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8권 - 6화
거의 모든 플레이어는 드래곤을 번헬리어로 인식한다.
드래곤 중 최초로 직접 모습을 드러낸 존재가 번헬리어니까.
심지어 수십 억 인구가 시청했던 국가대항전에서였다.
절대적인 능력치와 파괴력이 만천하에 공개됐었고 세상은 경악으로 물들어갔었다.
아마 그때가 인류 탄생 이래 지구가 가장 조용했던 날 아니었을까.
“히익...!”
“망했어! 종말이다!!”
“어서 로그아웃해서 주식부터 정리해야겠군.”
사람들은 드래곤이 몹시 강력하고 흉포하단 사실을 학습하고 있었다.
번헬리어에 의해서였는데, 이 순간 또 다시 번헬리어가 출현한 것이다.
국가대항전 서버에 난입했을 때와 비교하면 파급력이 차원이 달랐다.
상당수의 플레이어가 자신이 아는 가장 은밀한 장소로 피신하거나 망설임 없이 로그아웃했다.
제자리를 지키는 플레이어는 극히 소수.
짊어진 책임이 있는 사람들과 오기를 부리는 사람들 정도에 불과했다.
“시청자수 대박.”
“특종이구만.”
방송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도리어 번헬리어의 그림자를 쫓아 내달렸고,
“걱정 마. 아빠가 지켜줄게.”
NPC와 가정을 꾸린 사람들은 가족의 곁을 지켰으며,
“창고에 있는 용작살 전부 꺼내와.”
“전시라고 봐야 옳다! 지금 당장 비상 징집 공고를 내려!”
기사, 혹은 귀족 작위가 있는 사람들은 평소보다 더욱 힘찬 목소리로 병사들을 이끌었다.
하늘 위 번헬리어는 지상의 상황을 모조리 눈에 담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도망치는 벌레들을 아쉬워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저항할 생각을 품는 벌레들의 태도에 분노하지도 않았다.
숨결 한 번으로 언제라도 몰살시킬 수 있었으니까.
번헬리어가 바라는 건 더 깊은 불안이다.
자신은 단지 천천히 대륙을 횡단할 뿐인데 그걸 본 벌레들이 제풀에 꺾여갈 모습을 기대했다.
시간이야 많다.
꺾이지 않으면 꺾일 때까지 몇 번이고 날갯짓 해주면 그만이다.
그리고 분위기가 가장 무르익었을 때 강림해 목을 옥죄여 갈 생각이다.
처음엔 암컷과 수컷을 1,000마리씩 바치라고 해볼까.
그리고 벌레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산 채로 천천히 씹어 먹으면 절망과 공포가 진동을 할 터인데.
식사를 마친 후에는 내일부터 제물의 숫자를 2배씩 늘리라고 하자.
동족을 바친 대가로 미래를 꿈꿨을 놈들이 다시금 절망하는 광경이 제법 재밌을 것이다.
종국에 이르러 벌레들이 저항을 선택할 쯤에는 네바르탄이 눈을 뜰 터이니, 마무리는 놈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기껏 용기를 쥐어짜 나와 맞서려했던 벌레들에게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는 격이므로.
절망과 공포에 분노까지 뒤섞여 혼돈이 완성될 테지.
크르르르...
씰룩거리는 번헬리어의 주둥이 틈새로 마기가 흘러나왔다.
입자 하나하나가 마력과 검기를 분쇄하고 생명의 불시를 꺼뜨리는 파괴력을 품었다.
안 그래도 지옥의 풍경이 얼키설키 얽혀있는 새카만 하늘을 누렇게 죽여 갔다.
1세기 전.
대기 오염을 정화할 수단이 없던 시절의 어느 나라 밤하늘이 저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저놈 뭐하는 거지?”
“공격 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번헬리어는 악룡(惡龍)이다.
직접 겪어본 적은 없어도 설정상 악역일 확률이 높았다.
