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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57화 (1,545/1,794)

템빨 77권 - 17화

투명한 바위를 짊어지기라도 한 걸까.

사람들 대부분이 고개를 수그리고 다녔다.

하늘에 영사되는 지옥의 풍경이 혹 시야에 스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극히 소수의 사람들은 굳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주시했다.

다른 이들은 두렵고 불쾌하다며 꺼리는 광경을 자세히 관찰했다.

각 지역에서 명성이 높은 랭커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투사다.

싸움 자체를 즐기거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

그들에겐 이번 사태가 커다란 기회로 다가왔다.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활약한다...? 명성을 떨치기에 이보다 좋은 무대도 없을 거다.”

“지옥에 입장하는 즉시 개인 카메라가 따라붙는 격이니까. 작은 활약만 해도 인마대전 때보다 더 눈에 띄겠지.”

Satisfy의 최종 보스는 바알이 맞다는 추측이 잇따르고 있었다.

그만큼 포스가 강력했다.

게다가 바알이 일으킨 이번 사태가 워낙 위협적이었다.

분위기만 봐서는 Satisfy의 명운이 달린 사건처럼 보였고 이야기의 흐름상 인류가 패배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사람들의 태도와 별개로 주목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대항전 따위와는 비교가 불허한, 최소 인마대전 이상급의 대규모 이벤트였다.

막말로 전 인류가 예의주시할 만한 사태였다.

이때 제 발로 지옥에 찾아가 활약한다?

필시 영웅으로 등극할 터였다.

그리고 영웅은 돈이 된다.

네임드 랭커들이 진즉부터 증명했다.

CF로 벌어들이는 돈만 한해 수백수천 억이라고 했나...

방송에 함께 출현한 배우들과의 염문이 끊이질 않는 건 덤이었고.

“이건 진짜 엄청난 기회다.”

“우리가 제2의 그리드가 되는 게지.”

제2의 그리드는 세상에 대체 몇 명이나 존재하는 걸까...

뭐만 했다하면 제2의 그리드를 운운하는 사람이 많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을 지경인데, 대단히 우스웠다.

하지만 내색하는 사람은 없었다.

함께 공대를 꾸린 랭커들.

앞으로 함께 사선을 넘어야 하는 저들의 커다란 포부를 비웃기보단 존중해야 옳았으니까.

“음...?”

화전민들이 주를 이루는 서쪽의 산간지역.

가치가 낮아 템빨제국의 관심을 덜 받는 영토에서 군왕 노릇을 해온 하이랭커 무사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이디와 어울리지 않게 독일계 영국인인 그의 머리카락은 몹시 붉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불꽃과도 같아서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히 사로잡았다.

차림새도 무척 화려했다. 착용하고 있는 장비마다 금장이나 보석이 주렁주렁 달렸다.

무려 30개가 넘는 중소 사냥터를 통제하며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는단 소문이 사실 같았다.

문제 삼지 못할 부분이다. 강자가 당연한 권리를 누리는 것뿐이니.

그래, 무사시는 엄청난 강자였다.

전 세계에서 단 3,000명의 강자를 꼽는다면 적지 않은 확률로 언급 될 것이다.

그런 그가.

“저건... 뭐냐?”

넋이 나간 얼굴로 침음했다.

못 볼 걸 본 사람의 표정.

숫제 겁에 질린 반응이었다.

라인하르트에 출현한 바알의 동영상을 보고도 평정을 잃지 않던 그가 갑자기 격한 반응을 보이자 파장이 컸다.

무사시와 같은 길드에 소속 된 사람들이 동요하는 것을 시작으로 불안이 빠르게 전염됐다.

“무슨 일이기에?”

보다 못한 또 다른 하이랭커가 묻다 말고 굳었다.

하늘에 뜬 영상 중 하나에서 사달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마대전 당시 대악마 레이드에 참가해 선전했던 랭커들이 한낱 악마에게 살육을 당하는 거 아닌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플레이어는 인마대전을 기점으로 급격히 성장했다.

너무 많은 경험을 쌓았고 템빨단의 협력까지 받았으니까.

단적인 예로 템빨단 내부에서만 유통되던 고등급 아이템이 시중에 풀렸다.

인마대전 전까지만 해도 외부의 플레이어를 배척했던 템빨단이 모든 인류는 하나라는 기치를 내걸고 협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옥에 내려간 플레이어는 대부분 훌륭한 실력자였다. 그들에겐 지옥의 악마들을 사냥할 자격이 충분했다.

한데 저 비참한 모습은 뭐란 말인가?

높은 레벨과 템빨단제 아이템이 무색하게도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개중엔 무사시가 라이벌로 여겨온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게... 말이 되나?”

