 은하처럼 보이는 용살검.
그것은 하야테의 검기이자 의지였다.
하야테의 의도에 따라 칼날의 방향이 실시간으로 바뀌어댔는데 노골적으로 번헬리어의 심장을 겨누곤 했다.
번헬리어가 하야테의 속셈을 모를 리 없단 뜻이다.
[어디 한 번 해보아라.]
피식 웃은 번헬리어가 자신의 가슴을 당당하게 펼쳤다.
하늘에 성벽이 펼쳐지는 듯했다.
[내 심장은 여기다.]
하야테가 속내를 숨기지 않듯이 번헬리어 역시 심장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야 강했으니까.
하야테의 의지 따위 철저히 짓밟을 수 있을 정도로.
[...!]
당당하게 지껄이던 번헬리어의 표정이 한 순간 굳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두개골을 꿰뚫고 들어와 뇌수를 휘젓는 감각을 느낀 탓이었다.
심검.
검성 크라우젤의 궁극기다.
대상의 최대 생명력에 비례하는 피해량을 입혔다.
물론 자신보다 격이 높은 대상에겐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실제로 심검에 적중당한 번헬리어가 느끼는 감각은 고통이 아닌 이물감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단 0.001초에 불과한 동요.
그 빈틈을 찌를만한 실력자가 이 자리엔 있었다.
“...”
크라우젤은, 매료되었다.
오염 된 밤하늘이 우주로 변모해 있었다.
번헬리언의 동공에 담긴 우주보다 컸다.
집단을 이룬 천체가 시야가 미치는 곳 어디에든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게 하야테의 검기 파장이었다.
드래곤의 가슴을 통째로 베어낸 여파로 말미암아 발생한 파장 말이다.
푸화하하하학...!!
크라우젤이 바뀐 풍경을 인식했을 땐 이미 결과가 발생한 후였다.
하야테는 여전히 크라우젤의 등 뒤에 있었는데 용살검은 수백 미터 전방에 떨어져 있는 번헬리어의 가슴을 갈라놓았다.
검술이 아닌 신비였다.
굳이 비교할 만한 기술은 심검밖에 없을 듯했다.
‘용살자...’
드래곤의 가죽과 비늘은 뮐러조차도 베어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뮐러의 기록은 대부분 소실 됐단 점을 감안해야 했지만, 드래곤의 가죽과 비늘은 그 어떤 신병이기로도 꿰뚫지 못한다는 게 애초부터 상식이다.
한데 처참하게 갈라졌다.
번헬리어의 어깨부터 복부까지 빗금 진 절단면에서 새카만 마기가 마치 피처럼 쏟아졌다.
그 양이 무지막지했기에 지상의 강물들이 범람할 것만 같았다.
“...?”
평생 두 번 다신 못 볼 수도 있는 압도적인 광경.
비스듬히 기울어가는 번헬리어의 거체를 멍하니 바라보던 크라우젤이 흠칫 놀랐다.
그의 시야가 몇 바퀴 회전했다.
하야테에게 이끌렸다.
하야테의 손에 붙잡힌 어깨가 뒤로 크게 젖혀지다 못해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는 것이다.
초감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기척 자체를 못 느꼈다.
절대자와의 격차를 절실히 깨닫는 크라우젤이었지만 일단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하야테에게 약속했던 역할을 떠올리며 팽그르르 도는 몸의 도달점을 예측했다.
검을 뽑아 세웠다.
쩌어어어어엉!!
이 순간 크라우젤은 하야테의 방패였다.
그렇게 활용 됐다.
갈라진 용의 배에서 튀어나온 장발 사내의 기습으로부터 하야테를 지켜냈다.
‘큭.’
비명을 삼켜야만 했다.
사내의 주먹과 충돌한 백호검을 통해서 전달 된 충격이 뼛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꽈드득!
악 문 이가 갈리는 소리보다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훨씬 크게 울렸다.
필시 막아냈음에도 절반에 가까운 생명력이 날아갔다.
[상태이상 ‘골절’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검성은 어떤 상황에서든 완벽하게 검을 다룰 수 있습니다.]
[악룡 번헬리어의 마기가 체내로 침투하였습니다.]
[번헬리어에게 잃은 생명력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회복할 수 없습니다.]
“하하하하! 인간을 방패로 삼아? 과연 천 년을 넘게 숨어 연명해온 놈답구나!”