세계관 최종 보스로 추측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라, 놈의 등장 메시지를 봤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지상이 불바다가 될 거라고 걱정했었다.
한데 너무 조용했다.
번헬리어는 단지 비행을 반복할 뿐, 그 외에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무척 빠르다는 것...
레이단 상공에서 포착됐다는 귓속말이 도착할 무렵엔 이미 라인하르트 상공에서 포착됐다.
대륙을 한 바퀴 횡단하는데 소요하는 시간이 분 단위일 것으로 추측됐다.
번헬리어가 궤도를 아주 조금만 낮추고 비행했다면.
지상은 놈이 발생시키는 소닉붐의 충격파만으로 폐허가 됐을 것이다.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생물이었다.
저건 대항해야 할 존재가 아닌 피해야 할 재해다.
그나마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조차 국대전 당시 공개됐던 번헬리어의 레벨과 스탯을 상기하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항할 의지를 상실해갔다.
번헬리어는 단지 날고 있을 뿐인데도 그랬다.
그리드와 사도들이 자리를 비웠다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사람들은 그간 자신들이 얼마나 그리드를 의지해왔던 건지 새삼 깨닫고 말았다.
크롸라라라...
아득히 높은 곳에서 번헬리어의 포효가 들려왔다.
울림의 형태가 마치 웃음소리 같았다.
지금 자신들의 몰골을 보고 비웃는 느낌에 가까웠다.
물론 피해망상일 터였다.
저토록 멀리 있는 번헬리어가 우리의 안색을 살필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게다가 인간의 개체 수는 여전히 수십억 단위다.
인마대전의 여파로 인구가 크게 줄었다지만 번헬리어가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전반적인 분위기를 읽고 비웃는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단 의미다.
물론 어디까지나 인간의 상식에서다.
하찮은 필멸자들의 상식 따위에 얽매이기엔 번헬리어가 너무 위대한 존재였다.
대륙 전역에 펼쳐놓은 감각도.
거미줄보다 촘촘하게 얽힌 그것을 통해 선명하게 전달되는 지상 모든 존재들의 반응과 표정을 번헬리어는 실시간으로 느꼈다.
모조리 정보로 삼고 보다 효과적으로 활동했다.
예를 들어 바다 위를 지날 때면 일부러 파도를 일으켜 수인족의 나라를 덮쳤고, 거대한 카오스 산맥을 지날 때면 인간들의 살 냄새가 바람결에 실리도록 유도해 몬스터들을 광분시켰다.
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겐 추위가 옮겨가도록 유도해 병들게 만들었고 추운 지역에 사는 인간들에겐 더위가 옮겨가도록 유도해 옷을 벗게 하였으며 북극의 빙산이나 사막의 모래를 도시 한가운데에 옮겨놓기도 했다.
마법은 쓰지 않았다.
오로지 ‘비행’이라는 단순한 행위만으로 야기 된 혼란들이었다.
인류의 불안과 혼란이 점차로 거대해져가는 가운데.
[...]
번헬리어가 등장 후 최초로 날갯짓을 멈췄다.
그의 코끝을 스치고 올라간 검기가 기둥처럼 우뚝 서 주변에 흩뿌려진 마기를 차츰 거둬갔다.
번헬리어의 마기에 침식되어 소멸하기는커녕 역으로 흐트러뜨리는 검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용살검>의 기파였다.
[드래곤 슬레이어.]
번헬리어의 새카만 동공이 조금 커졌다.
워낙 거대한 탓에 우주 확장의 축소판을 보는 느낌이었다.
바로 앞에서 마주한 입장에선 그랬다.
단순한 동공의 변화 따위를 통해서 초월적인 감상을 느껴야했고 그 모든 게 압박감으로 작용했다.
혹 목소리가 떨리진 않을까.
염려하며 묵묵히 선 하야테의 자태가 고아했다.
두려움을 내색하지 않고자 애쓰는 이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여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번헬리어가 헛웃음을 흘렸다.
