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65화 (1,563/1,794)

템빨 78권 - 4화

슬라임처럼 꿈틀거리는 수백수천 개의 알.

하나하나가 자신의 몸집보다 커다란 그 알들을 바라보면서, 아그너스는 체파르데아와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사실상 체파르데아 혼자서 지껄였던 말들이다.

바알 전하는 위대하다.

나는 오직 바알 전하만을 믿는다.

그분께 버림받을지언정 나는 그분을 위한 찬가를 부를 것이다.

놈이 말했던 ‘버림받다’의 범주는 어디까지였을까?

살해당하고, 살해당한 기억을 지워지고, 다시 부활해 노리개로 지내다가 또 다시 살해당하고, 잊고, 부활하고, 죽고...

과연 체파르데아는 그 참혹한 윤회마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장담한다.

“미친 새끼가...”

잠시 호흡을 고르던 아그너스가 이내 욕설을 토했다.

체파르데아에게 연민을 느끼는 게 아니다.

놈은 동정 받아선 안 될 악마니까.

애초에 아그너스는 체파르데아와 지킬 의리 따위가 없었다.

다만 바알이 혐오스러울 뿐이다.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졌다.

체파르데아가 가장 중요한 국면에 선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온 바알이 놈에게 갑작스런 폭력을 행사하고,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여가면서 진실을 전하는 모습이.

바알은 아주 천천히, 음미하듯 지껄여댈 것이다.

너는 내게 어떤 종류의 배신을 당해왔고,

몇 번째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

또 다시 태어나 이 순간을 망각할 것이다.

그럼 또 처음부터 반복이다...

이유?

그런 건 생각 할 필요가 없다.

바알의 선택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일이기에.

놈은 다만 쾌락을 추구할 뿐이고, 놈이 원하는 쾌락의 형태가 대체적으로 잔혹할 뿐이다.

그게 전부였다.

약자를 괴롭히는 우리네 흔한 이웃들처럼.

“바알이군. 놈이 체파르데아를 계속해서 죽이는 거야.”

“맞아.”

아그너스가 내린 결론을 베티가 확인시켜줬다.

체파르데아는 무엇이기에 끝없이 부화하고 부활하는가.

어째서 기억을 잃는 것이며 바알과는 정확히 어떤 관계인가, 등등.

아그너스는 여러 의문을 느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바알이 엮인 일들엔 호기심을 안 품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으니까.

다만 굳이 확인하고 싶은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베티의 정체였다.

“넌... 뭐냐? 뭔데 이곳을 아는 거지?”

멤피스가 갇힌 우리로 향하는 길목.

체파르데아의 알이 양식되는 공간이기도 한 이곳은 지옥에서도 몹시 은밀한 구역이었다.

한데 아그너스와 필시 ‘다른 곳’에 전이됐었을 베티가 이곳에 나타났다.

게다가 체파르데아와 바알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시사하는 바가 컸다.

“혹시 전 바알의 계약자냐...?”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소녀.

아그너스가 설마하는 심정으로 묻자 베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버려진 장난감.

재미없는 실패작.

스르륵...

베티가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바로 알몸이 보였다.

쇄골 아래부터 골반까지 백골화가 진행 된 몸.

전반적으로 아그너스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나는 네 선배야.”

“...자랑이라고 지껄이는군.”

잠시 넋 나간 표정으로 베티를 바라보던 아그너스가 칫, 혀를 찼다.

그녀가 벗어버린 로브를 던져주면서다.

베티는 늘 그랬듯이 무표정했다.

이 역겨운 몸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다만 빠르고 효과적인 전달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던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가 아주 살짝 커졌다.

“미쳤나? 여자애가 왜 함부로 옷을...”

아그너스가 작게 짓씹는 불만을 들어서다.

말투가 상당히 거칠긴 했지만 그리드가 보여줬던 반응과 닮았다.

흉측한 괴물인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본성을 알 것 같았다.

과연 바알에게 버림받은 이유가 있었다.

