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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62화 (78권) (1,559/1,794)

템빨 78권 - 1화

바알의 심복들이 콧대가 높은 이유는 그들 자신이 살아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지옥이 망자들을 위한 낙원이던 시절.

바알의 심복들은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었다.

베리아체 파벌과의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셀 수 없이 넘기며 바알에게 힘을 보탰다.

감히 베리아체와 직접 맞선 적은 없어도, 그녀의 최후에 조금쯤은 일조했단 의미다.

자부심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에 겪은 일들은 대부분 하찮게 취급했다.

치매에 걸린 것과는 달랐다.

베리아체의 세력이 악몽처럼 강력했기에, 이후 만난 존재와 사건들을 상대적으로 쉽게 인식했을 뿐이다.

그들이 이 순간 느끼는 ‘공포’는 대단히 각별했다.

‘템빨신의 사도 피아로.’

‘신급. 대적 불가의 상대다.’

물론 신이라고 해서 다 강력한 건 아니다.

악마이되 인간에게 사냥당하는 병신들이 있듯이, 신 역시 죄다 전능하진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들이 기적을 행사할 줄 알았다.

사람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종종 무력 이상의 권능을 발휘하곤 했는데, 지금의 피아로가 그랬다.

화기를 다스린답시고 반응이 둔해지는 등, 피아로의 기본적인 실력은 소문대로 약했지만 화기의 운용에 성공하자마자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부족한 무력과 상반되는 압도적인 권능이었다.

그러므로 굳이 신급이라고 판단했다.

‘전면전은 불가하다만... 해답이 없는 건 아니다.’

심복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눈에 띌 듯 말 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알을 따르면서 수천 년을 연명해온 노괴답게 그들의 상황 판단은 굉장히 빨랐다.

피아로의 기적이 ‘자연’의 힘을 빌리는 것임을 간파했다.

뒤늦게 나타나 비바람을 불러일으킨 잡놈을 최우선 순위로 죽여 없앤 뒤 근처의 화기를 모조리 사그라뜨리기로 작전을 짰다.

피아로의 방해를 걱정하진 않았다.

비바람으로 폭풍을 일으켜 덮쳐올지언정 그것에 ‘속성’이 담기는 이상 마기로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었으니까.

일단 폭풍을 돌파해서 저 잡놈을 죽이면 모든 게 수월해진다...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방향을 정한 심복들이 산개했다.

누군가는 땅으로 꺼졌고, 또 누군가는 하늘로 솟구쳐 올라 유령마의 등에 올라탔다.

끼히힝!

야생의 유령마가 몸서리쳤다.

감히 자신의 등에 올라탄 악마를 떨쳐내기 위해 등을 위아래로 들썩이며 고개를 털어댔다.

심복은 이때 일렁이는 화염을 이용했다.

지옥에 존재해선 안 될 밀밭.

피아로에게 이롭게 작용할 그 황금빛 땅으로 유령마의 푸른 불꽃이 쏟아지게끔 유도했다.

피아로가 움직이는 비바람이 불을 진압하기 위해 움직일 거라고 예측하면서다.

비바람의 경로를 제한해 동료가 진입하기 쉬운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화기를 다스리는 속도가 몹시 느렸지. 비바람을 움직일 수밖에 없을...’

심복의 생각이 도중에 멈췄다.

벼락처럼 날아든 무기가 두 눈을 꿰뚫고 들어와 뇌를 들쑤신 까닭이다.

몹시 기이한 형태의 무기였다.

삼지창의 날을 크게 꺾어놓은 모양새였는데, 표적을 긁어내고 들추기 좋아보였다.

쇠스랑이었다.

하지만 악마는 농기구를 모른다...

‘인간이 이토록 잔인한 무기를?’

가죽과 살을 긁어내고 몸속 장기를 모조리 끄집어낼 것만 같은 무기를 휘둘러 대다니?

최근의 지상엔 악마보다 사악한 인간들이 득실거린단 소문을 떠올린 심복이 발악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머릿속에 박혀있던 쇠스랑이 지렛대의 원리로 두개골을 열어버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일단 살아만 있으면 두개골쯤이야 다시 붙이고 쏟아진 뇌수들도 재생시킬 수 있었다.

그래,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뭐냐?”

유령마의 등을 박차고 한층 더 도약한 심복이 흠칫 놀랐다.

피아로가 머리 위에 있었다.

이동 경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위치였다.

‘나보다 빠르다고?’

신체능력은 우리와 비교해 한참 뒤떨어지는 거 아니었나?

