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7권 - 21화
‘뭐야?’
무작위 전이 마법에 휩쓸린 그리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주변을 살피던 그가 월드 메시지를 보고 당황했다.
지옥에 강림하신 신께서 윤회의 강에 도착하셨다. 울부짖는 원혼들을 따스한 신성으로 위로하심에 악마들이 당혹하였다...
그리드는 단지 함정에 빠졌을 뿐이다.
한데 서사시가 그의 행동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미화하고 있었다.
낯이 뜨거울 지경이었지만 그리드는 상황을 납득했다.
‘대규모 서사시.’
본래부터 서사시엔 규칙성이 적다.
화자며 형식 따위가 수시로 바뀌었다. 어떨 때는 감정을 자극하는 음률을 이뤘고 어떨 때는 무미건조한 역사에 그쳤다.
이번 서사시가 쓰이는 방식이나 양식이 평소와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20번째 서사시라는 기념비적인 이유로 특별 취급을 받는 건 아니었다.
순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상황의 특수성이 서사시의 규모를 무지막지하게 키워놨을 뿐이다.
[20번째 서사시를 시작합니다.]
[차원을 넘어 <지옥>까지 파급력이 미치는 대규모 서사시입니다.]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으므로 서사시의 내용과 결과를 예상하지 못합니다.]
[당신을 지켜보는 사람이 몹시 많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당신의 신도이므로 당신의 행보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입니다.]
바알은 그리드를 은밀하게 유혹한 적이 없다.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도발했다.
윤회의 강에 붙들린 사람들의 영혼으론 부족하냐는 듯이, 지옥에서 활동 중인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버렸다.
지상의 하늘을 끔찍한 지옥의 풍경으로 물들이기까지 했다.
사실상 선전포고였다.
그리드는 외면할 명분이 적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만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옥 길에 올랐다.
대부분의 인류가 윤회의 강에 당도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20번째 서사시는 그들의 눈과 입을 통해 쓰이는 성전인 것이다.
그리드 개인과 사건의 중심인물들에 의해 쓰였던 기존까지의 서사시완 궤를 달리했다.
“흠...”
그리드가 발에 걸리는 돌을 걷어차 보았다.
파스슥!
충격을 견디지 못한 돌이 재가 되어 흩날렸고,
[신께서 지옥의 상징물을 부쉈다. 그 위엄에 질색한 악마들이 자신의 운명을 엿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월드 메시지가 이어졌다.
“...”
이러다가 책 몇 권 쓰겠는데?
진지하게 생각해본 그리드가 되도록 언행을 조심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그때였다.
“템빨신...”
그리드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것은 개였다.
세 개의 대가리를 지닌, 지옥의 파수꾼.
지상에도 가끔 출몰하는 켈베로스의 본신, 혹은 근원으로 신화급의 마수다.
과거에 처음 봤을 땐 그 엄청난 크기와 마기에 위축됐었을 정도다.
실제로 켈베로스에 올라 탄 흑기사 엘리고스는 강력했다.
[제20위 대악마, 윤회의 강을 수호하는 흑기사 ‘엘리고스’가 출현하였습니다.]
[엘리고스는 생(生)을 부정합니다. 당신의 종족이 언데드로 변경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엘리고스는 종종 월권을 행사하여 영혼의 윤회에 간섭합니다. 엘리고스에게 사망 시, 50퍼센트의 확률로 ‘부활 불가’의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페널티가 발생할 경우 24시간 동안 재접속이 불가능합니다.]
[저항에 실패합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마수 ‘켈베로스’를 목격하였습니다.]
[켈베로스의 여섯 개 눈동자를 마주하고 깊은 절망에 휩싸입니다. 감각에 문제가 생깁니다.]
[켈베로스의 숨결에 화염 내성과 냉기 내성, 중독 내성이 대폭 저하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순위에 어긋나는 무위.
어지간한 한 자릿수 대악마쯤이야 초월하기에 윤회의 강을 책임진다고 했던가.
사리엘은 그가 천상의 신들이 경계하는 악마 중 하나라고 했다.
그리드와 사도들을 물러나게 만들었을 정도로 엘리고스의 존재감은 엄청났었다.
하지만 당시의 그리드와 사도들은 지옥 페널티를 심하게 겪고 있었다.
