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7권 - 19화
“흠.”
홀로 남은 브라함이 피식거렸다.
침입자의 기척을 감지한 즉시 작동한 흑마법.
자신이 보기에도 썩 대단했다.
일말의 오차 범위 없이 완전했고, 완전하므로 견고하며 신속했다.
상정한 조건 하에 작동했으니 반응을 못해야 정상이었다.
한데 자신은 반응했다.
아슬아슬하게나마 파훼하는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일행 중 유일하게 해냈다.
손꼽히는 강자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증명한 셈이다.
제법 기뻤다. 안 그래도 대단한 자부심이 한층 더 강해졌다.
‘특히 그 퇴물 검사하고 비교하면 내가 월등히 뛰어나군.’
브라함은 의지로 마법을 이루는 경지다.
기억을 되짚어보는 행위 자체가 자연히 메모라이즈 마법을 발생시켰다.
조금 전 그가 스치듯 보았던 광경들이 이 순간 사진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브라함은 사진 속에 멈춰있는 그리드와 신들, 그리고 사도들과 결사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지옥에 입장하고 흑마법이 발동한 순간이었다.
그리드는 즉시 반응했다.
반응 속도만 놓고 보면 브라함보다 빨랐다.
하지만 지공의 발동에 실패하고 라우엘과 네펠리나를 곁으로 끌어당겼다.
거의 직후에 메르세데스와 피아로, 지크가 반응했다. 브라함과 같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혜안의 발동엔 다소의 시간이 걸렸고 피아로는 마법에 한해서 문외한에 가까웠다.
오직 지크만 제대로 대응했다.
즉시 룬을 회전시켜 어떤 단어를 완성시켰다.
그 뜻 모를 단어는... 지크 자신에게 적용되는 마법의 좌표에 개입하는 이적을 발휘했다.
함정을 역이용해버린 것이다.
한낱 화신일 때도 대부분의 분야에서 정점에 올라 그랜드 마스터라고 칭송 받은 인물다웠다.
본신을 되찾고 반신의 힘을 활용하는 그는 매번 브라함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정도로 뛰어났다.
‘...결사들은?’
대부분 사도들과 같았다.
극히 찰나.
1초를 수십 개로 분절한 단위만큼 반응이 늦었고 마법에 대응할 수단을 찾지 못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무식한 놈들.’
브라함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결사들의 모습이 담긴 메모라이즈에 희미한 균열이 새겨져 있단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마법 그 자체가 타격을 당한 흔적이다.
아벨리오는 붓을 휘둘러서, 거인족 형제는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제시카는 마법으로, 켄은 주먹으로, 쥬르네는 마력을 사역하고 베티는 마력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방법으로 흑마법의 파훼를 시도했다.
퇴물 검사는 그냥 검으로 베어버렸다.
흑마법의 원리를 이해하고 역산해서 무효화시킨 브라함과 달리 물리적인 파괴를 시도했단 의미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죄다 한 끗 차이였다.
그들에게 적용 된 흑마법은 술식의 일부가 파괴되어 온전하지 못했다. 최소한 ‘위험한 곳’으로 떨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괜히 하야테 공의 측근들이 아니군.’
내심 감탄하던 브라함이 흠칫했다.
타인의 실력을 순순히 인정하는 스스로에게 놀란 것이다.
조금... 불쾌했다.
마침 찾아온 불청객들이 몹시 반가울 정도로.
“고론 공의 식견은 놀랍군. 추방자의 아들만 남게 될 거라더니 그대로 실현되었어.”
“저놈은 베리아체의 지혜를 얻고 인간들의 마법을 공부했다지 않나. 이 정도 마법의 술식이야 쉽게 읽어내었겠지.”
“하하하! 브라함! 베리아체의 아들아! 네 어미가 비록 추방자라 할지언정 태초의 3악이건만, 그 자식인 너는 어찌하여 인간들의 마법 따위를 공부하였느냐? 설마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냐?”
“추방자의 아들이 부끄러움을 알 리가. 저놈에겐 근본이 없다.”
세 마리의 악마였다.
바알의 사역마가 아닌 심복이라는 호칭을 지닌 놈들.
아주 먼 과거.
베리아체가 지옥에서 추방당할 때 일조했던 노괴들이다.
하나 같이 막강한 기운을 지녔다.
