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8권 - 5화
‘빌어먹을.’
바알의 계약자 자격을 박탈당한 이후.
평화로운 삶에 적응해온 아그너스는 자신의 세상이 바뀔 거라고 믿었다.
잔인한 광경 따위를 더 이상 마주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서 방심했다.
[표현 수위를 심약자용으로 변경합니다.]
다급히 게임 옵션을 바꾼 아그너스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했다.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린 채다.
이제 철창 속 멤피스들은 귀여운 얼굴에 반창고를 붙이거나 몸에 붕대를 두른 수준으로 묘사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금 전 보았던 모습이 잊히진 않았다.
너무 끔찍해서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 됐다.
“...”
바알의 계약자로 활동하던 시절.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그너스는 그 누구보다 잔인했었다.
수많은 민간인을 해쳤다.
바알의 강제 퀘스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선택하고 실행한 일들이다.
애초에 남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면 바알의 계약자가 되지도 않았겠지.
아그너스 본인은 표현 수위를 심약자용으로 고정시켜야 활동이 가능했던 시절이다.
그만큼 많은 피와 눈물을 보았다.
아그너스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과 바알은 다르지 않다.
내게 목숨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철창 속에 갇힌 저 멤피스들의 신세 또한 같았다.
나는, 악마였다.
“맞아. 죄를 잊어선 안 돼.”
“...”
“나도 잊지 않아.”
베티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소녀다.
한데 오래 산 노인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읽어내는 그녀가 아그너스는 도통 적응되지가 않았다.
“바알은 우리에게 죄를 저지를 힘과 권한을 줬을 뿐이야. 죄는 우리가 지은 거야.”
아주 작은 불씨처럼 남아있던 핑계거리마저 빼앗아 가는가.
마음에 방패처럼 둘렀던 바알이라는 이름이 서서히 멀어져가자 아그너스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견뎌내고,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러자 도리어 속이 편안해졌다.
군데군데 균열이 가있던 마음이 완전히 박살난 후 다시 결속 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평생을 속죄해야 해. 그게 우리의 책임이야.”
그러니까 나의 후계자가 되렴.
기회를 틈타서 설득하는 베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아그너스가 고집을 버렸다.
“알겠다.”
과거의 자신을 혐오하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철창 속에서 꺼낸 멤피스들을 보듬어주는 저 여인처럼, 나 또한 짊어져야 할 책임이 많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진짜로 괜찮은 거냐옹...?”
베티의 곁을 맴도는 노에의 얼굴엔 여전히 수심이 가득했다.
상처 입은 동족들의 비쩍 마른 몸을 보자 부끄러운 건지 볼록 튀어나온 뱃살을 앞발로 숨긴 채다.
물론 그런다고 가려질 리 만무했다.
흰 장갑을 낀 듯한 동그란 손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뱃살이 오히려 눈길을 끌었다...
“크르릉...”
“캬아아악!!”
멤피스들은 언어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상처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신음하거나 짐승처럼 울부짖을 뿐이다.
비탄으로 들렸다.
깊은 슬픔과 분노가 느껴졌다.
바알이 훼손시킨 자신들의 몸을 혐오하면서,
자신들이 태어난 이 세상을 증오하면서,
녀석들은 마치 먼 옛날의 아그너스처럼,
또는 아그너스가 해쳤던 사람들처럼 절망만을 품고 있었다.
“응, 괜찮아.”
아그너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반면 베티는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감정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처음으로 보이는 표정의 변화였다.
순전히 멤피스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웃고 싶을 리 없을 텐데도, 타인을 위해 웃는 것이다.
아그너스는 곁에서 잠자코 보았다.
베티의 행동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지 한 번 더 생각해보며 감화되어갔다.
앞으로 바꿔나가야 할 삶의 태도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선배가 맞았다.
“수술을 하자.”
스스로가 언데드이기에 뼈의 구조에 대해선 이골이 났다.
수많은 생물들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실험하며 경험까지 쌓았다.