브라함은 여전히 힘을 되찾기 전이었고, 그리드와 사도들은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었다. 당연히 지크도 없었다.
“무슨 배짱으로 홀로 강에 발을 들인 거지?”
엘리고스의 질문이 미묘했다.
그리드가 강제 전송 됐을 거란 가능성은 염두에도 두지 않은 눈치.
현재 지옥의 상황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순진한 반응이었다.
‘독자적으로 활동한다는 건 사실인가 본데.’
20번 지옥은 지옥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다.
윤회의 강뿐만 아니라 지옥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개의 아가리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어중이떠중이가 20번 지옥을 지배할 순 없는 것이다.
엘리고스는 무위 이상의 권력을 지녔으며 구속되지 않았다.
바알과 아모락트 어느 쪽도 그를 통제하지 못했다.
물론 윤회의 강을 지금의 상태로 변질시킨 바알과 정치적으로 가까울 가능성이 높았지만, 지금 보니 소통에 소홀한 듯했다.
‘참견할 여지는 적겠군.’
애초에 바알이 누군가를 돕는 모습은 상상되지 않는다.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던 그리드가 엘리고스에게 질문했다.
“혹시 너를 죽이면 윤회의 강이 정화 되나?”
“정화? 설마 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걸 뜻하는 건가?”
“그래, 야탄이 만들었던 처음 모습 그대로.”
“그건...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작 나를 죽인다고 해서 바뀔 리 없지.”
악과 마를 상징하는 흑(黑)의 이명을 지닌 자.
엘리고스는 대악마 중에서도 몹시 특별한 존재였지만, 지금의 지옥을 만든 건 결국 바알이었다.
지옥의 각 영토를 통치하는 대악마가 죽는다고 해서 지옥에 어떤 영향이 발생하지 않듯이, 엘리고스가 죽는다고 해서 윤회의 강이나 개의 아가리가 변화를 맞이할 가능성은 적었다.
‘역시 바알을 죽이는 수밖에 없나.’
윤회의 강에 붙들린 영혼들을 해방시키는 건, 이 세계의 섭리를 부수는 일이다.
최종 보스에 준하는 존재를 없애지 않는 이상 요원한 게 당연했다.
아쉽지만 납득하는 그리드의 귓전에 엘리고스의 스산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정화되는 것과 별개로 일부 영혼은 해방될 것이다. 내가 나의 권한을 써서 윤회를 끊어놓은 영혼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솔직하게 말하는 엘리고스의 태도는 호의와 거리가 멀었다.
저건 단순한 도발이다.
“어디까지나 나를 죽였을 때의 이야기다만, 그게 가능한가?”
콰르륵!!
엘리고스의 이명이 흑기사인 이유는 그의 갑주에 있다.
새카만 투구와 갑옷.
그 위로 덧씌워진 엘리고스의 마기가 더욱 견고한 방어를 구축했다.
엘리고스는 피부 한 점 노출하지 않고 온통 칠흑인 존재가 되어 그리드를 마주봤다.
붉었던 안광마저 검게 물든 탓에 그림자 같았다.
“비록 지상이었다곤 하나 가미긴을 순살시켰다지. 나는 네 실력을 좌시하지 않을 테니 네게 절망이다.”
순수할수록 아름다운 법이다.
엘리고스의 검정엔 불길함 이상의 품격이 있었다. 엘리고스를 더욱 특별하게 가꿔갔다.
먼 지상의 인간들을 압도하는 모습이었다.
20번째 서사시의 목격자인 인류가 모조리 공포를 느꼈고, 그리드의 성전에 묘사되는 엘리고스의 모습은 여태껏 없던 최악이자 최강의 악마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이번 서사시에 바알이 등장하는 순간 엘리고스는 최강과 최악이라는 타이틀을 모조리 잃게 될 것임을.
엘리고스의 포지션은 끽해야 4천왕 정도였다.
이 정도 시련은 쉽게 넘겨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바로 시작하자.”
어느새 쌍수검을 무장한 그리드가 턱짓했다.
스킬을 안배할 생각은 없었다.
바알이 개입할 가능성을 낮게 보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옳았다.
콰작!!
그리드가 사선으로 휘두른 검에 엘리고스의 투구가 스친다. 직선으로 꽂아 넣은 검은 건틀릿의 손등에 미끄러졌다.