아그너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해줘도 될 거란 확신을 재차 품은 베티의 마음이 편해졌다.

“넌 내 후계자야.”

“뭐? 다짜고짜 무슨 개소리...”

“바알은 잔인하고 철저해.”

“그걸 누가 모르...”

“네가 아는 것보다 더.”

“...”

“바알과의 계약이 파기됐을 때 우리가 구속당한 건 육체가 아닌 영혼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해.”

영혼을 잃은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아그너스가 백골화를 겪는 원인은 그의 몸에서 서서히 영혼이 이탈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의 이탈로 인한 생명의 소실이 발생시키는 현상이란 의미다.

“이 순간에도 네 영혼은 바알에게 스며들고 있어. 언젠가 완전하게 바알의 손아귀에 쥐어지는 순간 네 몸은 네 것이 아니게 돼.”

바알에게 통제당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용당한다.

플레이어인 아그너스의 경우엔 강제 퀘스트를 떠안는 식이었다.

기간 내에 완수하지 않으면 큰 페널티가 발생하는 퀘스트들.

“사제지간이 되는 건 아니야. 단순히 내 지식을 계승하면 돼. 그걸로 영혼의 이탈을 막을 수 있어.”

기연.

모든 플레이거가 꿈꾸는 순간이 아그너스에게 닥쳐왔다.

누구라도 쌍수 들고 환영할 터였다.

하지만 아그너스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경계심을 드러냈다.

“나의 뭘 보고?”

지금 아그너스는 베티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바알이라는 기연을 얻고 긴 세월을 방황했던 그는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에 함부로 의지했다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두려웠다.

베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흐트러지는 단발이 순진무구한 표정과 잘 어울렸다.

“바알에게 버림받았잖아.”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

베티의 말에 담긴 뜻을 읽은 아그너스가 침묵했고,

“나중에 내가 찾아갈게.”

다음을 기약한 베티가 슬며시 앞으로 나아갔다.

체파르데아의 알들은 없앤다고 해서 별 의미가 없는 건지, 그냥 지나쳐서 협곡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멤피스들의 우리가 있는 방향이 맞았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군.’

바알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멤피스들을 처치하는 것이다.

유체화라는 사기적인 이동 스킬을 상시 운용 가능하고 전기의 장벽을 펼치는 걸로 모자라 대상의 능력치를 탈취하는 등, 멤피스는 몹시 강력하고 까다로운 마수였으니까.

하물며 바알에게 학대당해온 멤피스들은 이성을 잃은 괴물이다.

그리드의 노에와 비교해서 공격성이며 맷집이 훨씬 더 뛰어났다.

만약 바알이 놈들을 사방팔방에 풀어놨다간 이쪽의 피해가 커졌다.

“...”

베티가 앞장서고 아그너스가 뒤따라 걷는다.

아그너스는 베티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쭉 고통만 받아온 아이들.

멤피스들을 해쳐야한다는 사실에 괴로운 거겠지.

“내 발걸음이 무거운 게 아니야.”

“...?”

“내 걸음걸이에 네 마음을 투영하는 거야.”

흑요석에 비추는 아그너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베티는 말했다.

“쓸데없는 헛소린 관둬라.”

내심 뜨끔해진 아그너스가 고개를 돌렸다.

흑요석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베티의 시선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꽤 오랫동안 흑요석 암벽을 따라 걷던 두 사람은 어느새 커다란 던전에 도착했다.

그곳의 구조는 미로 같았다. 몹시 복잡하게 얽힌 길목들이 방향 감각을 상실시켰다. 어떤 주술적인 힘도 있는 듯했다.

몇 년 전에 바알을 따라 왔던 곳임에도 헷갈렸다.

머리에 안개가 낀 감각.

아그너스는 몇 번이나 머뭇거리는 반면 베티는 쑥쑥 나아갔다.

“길을 모르는 게 아니야. 네 마음이 망설이는 거야.”

여전히 허튼 소리를 지껄이면서다...

아그너스가 무시하는 가운데.

“니야아아옹!!”