그간의 공부를 실천할 때였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멤피스들을 품에 꼭 끌어안은 베티가 온갖 도구와 약품을 꺼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가슴과 허리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지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보단 자신이 외면했던 탓에 이런 꼴을 당한 멤피스들의 고통이 훨씬 더 클 테니까.
감히 그들 앞에서 고통을 내색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너, 팔...”
보다 못한 아그너스가 끼어들었다.
품에 안은 멤피스에게 어깨를 물린 베티의 팔이 떨어질 듯 흔들려대는 탓이었다.
베티가 고백했다.
“내가 이 아이들의 부모를 여기에 잡아왔었어.”
수백 년 전.
바알의 명령을 따랐었다.
지옥의 멤피스들을 포획해 이곳에 가둬버렸다.
이후로 멤피스들이 고문당했던 광경은... 그녀가 매일 밤 꾸는 17가지 악몽 중 2번째 악몽으로 무한히 되풀이되어 왔다.
잠들 수 없는 언데드가 되고도.
매일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움에도 무의식에 떠오르는 악몽들에게 수백 년을 시달려온 것이다.
“내가 책임져야하는 거야.”
악몽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연한 의무야.”
“...”
***
하늘을 장악하고 있는 지옥의 풍경을 주시하는 사람은 전체에 비해 적은 편에 속했다.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녔다.
지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플레이어였고, 심지어 그들조차도 그리드와 사도들, 혹은 결사가 있는 현장을 발견해야만 상황을 주시했다.
그 외의 현장들은... 당연하게 외면했다.
굳이 보아 봤자 이로울 게 없었으니까.
악마나 마물에게 처참하게 사냥당하는 사람들을 봐서 얻는 게 혐오감과 불안감밖에 더 있겠는가.
“켄...? 저 사람이 결사 중에서 제일 강한 건가?”
무투가 켄.
탑의 결사 중 하나인 그는 유독 기이한 상황들을 연출했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마물과 악마들은 하나 같이 머리가 터져 죽는 것이다.
애초에 폭탄이 설치되어있었던 것처럼 그냥 폭발해버렸다.
두 눈으로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
결국 커뮤니티 곳곳에 분석 영상이 올려왔다.
수백 배 느리게 재생해야 비로소 흐릿하게 보이는 흔적이 있었다.
무투가 켄은 발이나 주먹 따위로 악마들을 ‘때려죽인’ 것으로 보였다.
동작을 연계할수록 무지막지한 가속력이 붙는 패시브 스킬을 지닌 듯했는데, 그 동작이라는 게 작은 턱짓 등의 별 의미 없는 행동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추측됐다.
그래야만 상시 쾌속을 유지하는 게 설명됐다.
“저 거인들이 훨씬 센 거 같은데.”
처음에 사람들은 아벨리오가 최강인 줄 알았었다.
그리드와 하야테를 그림으로 현현시켜서 싸우는 존재라니.
직업을 화가로 바꾸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삐까소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단 몇 시간 만에 급격히 높아졌다.
삐까소의 미래에 기대를 건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 다퉈 후원을 제안했을 정도다.
막말로 찰나지간에 그런 사회 현상을 만들 정도로 필시 아벨리오는 대단했다.
하지만 그에겐 명백한 약점이 있었다.
그림에 깃드는 힘에 한도가 있다는 점이었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림을 그리는 동작 자체가 봉쇄당하면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제8위 대악마 바르바토스의 저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낭패를 겪음이 증거다.
반면 거인족 형제는 항시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다.
라드볼프는 키가 15미터에 육박하는 초대형 마장기에 탑승한 채 별도의 마장기 10기를 원격 조종했는데 말 그대로 로봇 군단이었다.
악마들이 그를 상대론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심지어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게 당연했다.
라드볼프는 지옥 원정에 앞서 마장기를 대드래곤 병기가 아닌 대악마 병기로 최적화시켰으니까.
프론잘츠야 말 할 것도 없다.
지혜의 탑의 좌석은 실력 순이 아니지만 오직 2좌만큼은 예외다.
프론잘츠가 2좌에 앉은 이유는 그에게 하야테를 대행할 자격이 있어서였다.