[천 년이라는 시간은 내게도 썩 짧지 않다. 한데 그보다 긴 세월을 숨어 살아온 네가 내 앞에 섰다고?]
하야테 본인이 의식하는 것과 달리, 사실 고룡들은 하야테에게 큰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말해서 진즉에 포기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기가 드래곤의 유일한 상성으로 작용하는 탓이다.
하야테와 결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탑의 봉인은 드래곤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드래곤이기 때문에 식별할 수 없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했다.
포식하고 양분으로 삼고 싶은 열망과 별개로 하야테를 수색하는 게 불가능했단 의미다.
놈이 이 순간 당당하게 앞길을 가로막았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나보구나. 네바르탄을 깨우기라도 했나?]
네바르탄은 번헬리어에게 굉장히 집착한다.
네바르탄이 광증을 겪게 된 원인이 번헬리어의 배신에 있기 때문인데, 이성을 잃은 뒤에도 희미한 기억의 잔재가 남아 번헬리어를 잊지 못하는 듯했다.
번헬리어를 위협하는 몇 안 되는 존재가 네바르탄이란 뜻이다.
[상당히 아쉽군.]
그륵, 그르륵.
번헬리어의 음성에 거친 숨소리가 섞였다.
울림이 있는 숨소리였다.
어째서 저런 현상이 발생하는 건지, 극도로 긴장한 채 집중하고 있던 하야테는 아슬아슬하게 간파해냈다.
‘분노.’
꽈아아아아앙!!
드래곤 레이지의 발생엔 아무런 전조가 없었다.
하지만 하야테는 추측해냈고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마치 거대한 댐처럼 밀려온 번헬리어의 꼬리를 막아낸 후에도 방심하지 않고 중첩 될 충격파에 미리 대비했다.
꽈아아아아앙!!
역시나 드래곤 레이지가 맞았다.
번헬리어는 꼬리를 단 한 번 휘둘렀을 뿐이지만 총 다섯 번의 충격파가 연달아 발생하며 하야테를 덮쳤다. 시간차가 아예 없었다.
하야테는 4회째와 5회째 공격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여태껏 그가 싸웠던 드래곤들은 최대 3중첩 공격만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5회 중첩 공격 자체를 예상하지 못했다.
똑같은 드래곤 레이지도 고룡이 쓸 땐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주륵.
입가에 흘러내린 핏물을 즉시 검기로 흩어낸 하야테가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견뎠다.
충격에 짓눌렸던 몸속 장기를 가까스로 수복시키며 작은 숨결을 토해낼 뿐이다.
다시 작아진 번헬리어의 길쭉한 동공에 오로지 하야테만 담겼다.
주변 하늘을 채우고 있던 다른 지옥의 풍경들을 권능으로 지워버린 여파다.
[확실히, 네게는 가치가 있구나.]
번헬리어가 계산해봤다.
네바르탄의 추적을 따돌리며 본래의 목적대로 혼돈을 채집할 것인가.
아니면 네바르탄에게 발목을 붙잡힐 걸 감수하고 눈앞 용살자에게 집착할 것인가.
판단은 빨라야한다.
잠에서 깨어난 네바르탄이 내 앞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은 지극히 짧다.
[너를 먹어야겠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쌓아올린 업적은 세상에 유일한 것이다.
그를 죽였을 때 얻을 가치는 수백만 개의 혼돈을 수집했을 때 얻을 가치와 비견할 만했다.
게다가 혼돈을 수집하는 건 언제라도 가능한 반면 하야테는 언제 다시 마주칠지 몰랐다.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너는, 내게 죽는다.]
용언이 예언이 되었다.
거부할 수 없는 숙명으로 다가와 하야테를 거세게 압박했다.
용살자의 의지로 저항할 수야 있었지만, 지속되는 압박인 탓에 완전히 뿌리쳐낼 순 없었다.
견뎌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소모되는 정신력이 극심했다.