정체불명의 사내.
골반까지 닿는 흑발을 치렁거리며 웃는 절세 미남자의 정체를 크라우젤은 섣불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놈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이름을 확인하고도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폴리모프.”
하야테의 음성이 귓전에 스몄다.
크라우젤에게 설명해주는 느낌이 아니라 치를 떠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크라우젤이 상황을 이해했다.
번헬리어는 하야테에게 어디 베어보란 듯이 가슴을 내주었고 하야테는 놈의 방심을 노렸다. 전심전력을 담은 일격을 쏘아냈다.
함정이었다.
번헬리어가 폴리모프를 써서 몸의 크기를 줄인 까닭에 놈의 심장 위치가 크게 바뀌었다.
하야테가 벤 것은 번헬리어의 심장이 아닌 폴리모프의 잔상에 불과했다.
‘교활하군.’
단지 강할 뿐만 아니라 꾀를 쓸 줄 안다.
조금 단순한 면이 있는 그리드에게 최대의 난적이 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문득 들 정도였다.
크라우젤이 덜덜 떨리는 두 손에 온 힘을 실었다.
자신이 방패가 되어준 사이에 호흡을 고른 하야테가 여전히 등 뒤에 있음을 느끼면서다.
“반드시 목적을 이뤄주셔야겠습니다. 그리드와 만나선 안 될 자 같으니.”
“공감하오.”
“...!”
인간으로 변신한 번헬리어의 모습을 토대로 간격을 새로 재던 크라우젤이 기겁했다.
불쑥 눈앞에 나타난 번헬리어의 손이 순식간에 거대해지면서 계산을 물거품으로 만든 까닭이다.
꽈아아아아앙!!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한 번헬리어.
놈은 신체의 일부를 드래곤의 신체로 바꾸는 식으로 운영했다.
내뻗던 주먹을 드래곤의 앞발로 바꿔버리자 대응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드래곤의 모습일 땐 한없이 작아 보였던 앞발이 인간의 몸에 달리자 비정상적으로 거대했다.
공격 면적이 워낙 넓어서 피할 길이 없었다.
검의 시를 읊으려는 크라우젤의 몸이 뒤로 쑥 밀려났다.
이번에도 역시 하야테에게 이끌렸다.
목덜미를 붙잡혔는데, 등을 지그시 누르는 하야테의 손길이 느껴졌다.
의도를 파악한 크라우젤이 검을 앞으로 겨눴다.
이번에 그는 하야테의 검이었다.
쩌어엉!!
크라우젤의 검이 번헬리어의 발톱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가죽을 뚫진 못했다.
하지만 틈새를 조금 벌리는 역할은 간신히 해냈다.
계산의 영역이었다.
절대자간의 싸움에서 실력을 발휘할 리 없는 크라우젤을 하야테가 대신 움직인 결과였다.
벌려진 틈새로 용살검이 파고들었다.
흠칫 놀란 번헬리어가 팔을 다시금 인간의 형태로 되돌렸다.
그러면서 올려 찬 발은 드래곤의 형태였다.
태산이 밀려온다.
표적을 잃은 용살검이 즉시 궤도를 바꿨다.
드래곤의 거대한 발을 막아냈다.
용살검의 기파가 번헬리어의 행동을 찰나지간 경직시켰지만 큰 효용은 없었다.
번헬리어의 발이 다시금 작아진다 싶더니 어느새 5회 중첩 된 브레스가 코앞으로 쇄도해왔다.
크라우젤이 읽지 못한 사이에 쏘아진 터라 호흡을 끊지 못했다.
‘흠모한 끝에 이해하였고.’
크라우젤은 검을 찬미하는 시를 읊었다.
하야테가 순보를 쓰지 않을 거란 확신을 품은 채다.
현재 만천하에 번헬리어의 기감이 펼쳐져 있다.
순보를 쓰는 즉시 경로를 읽혀 치명적인 카운터를 당할 확률이 몹시 높았다.
과연 하야테는 순보를 쓰지 않았다.
크라우젤의 판단을 예상했다는 듯이 브레스를 크라우젤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마침 용살검은 고리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총 여덟 개의 고리.
하나하나에 강렬한 기파가 담겼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검을 찬미하는 시는 사실상 무적기다.
검의 공격력과 내구력을 자신의 방어력과 체력으로 치환하며 검을 소모하는 대가로 데미지와 상태이상을 무시했다.