하물며 최근엔 그리드 덕분에 과거의 힘마저 되찾은 실정이다.
신의 원.
완전을 상징하며 고대 거인족의 전성기를 이끌던 역대 최강의 아티팩트.
멸망한 거인족의 의지를 이은 존재가 바로 프론잘츠였다.
그가 강하지 않으면 그건 죄악이다.
“전반적으로 상황이 괜찮아서 다행이야. 이거 진짜로 승산이 있겠어.”
바알이 보여준 힘은 압도적이었다.
그리드와 사도들이 뭉쳐봤자 상대가 안 될 거란 확신이 들 정도였다.
한데 여태껏 몰랐던 비밀 결사들이 그리드 일행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하야테가 이끈다는 지혜의 탑의 결사들.
하나 같이 고강했다.
없었던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다만 의외의 문제점이 있다면...
“그리드가 고전하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제20위 대악마 엘리고스의 존재였다.
이제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엘리고스가 서열과 무관한 무력을 지녔음을 대번에 알아봤다.
그만큼 그리드와 치열하게 싸웠다.
어지간한 한 자릿수 대악마는 가뿐히 초월하는 실력자였다.
원인은 특수한 권능에 있는 듯했다.
궤도를 장악하는 능력.
엘리고스가 거대한 방 안에 섰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방의 크기는 관계가 없다.
엘리고스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을 자신이 원하는 궤적으로 날릴 것이며, 원하는 시점에 지점으로 타격시킬 것이다. 이때 공이 어떤 방향으로 튕겨나갈지 결정하는 것 또한 엘리고스다.
무한궤도.
엘리고스는 그리드의 공격을 끝없이 받아치고 흘려냈으며 이를 토대로 자신이 유리한 상황을 상시 유지했다.
자신은 별다른 타격을 허용하지 않고 그리드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처 하나 없는 그리드가 엘리고스보다 훨씬 더 무서운 괴물로 보였지만 아무튼 그리드의 발이 묶인 것이다.
지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였을 그리드가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릴 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걱정했지만...
‘괜찮아. 시간은 내 편이다.’
정작 그리드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첫째, 현재 지옥에 갇힌 사람은 대부분 플레이어다.
둘째, 이민족 왕들을 비롯한 소수의 NPC들은 지크가 최우선 순위로 구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전이 마법 함정에 당했던 순간 지크가 걱정 말라는 전음을 보냈으니 믿음이 갔다.
셋째, 어차피 지옥달의 위치를 찾는 건 메르세데스의 역할이다. 그녀가 달의 정확한 위치를 포착할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입장이었다.
넷째, 갓 핸드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숫자가 100개로 늘어난 갓 핸드가 인공 감각을 펼쳐놓는 한편 태극권을 구사하는 식으로 엘리고스의 장점을 일부 상쇄키는 중이다.
처음엔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어하는 눈치였지만 차츰 적응하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엘리고스를 보고 배우는 듯한 태도랄까.
‘두 번 다신 만나기 힘들 경험치통이다.’
따앙, 따앙, 따앙...
또 다시 인공 감각을 돌파하고 들어온 창격을 허용한 그리드가 망치로 갑옷을 수리하면서 웃었다.
엘리고스는... 지쳐가고 있었다.
아무리 힘껏 찔러도 꿰뚫리지 않는 갑옷.
힘겹게 균열을 내봤자 즉시 수리가 되어버리니 뭘 어쩌라는 건지 도무지 답이 없었다...
같은 시각, 지상.
“...?”
땅을 보고 걷던 사람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밤이 찾아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크고 짙은 그림자가 대지를 뒤덮은 까닭이다.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무언가가 상공에 나타났다는 증거였다.
전설 속 부유성이라도 실재하는 게 아닌 이상 떠올릴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크롸라라라라라!!
드래곤이다.
[악룡 번헬리어가 출현하였습니다.]
단 한 줄의 월드 메시지.
하지만 파급력만큼은 역대급으로 컸다.
그리드의 서사시 이상이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머리가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