전원 가미긴보다 나을 정도였는데, 이곳이 지옥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무지막지한 강자인 것이다.
‘하물며 저쯤 되면 광란의 마기를 다루겠지.’
싸움이 길어질수록 강력하게 벼려지는 마기.
소수의 고위 마족이 구사하는 일종의 비술이다.
지옥에서만 활성화된다는 단점을 지녔지만 이곳이 지옥인 이상 단점이 아니었다.
“벌벌 떠는 네 모습을 보니 추억이 떠오르는구나. 지옥에서 추방당했을 때 네 어미의 모습을 꼭 빼닮았어.”
“지옥의 모든 악마들이 우러러봤던 고결한 존재가 실시간으로 비참해지는 광경을 구경하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쾌감이 샘솟아.”
“...”
고개 숙인 채 서있는 브라함의 뇌리로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비웃는 악마들에게 둘러싸인 채 지상으로 쫓겨났던 어머니의 모습.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현실은 훨씬 더 비참했겠지.
‘아아, 어머님.’
브라함은 운명을 느꼈다.
그리드가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였고 당신께서 저들을 내게 보냈나이까.
내가 당신의 복수를 이루고 끝내 당신을 초월하게끔 안배하신 겁니까.
“...저놈.”
먼 옛날 베리아체를 고립시켰을 때처럼.
브라함을 둘러싼 채 킬킬 웃던 악마들이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고개 숙인 브라함의 어깨가 들썩이는 이유를 뒤늦게 눈치 챈 것이다.
저놈은 두려움에 떠는 게 아니다.
웃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다.
마침 고개를 든 브라함의 얼굴이 확인시켜줬다.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세우고 웃는 놈의 눈동자가 제 어미의 것처럼 붉게 빛났다.
“내 어머님을 둘러쌌을 땐 수천의 병졸 중 하나에 불과했을 버러지들이. 고작 셋이서 나를 맞이하는 거냐. 길게 흐른 세월이 네놈들을 노망 들게 만들었구나.”
파지직!
칼처럼 벼려지기 시작한 브라함의 마력이 점차 짙은 자색으로 물들어갔다.
광란의 마기.
베리아체의 아들인 브라함이 ‘당연하게’ 쓸 수 있는 비술이 벌써부터 발동하는 것이다. 비술의 질이 달랐다.
꽈아아아아앙...!!
“...!”
“...!”
바알의 심복들.
그들은 벌써 수십 명의 랭커들을 학살했다.
지상에서 지옥의 상황을 관찰 중인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압도적인 힘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인마대전에 참전했던 그 어떤 대악마보다 강력한 존재들.
그들과 대치하는 브라함을 보고 사람들이 탄식했던 이유다.
사람들은 브라함의 패배를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하늘 한쪽에 떠오른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곧 처참하게 망가질 것을 알고 벌써부터 눈을 감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브라함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자색의 화염이 폭풍으로 번짐과 동시에 전장을 휩쓰는 광경이.
기함하며 물러나는 악마들의 놀란 표정이.
전개의 양상이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소식이 삽시간에 번졌다.
애써 하늘을 외면했던 사람들도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
“저것들 저거 완전히 진을 쳤는데?”
“꿀꺽... 우리들 식량은 충분한가?”
템빨단 소속 원정대는 전원 크리스탈 성으로 대피했다.
이변이 발생한 즉시 이동했다.
유라와 지슈카의 판단을 믿은 것이다.
덕분에 필드에 고립 된 채 비명횡사할 위기는 넘겼지만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악마 대군이 크리스탈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따르는 마물을 사냥해서 바비큐를 만드는 모습이 상식과 동떨어져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고기 굽는 냄새가 식욕을 돋우었다.
육포로는 충족되지 않는 허기가 원정대를 괴롭혔다.
저주였다.
유라나 지슈카, 혹은 페이커 같은 전설에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지만 전설이 아닌 플레이어에겐 충분한 고통을 안기는 수준이었다.
“이거... 고렙 요리사들이 갖고 있는 스킬 아닌가?”
상태이상으로 분류되는 허기.
능력치와 의욕 하락으로 연계되는 디버프에 눈살을 찌푸리던 반트너가 한 발 늦게 눈치 챘다.