날카로운 고양이 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우리에서 탈출한 멤피스인가?

뼈로 방패를 만들어 세운 아그너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칼이 아닌 방패를 만든 건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안 됐다.

덥썩!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멤피스가 우뚝 멈췄다.

베티의 작은 손에 대가리가 붙잡혔기 때문인데 멤피스가 유체화 상태인 점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마법을 몸에 귀속시켰나?’

조금 감탄하던 아그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멤피스의 털이 보송보송해서였다.

둥그렇게 예쁜 얼굴에 작은 흉터조차 없었다.

바알에게 학대당한 멤피스들은 하나 같이 참혹한 몰골이었는데 완전히 멀쩡한 것이다.

당연했다.

지금 베티에게 붙잡힌 멤피스는 바알에게 붙잡힌 멤피스가 아닌 노에니까.

“내 동족들을 해치지마라냥!!”

멤피스의 고향은 지옥이다.

지옥에서 비로소 온전한 힘을 발휘했고, 어떤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한도 강해졌다.

주인과 멀리 떨어진 채 독단적으로 활동할 수 있단 의미다.

안 그래도 좋은 주인을 만나 별다른 제약 없이 활동해온 노에는 지옥에서 더욱 큰 자유를 얻었다.

지옥에 도착해서 전이 마법에 걸렸을 당시.

어렴풋이 들려오는 동족의 슬픈 울음소리를 우연히 듣고 여기까지 날아왔다.

당연히 그리드가 허락해줬다.

“도, 돌아가라냥! 이 이상 못 간다냥!”

노에는 제 방에 멤피스의 해부 표본을 장식해놓은 베티가 무지막지하게 두려웠다.

하지만 어떻게든 용기를 쥐어짜냈다.

덜덜 떨면서도 성체로 변신할 낌새를 드러냈다.

싸우겠다는 의지다.

녀석의 동그란 이마를 베티가 쓰다듬어주었다.

“걱정 마. 도우러 온 거야.”

“...!”

노에와 아그너스가 움찔 놀랐다.

그들은 베티가 당연히 멤피스들을 해칠 줄 알았으니까.

사실 그것 말고는 해답이 없기도 했다.

이곳에 갇혀있는 멤피스들은 죄다 이성을 상실한지 오래다.

풀어놔봤자 결코 이롭지 않다.

나중에 발목을 붙잡히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조금 의아해하는 둘에게 베티가 설명했다.

“구할 수 있어. 다른 아이가 희생해준 덕분에.”

그 아이란, 당연히 베티의 실험실에 있는 멤피스를 뜻한다.

해부 표본이 되어준 멤피스.

그 아이를 통해서 베티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었다.

저 너머 우리에 갇혀있는 멤피스들의 광란을 잠재우고 이성을 되찾아 줄 방법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흐냐앙...”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이는 노에.

녀석은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금 전 크게 성장했다.

마수가 본능을 거역하고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다.

앞으론 드래곤을 만나도 조금 더 잘 견딜 수 있을 터였다.

쿠르릉...

어느 지점에 도달한 베티가 어떤 주문을 외우자 석실의 문이 열렸다.

엄청 거대한 공동의 풍경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어두웠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새카만 공간 속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고기가 썩으면 이럴까 싶었는데, 차츰 어둠에 적응한 시야가 진실을 알려줬다.

철창 속에 갇힌 멤피스들의 살이 군데군데 썩어있었다.

뽑혀선 덜렁거리는 두 눈알이 썩어문드러지다 못해 미라처럼 메마른 녀석도 보였다.

입과 사지가 결박당한 탓에 그 몰골 그대로 철창에 매달려 있다...

팔다리 몇 개가 없는 아이는 예사였다.

다른 생물의 팔다리를 귀나 목 따위에 이어 붙여진 아이들은 제 의지와 달리 꿈틀거리는 그것들 탓에 제대로 몸을 뉘이지도 못했다.

“...”

할 말을 잊고 몸을 떠는 노에에게 베티가 속삭였다.

“괜찮아.”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