이건... 이건 뭔가 잘못 됐다. 뇌가 망가져서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거다...

의심하면서도, 심복은 낫을 휘둘렀다.

그리고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표적이 출수하는 기척을 똑똑하게 느끼면서다.

“이건...”

서걱!!

“검...술?”

피아로는 자신의 과거를 버린 적이 없다.

아스모펠과의 악연을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 지었듯, 힘들게 쌓아올린 검술 역시 버리지 않고 갈무리했다.

농기구술로 승화시켰다.

그가 휘두르는 농기구는 땅을 뒤집고 연마하며 작물을 심되 적을 베는 무기였다.

생과 사를 아우른단 의미다.

그 안에 담긴 기술뿐만 아니라 상징성부터가 엄청났다.

무쌍심법이 위력을 보태주기도 했다.

낫의 밑면을 매끄럽게 타고 내려온 호미에 목젖을 따인 심복이 끄윽, 끅,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피거품을 토해대는 가운데.

“최악의 수를 뒀구나!”

앞서 땅 밑으로 파고들어 피아로를 노렸던 심복들이 소리치며 다가왔다.

지상에서부터 솟구치는 중이었다.

놈들의 등 뒤로 펼쳐진 거대한 밀밭의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죽음의 기운에 뒤덮여 황금빛을 잃고 재가 되어 흩날렸다.

피아로가 상공의 심복을 노리는 동안 피아로에게 이롭게 작용할 밀밭부터 제거한 것이다.

과연 산전수전 다 겪은 노괴들다웠다. 실시간으로 변모하는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며 최선의 수를 찾아냈다.

“이곳은 더 이상 네 구역이 아니다!”

구역보단 성역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심복들은 피아로가 행사하는 기적이 어지간한 신의 기적보다 대단하단 사실을 눈치 챘으나 그것을 굳이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자신들의 ‘인정’이 자칫 신앙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꽈르릉!

두 심복의 협격이 피아로를 몰아붙였다. 중상을 입은 동료가 회복할 틈을 마련해줄 의도로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이길 생각은 없었다.

시간을 버는 걸로 족하다고 판단했고, 그들에게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있었다. 지금의 지옥을 만든 주역들이기에.

끼히힝!

휘몰아치는 마력에 놀란 유령마가 멀찍이 도망쳤다.

물론 앞서 자신의 등에 올라탔던 악마 놈의 등짝을 걷어차는 일을 잊지 않았다.

안 그래도 중상을 입었던 심복이 비명을 지르며 땅에 처박혔다.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곧 회복할 동료와 협공하며 퇴로를 마련할 생각이던 심복들의 계획이 틀어진 탓이다.

“저 미친 말 새끼가...!”

으르렁거리던 심복들의 얼굴에 이내 화색이 돌았다.

작전의 근간이 되었던 계획이 실행되기 직전임을 엿본 것이다.

총 넷이었던 심복 중 하나.

아까부터 자취를 감췄던 놈이 라우엘의 눈앞에 도착해 있었다.

라우엘이 죽으면 비바람이 멎는다.

피아로가 다시 약해지고 퇴로가 열린다.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가 악마들의 의도를 파악하며 침음했고,

퍼엉──!!

악마의 주먹이 라우엘의 얼굴에 꽂혔다.

가죽 터지는 듯한 소음이 무지막지하게 크게 울렸다.

살점이 나부껴댔다.

라우엘의 머리가 쪼개진 것이 아니다.

라우엘을 공격한 심복의 가슴이 찢겨나간 여파였다.

“...!?”

예상치 못한 사태에 악마들이 경악했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라우엘의 손에 <통한의 철선>이 쥐어져 있었다.

통한의 가시를 모티브로 만든 아이템.

대상에게 체력에 비례하는 데미지를 입힌다.

네임드급 대상에겐 효과 발생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대상에겐 거의 필살의 무기로 작용했다.

숫자가 많은 까닭일까.

바알의 심복들이 네임드 판정을 못 받는 게 다행이었다.

[<템빨신의 애정이 담긴 천 갑옷>의 사용 횟수가 소진되었습니다.]

게다가 라우엘은 그리드의 템빨로 무장하고 있었다.

약한 본신을 지켜줄 방어구들.

비록 사용 횟수엔 제한이 있었지만 일정량 이상의 데미지를 흡수하는 성능을 지녔다.

그런 게 부위별로 있었다.

그리고 라우엘이 착용할 수 있는 방어구는 총 5개다.

적어도 5번의 공격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그리드의 최측근을 암살하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놈...!”