급기야 표정을 굳힌 하야테가 직감했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
네바르탄의 동면을 깨우기 위해 파견한 수색용 마장기가 성과를 거두기 전에 자신은 죽게 될 것이다.
여기서 고민해봐야 할 문제는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다.
번헬리어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히느냐.
그리드와 결사들이 지옥 달을 없애고 돌아왔을 때 세상이 무사하기 위해선, 내가 어디까지 견뎌내야 하는가.
파지직.
수백 개의 별자리보다 찬란하게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던 용살검의 기파가 한 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하야테의 의지에 호응하여 번헬리어의 심장부를 조준했다.
드래곤 하트의 파괴.
완전한 파괴는 꿈도 꾸지 않는다.
다만 긴 잠에 빠뜨릴 수 있도록 충분한 타격을 입히는 게 목표다.
대가는 나의 목숨.
그 정도 희생을 치르지 않는 이상에야 이룰 수 없는 목표였다.
크롸라라라라라!!
하야테의 의도를 읽은 번헬리어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꽤나 자존심이 상한 건지, 포효하며 수백 종류의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했다.
찰나지간에 5회 중첩 된 드래곤 브레스가 회피 경로를 차단하며 쏘아지고 있었다.
번쩍이는 용살검을 휘둘러 브레스를 베어낸 하야테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의외로 교활한 번헬리어가 인간들의 마법을 사용한 까닭이다.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는 수백 종의 마법 중 일부가 용살검으로 베기 힘든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콰드드드드득!!
홍해처럼 갈라져나가는 새카만 브레스의 틈새로,
쿠콰콰콰콰쾅!!
온갖 종류의 마법 폭격이 쏟아졌고 그중 단 2개의 마법이 하야테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상성으로 작용하는 마법들이었다.
용살검과 별개의 마력을 운용하게끔 강제하고 있었는데, 하야테는 섣불리 마력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고룡은 용살검 외의 기운 대부분을 해석하고 흡수하기 때문이다.
사냥감이 저항할 때 쓰는 힘을 역이용해서 순간적으로 더 강력해졌다.
간과할 수 없는 탓에 망설였고, 절대자 간의 싸움에서 찰나의 망설임은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
쿠우우우웅!!
지평선에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꼬리가 어느새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다.
워낙 면적이 커서 회피는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검을 세워 막은 하야테의 시야 하단에 번헬리아의 눈동자가 스쳤다.
아래로 길게 내린 놈의 기다란 목이 한껏 부풀어 오른 채였다.
브레스의 전조...
피하기 힘든 상황을 정확하게 노려졌다.
중상을 각오하는 하야테의 귓전에 누군가의 음성이 스쳤다.
지금 막 현장에 나타난 원군.
하야테에게도 익숙한 기척이었다.
스카아악!!
당대의 검성은, 바람을 베고 호흡을 끊는 검술을 깨우쳤다.
바람의 정령왕을 베어낸 끝에 얻은 신기(神技)였다.
파스슥!
[대상의 스킬 캐스팅을 취소시켰습니다.]
호흡이 끊긴 번헬리어의 모든 마법과 브레스가 한 순간 발동을 멈췄다.
덕분에 한 숨 돌린 하야테에게 크라우젤이 말했다.
“혹시 기대하실까 저어되어 고백하건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식으로 보조를 맞추는 것뿐입니다.”
상대가 너무 나빴다...
힘들게 성장해서 돌아온 무대에서 하필 드래곤을 만날 줄이야.
크라우젤은 순순히 마음을 비웠다.
다만, 한 가지 진실만큼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하야테가 죽어선 안 된다.
그는 그리드와 더불어 이 세계의 몇 안 되는 희망 중 하나였다.
“기회를 봐서 도망치십시오.”
하야테는 늘 등을 보여주는 입장이었다.
한데 이 순간 타인의 등을 보았다.
그리드에 이은 크라우젤.
아득히 먼 시대의 후손들이 절대자를 지켜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