죽으면 스킬을 빼앗긴다는 라우엘의 경고와 사람들의 후기가 명확한 진실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실시간으로 불어나는 적들의 숫자와 맞물려 두려움이 커졌다.
“이 성... 적들이 공격 못하는 거 맞죠? 안전한 거 맞죠? 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누군가가 거수하며 질문했다.
몹시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로제.
대악마인 그녀는 이 자리가 대단히 불편했다...
가시방석에 앉아도 이것보단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드의 서큐버스를 만나려고 성에 방문한 타이밍에 바알이 사고를 친 것도,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리는 템빨단원들과 함께 얼떨결에 성에 고립된 것도.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벌써 수십 번도 더 자문해봤지만, 단순히 재수가 없었다고 해석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전한 건 맞지. 맞는데, 마냥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순 없다는 게 문제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면 그냥 로그아웃하지 뭣 하러 접속해 있겠냐.”
게임에선 시간이 금이다.
단순히 연명해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서 언제까지고 죽치고 앉아있어 봤자 명백히 손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쟁자들과 적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흐으음...”
로제가 내심 안도했다.
자신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나마 대머리라도 친절하게 어울려주는 것이다.
기왕이면 페이커나 레가스 같은 훈남들이 어울려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이 뭘 가릴 상황인가?
덜 민망해서 다행이었다...
“왜 갑자기 기분이 더럽지?”
반트너가 의아해하는 순간이었다.
콰쾅! 쿠콰콰쾅!!
성이 흔들렸다.
창밖이 형형색색의 광채로 물들어 일행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마법 폭격의 여파다.
“아, 안전한 거 맞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로제가 재차 묻는 와중에.
개골, 개골, 개골골골...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체파르데아와 바알의 사역마들이 합류한 것이다.
***
마법 폭격을 중지시킨 체파르데아가 말했다.
“단탈리안의 유산이다. 공략하기 힘든 게 당연하고 공략할 필요도 없어. 개골.”
단탈리안은 지옥에서 가장 지혜로운 악마였다.
그와 비견되는 지식을 쌓은 악마는 많았지만, 그처럼 지식을 활용하는 악마는 단탈리안이 유일했다.
겁쟁이였다는 의미다.
대악마의 위계임에도 많은 악마들에게 멸시 받았었다.
그 겁쟁이가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든 최후의 보루를 쉽게 공략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고립시켜두면 그만이다.
인간들의 삶은 너무 짧아 금방 초조해지게 마련이고, 결국 얼마 견디지 못하고 제 발로 걸어 나오기 시작할 테니.
체파르데아는 악마들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당부했고 악마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악마들이 협력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지만 지금만큼은 예외다.
자신의 그림자에 스며든 아수라의 파편을, 그들은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다.
바알이 공개했다.
아수라의 파편이 자신들의 명줄을 쥔 폭탄으로 작용할 수도, 더욱 강력한 힘을 주는 축복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깨달은 악마들은 바알에게 충성하기를 택했다.
애초에 바알은 태초의 3악 중 정점이다.
야탄의 뒤를 잇는 지옥의 지배자였다.
그가 직접 나서서 구심점이 되어준 이상 악마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 이유는 적었다.
‘아수라의 파편 덕분에 급격히 강해진 악마가 많다. 각지로 흩어진 침입자들을 수월하게 해치워주겠지.’
생각하는 체파르데아의 둥그런 주둥이가 말려 올라갔다.
기다란 혀를 출렁이며 킬킬 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커다란 개구리였다.
하지만 악마들은 비웃지 않고 묵묵히 자신들의 자리를 지켰다.
불만이 적었다.
성 안에 꼼짝 못하고 갇힌 사냥감들이 벌벌 떠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꽤나 즐거웠다.
게다가 성에 갇힌 사냥감 중에는 데빌 슬레이어가 있다.
악마를 구축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
악마의 신분으로 놈과 싸워서 이기고 포식하는 행위 자체가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적으로 판정 받고 격을 대폭 늘릴 기회였다.
악마들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점차로 확산되는 무렵이었다.
“제대로 왔군.”
함정의 좌표를 바꿔 역이용했던 지크.
템빨신의 사도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만능의 실력자가 현장에 난입했다.
파괴, 학살, 궤멸 등의 뜻을 품은 단어로 조합 된 룬어들이 휘몰아치며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지옥에서 유일한 거점을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한단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