하지만 번헬리어를 상대론 큰 효과가 없었다.
수십 자루의 검을 희생시킨 크라우젤은 단 1회의 브레스를 견뎌냈을 뿐이며 번헬리어의 브레스는 시간차 없이 5회 중첩됐다.
크라우젤을 완전히 넝마로 만들어버렸다.
대신 하야테는 지켜냈다.
불사를 소모해버린 와중에도 크라우젤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검을 찬미하는 시의 저력을 믿고 백호검을 크게 휘둘렀다.
“우주 검.”
[<검을 찬미하는 시>의 효과로 스킬 공격력이 15배로 적용됩니다.]
내내 짓밟히는 모습이 불쌍했던 걸까.
오래간만에 잭 팟이 터졌다.
“...!”
번헬리어의 두 눈이 살짝 치켜졌다.
고개를 틀어 검격을 피해내는 그의 뺨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아름다운 얼굴에서 미소가 처음으로 사라진 순간이다.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기고 크라우젤을 노려보는 번헬리어의 시선이 범상치 않았다.
‘망했군.’
하필 찍혀도 세계관 최강의 괴물에게 찍힌 건가.
여기서 상황이 안 좋게 풀리면 진짜로 게임 접어야할 수도 있겠다.
혀를 내두르던 크라우젤의 표정이 굳었다.
고리를 이룬 용살검이 번헬리어의 팔방을 점하는 광경을 보면서다.
그것들은 같은 용살검이되 각자 다른 형태를 이뤄갔다.
어떤 고리들은 번헬리어의 꼬리가, 앞발이, 다리가 되었고, 또 어떤 고리는 브레스처럼 섬광으로 쏘아졌다.
번헬리어가 지난 몇 초 동안 보여줬던 동작 중 가장 치명적인 것들을 구현해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권능이다.
드래곤을 사냥감으로 삼고 사냥감의 분석을 마친 것이다.
“근본은 어디 안 가는구나. 명예도 모르는 더러운 놈.”
감히 나를 재현하다니.
치를 떤 번헬리어가 거대화했다.
용살검의 기파 탓에 간헐적으로 무효화되는 절대방어의 상태를 감안해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다시금 비늘을 둘러쳤다.
꽈르르릉!!
동시 타격을 허용하는 번헬리어의 거대한 몸이 흔들린다 싶더니 천둥 같은 폭음이 연달아 뒤따랐다.
사람들이 그제야 번헬리어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았다.
등장 후 고작 수십 초.
눈으로는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며 온갖 재해를 일으켰던 그림자가 처음으로 1초 이상 제자리에 머물렀단 의미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번헬리어.
국대전 서버에 출몰했던 이후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커다란 공포와 불안으로 심어졌던 그 괴물과 맞서 싸우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모습을 발견한 여파였다.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하야테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이 점차로 늘어났다.
하지만 곧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뜨겁게 불타올랐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냉각됐다.
우주 검이 반으로 갈라놓은 세계가 서서히 붕괴되어가고 있었으니까.
역대급 트롤링이었다.
가리온의 공백이 뼈저리게 실감됐다.
하야테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채 이리저리 휘둘러지는 크라우젤을 사람들이 미묘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가운데 전투의 양상이 실시간으로 변했다.
드래곤 피어를 쓴 번헬리어가 자신을 공격하는 은빛 드래곤의 형상을 모조리 날려버린 후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드래곤과 하야테의 모습이 또 다시 식별 불가 상태가 됐다.
하늘을 통째로 무대로 삼는 전장 곳곳에 빛만 번쩍거렸다.
별자리가 만들어지는 광경으로 보였다.
후두둑!
누군가의 얼굴에 빗물이 떨어졌다.
의아해서 닦아내니 피다.
흔히 아는 검붉은 피.
인간의 피가 확실했다.
하야테나 크라우젤이 흘린 피일 터였다.
사람들의 불안이 다시금 커지는 그때.
스륵.
슬며시 드리운 그림자가 핏물을 막아냈다.
파랑 장식이 달린 화려한 검정색 양산이었다.
“나쁘지 않네.”
양산을 타고내린 핏물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훑어낸 여인이 살포시 웃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미인이었다.
홍옥처럼 붉은 눈동자에 마력이라도 담긴 걸까.
현장의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매혹되었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가 출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