이때 엘리고스의 창끝은 그리드의 견갑에 가로막혀 있었다. 초승달 모양의 극이 그리드의 목덜미에 박혔다.
그리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크란벨의 머리.
투구의 뿔이 내려와 그리드의 목을 감싸주고 있었으니까.
검기와 신성을 흐트러뜨리는 마기의 활용.
개세적인 위력의 창격을 흘려내는 템빨의 활용.
서로의 실력이 예상보다 더 뛰어남을 눈치 챈 그리드와 엘리고스가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양쪽 모두 투구를 무장한 상태였다.
서로의 표정을 파악하지 못한 채 묵묵히 공세를 이어갔다.
다만, 조금 더 흔들리는 쪽은 엘리고스였다.
엘리고스의 마기는 소모되는 개념인 반면 그리드의 아이템은 언제라도 즉시 수리 됐기 때문이다.
‘치사하기가 도를 넘었다.’
충돌 후 거리를 벌릴 때마다 망치를 꺼내 갑옷을 두드리는 그리드의 모습을 보면서, 엘리고스는 바알을 떠올렸다.
상대하는 입장에서 그만큼 사악했다.
***
조금 느린 거 아닌가?
피아로를 응원 중인 사람들이 공통 된 의문을 품었다.
악마들의 협공은 무척 신속하게 이뤄지는 반면 그들에게 둘러싸인 피아로는 반응이 느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몸에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는데, 환경적인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평소에 보여주던 모습과 차이가 너무 컸다. 어떤 커다란 디버프를 떠안은 눈치였다.
“쯧, 이놈을 죽여 봤자 딱히 득 될 게 없어 보이는군.”
바알의 심복들이 급기야 혀를 찼다.
안 그래도 기대치가 낮았던 피아로의 실력이 예상보다 못하다며 이놈을 죽여 봤자 얻는 힘이 적을 거라고 판단했다.
“내 이래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심복 중 하나가 속내를 밝혔다.
고작해야 인간 따위의 힘을 탐하고 은둔을 마친 다른 심복들을 질책하듯이.
그 대가를 치른 걸까.
불만어린 표정으로 지껄이던 심복의 얼굴이 화마에 삼켜졌다.
유령마의 궤적이 남긴 푸른 불꽃과 지상에 들끓는 용암의 색이 뒤섞인 듯한 불꽃이었다.
굉장히 화려한 색채로 강하게 솟구쳐 오른 만큼 위력도 무시무시했다.
그토록 고고했던 바알의 심복이 비명을 참지 못하고 내지르고 말았다.
“무슨?”
지켜보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악마들의 어안도 벙벙해졌다.
동료를 해친 건 그들이 아니었기에.
“이런 식인가.”
악마들과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피아로에게 집중됐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혼잣말하는 피아로의 농기구에 거센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조금 전 심복을 덮쳤던 불꽃과 같은 색이었다.
악마들이 경악했다.
일대의 화기가 모조리 피아로의 손짓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자연적으로 발생한 불꽃들이 마치 의지가 일체 된 마법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저놈의 반응이 느렸던 이유가...’
화기와 교감하기 위해서였나?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피아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태우는 힘이라...”
자연지기로 다스린 불꽃의 위력은 기대 이상으로 뛰어났으나, 피아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본이 농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땅과 태양, 그리고 비와 바람이 좋았다.
농작물을 불태울 것만 같은 불꽃을 사랑하기엔 정서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의 기분을 예상했다는 듯이.
“피아로 공! 제가 왔습니다!”
때마침 헐레벌떡 달려온 라우엘이 비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표정에 자부심이 가득했고 팔뚝의 흑염룡도 기쁘다는 듯이 춤췄다.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 힘.
불과 얼마 전까진 라빗의 장사 수단으로 이용당했던 궁극기를, 이 순간 피아로를 돕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기쁜 게 당연했다.
“아주 좋구려.”
피아로가 미소로 화답했다.
그가 가볍게 휘두른 호미가 비바람을 전진시켰고 기함한 악마들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수만 개의 씨앗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 싶더니 화기를 잃은 땅에 곡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무려 지옥에 황금빛 밀밭이 탄생한 것이다...
대지의 신도 이런 기적은 행사하지 못할 터였다.
‘최소 신급. 듣던 것과 크게 다르다.’
대적 불가.
바알의 심복들이 피아로의 평가를 빠르게 고쳤다.
(77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