잠시 당황하던 심복이 라우엘을 재차 공격했지만, 늦었다.

다른 심복들을 해치우고 합류한 피아로에게 목이 베여 죽어버렸다.

“후훗, 옛 생각이 나는군요. 귀공과 함께 전장을 휩쓸던 나날들 말입니다.”

오래간만에 대량의 경험치를 얻은 라우엘이 들떠서 말했다.

한꺼번에 12개나 오른 레벨을 보고 황홀해져선 한쪽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덮었다. 눈동자가 한 순간 영롱한 빛으로 물들었고 흑염룡이 점멸해댔다.

피아로는 굳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지상에서 환호하고 있을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스르륵.

죽은 심복들의 그림자에서 아수라의 파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복들의 힘을 흡수한 4개의 파편.

꿈틀꿈틀 움직이며 하나로 합쳐진 그것이 물끄러미 피아로를 응시했다.

“이번엔 죽을 각오를 해야겠구려.”

“저야 얼마든지요. 다만 귀공께선 안 됩니다.”

***

“...”

아벨리오는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넋이 나가있었다.

그리드의 충신이자 연인.

이야기로만 들었던 메르세데스는 무척 어여뻤다.

외모와 예법에 군더더기가 없어서 절로 호감이 생겼다.

하여 손주의 친구를 대하는 느낌으로 그림을 그려주었건만...

낱낱이 분석당하고 소멸당해 버렸다...

드래곤에게도 겪지 못했던 일이라 실로 충격적이었다.

수백 년을 살며 연마한 기술이 부정당한 기분이 들어서 괴로웠다.

“쿨럭, 쿨럭.”

주화입마에 빠진 아벨리오가 급기야 피를 토했다.

단전까지 내려온 백색의 수염이 군데군데 붉게 물들었다.

그를 노리는 악마들이 있었다.

무려 16위 대악마가 친히 이끄는 군단이었다.

수천 마리의 악마가 아벨리오를 둘러쌌다.

“악마라... 과연, 기운만 봐서는 드래곤보다 흉흉하구나.”

허공에 가볍게 휘두른 붓으로 물방울을 만들어낸 아벨리오가 그것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수염을 쓸어내렸다. 닦여 나온 핏물이 땅을 적신다.

동시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수백 마리의 악마가 전멸했다.

하나 같이 무언가에 쥐어 짜이기라도 한 것처럼 뒤틀려 죽었다.

자신의 수염을 도화지로 삼은 아벨리오가 수염에 묻은 피를 전장으로 묘사한 여파다.

그의 손이 그 전장을 쥐어 짠 시점부터, 일정 이상의 격을 지닌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죽음은 필연이었다.

“괴물 같은 늙은이로군...”

16위 대악마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악마인 놈의 눈에도 아벨리오가 괴물처럼 보였다.

드래곤과 싸우는 인간들이 있다는 풍문이 헛소문이 아니었음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하지만 딱히 동요하진 않았다.

한낱 악마들의 그림자에도 아수라의 파편이 작게나마 깃들어 있었으니까.

여태까진 존재를 숨기느라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지만 이젠 달랐다.

수백 마리 악마의 죽음은 수백 마리 아수라의 소환 의식이나 다름이 없...을 진데, 왜?

죽은 악마들의 그림자가 미동도 않고 조용하자 당황하는 대악마에게 아벨리오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숨는다는 행위 자체가 보통은 약자를 뜻하는 법이지 않나. ‘그림자에 숨은’ 아수라의 파편들은 격이 몹시 낮은 게 아닐까 싶네만.”

“너는... 여기서 반드시 죽어라.”

어쩌면 저 늙은이가 가장 위험하다.

빠르게 판단한 대악마가 즉시 아벨리오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아벨리오의 붓은 이미 하야테를 그리고 있었다.

비록 실제처럼 강하진 않아도 명색이 드래곤 슬레이어의 초상화였다.

콰르르릉!!

묵빛으로 흩날리는 용살검이 우레 소리를 내었다.

그 옛날 드래곤과 싸웠을 때의 모습이다.

대악마의 몽둥이를 무처럼 썰더니 이내 목덜미까지 파고들었다.

질색한 대악마가 뒤로 크게 물러섰고, 예측하고 있던 아벨리오는 때맞춰 두 번째 그림을 완성했다.

살(殺)을 찔러 넣는 템빨신의 초상이었다.

콰드득!!

그리드와 하야테의 협공을 견디지 못한 대악마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서사시에 똑똑히 기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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