무사시는 눈썰미가 무척 좋다. 카운터 스킬을 주력으로 삼는 탓에 통찰력에 상당한 투자를 해왔다.

그 탓에 눈치 채고 말았다.

악마들이 구사하는 스킬이... 굉장히 낯익었다.

특정 랭커를 상징하는 스킬들.

성명절기라 할 수 있는 기술들이 악마들의 몸과 마력으로 구사되고 있었다.

제대로 허를 찌르는 일격들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랭커들의 입장이 수긍 될 정도였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강력한 스킬일수록 사용 조건이 까다롭다.

일단 특정 경로로 스킬을 얻어야하고 적합한 클래스로 진급해야했다. 스탯 수치와 사용하는 무기의 영향을 크게 받기도 했다.

몽둥이를 쥔 악마가 인간의 권술을, 맨손의 악마가 인간의 검술을, 심지어 마나를 마기로 대체하여 사용하는 광경은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난이도가 어떻게 설정 된 거지?’

지옥의 법칙을 새로 세웠다는 바알의 대사가 떠올랐다.

기존의 법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새로 설정 된 난이도는 하드코어 등급이라고 봐도 무방했고, 무사시는 위축됐다. 보이는 게 많은 만큼 쉽게 겁을 먹었다.

“무사시?”

워프게이트가 있는 도시까지 몇 걸음 안 남았다.

최종 목적지인 라인하르트까지 30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데 공대장 중 하나인 무사시가 갑자기 멈춰 서선 꼼짝도 않는 것이다.

술렁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무사시가 망설였다.

“이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이대로 지옥에 갔다간 개죽음을 당할 확률이 높다. 일단 물러나서 추이를 지켜보도록 하자.

...말해야 하는데, 명예가 실추될까 두렵다.

그때였다.

[메아리 마법의 창시자 ‘제시카’가 출현하였습니다.]

[현실을 화폭으로 삼는 ‘아벨리오’가 출현하였습니다.]

[주먹으로 태산을 부수는 ‘켄’이 출현하였습니다.]

[괴물과 악마를 조련하는 ‘쥬르네’가 출현하였습니다.]

[윤회의 고리를 끊는 ‘베티’가 출현하였습니다.]

[고대의 지혜로운 현자 ‘라드볼프’가 출현하였습니다.]

[고대의 지혜로운 전사 ‘프론잘츠’가 출현하였습니다.]

[뮐러의 스승, 검성 ‘비반’이 출현하였습니다.]

월드 메시지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익숙한 이름 몇 개에 생소한 이름들이 섞였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범상치 않다는 점이었다.

비반과 제시카가 그런 인식을 심어줬다.

우선 비반.

전전대 검성으로, 역대 최강의 검성이라는 뮐러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최소 검호 반열에 오른 플레이어는 그의 기록을 접했고 자연히 선망해왔다.

다음은 제시카.

전대 전설의 마법사로, 그 유명한 메아리 마법의 창시자였다.

메아리 마법의 이론은 ‘하나의 주문으로 다중 마법을 발생시키는’ 이치를 담았으므로 역대 모든 마법 이론 중 최고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들과 함께 등장한 이들이 평범할 리 만무한 것이다.

수식어부터가 장난이 아니지 않나.

“라인하르트에 있는 지인이 그러는데 그리드를 만나러 찾아왔다는데요?”

“무슨 탑의 결사들이라고...”

“탑?”

드래곤 슬레이어 하야테는 익히 알려졌다.

하지만 지혜의 탑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생소했다.

탑은 여전히 은밀하게 자신들의 신변을 지켜왔다.

한데 이 순간.

[장막 뒤에서 인류를 수호해온 지혜의 탑의 결사들이 악마와 맞서 싸울 것을 선언합니다.]

탑이 스스로의 의지로 정체를 드러냈다.

자칫 드래곤을 자극하여 위험이 찾아올 걸 알고도 인류를 위해 나섰다.

“뭐해? 어서 서둘러!”

잔뜩 위축되어 있던 무사시가 일행을 재촉했다. 잔뜩 기가 살아서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대륙 각지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

진짜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사람들이 점차 희망을 잃어갈 때 찾아와준 결사들이 그리드는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하지만...

“자리를 비우시면 위험한 거 아닙니까?”

결사들의 본분은 드래곤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들이 지옥으로 떠나있는 동안 드래곤이 활개를 치기라도 했다간 누구도 함부로 감당할 수 없었다.

“걱정 말게. 하야테 공께서 자리를 지켜주실 걸세.”

설명하는 비반의 속내가 썩 편치 못했다.

하야테의 성격상 잠도 안 자고 보초를 설 게 뻔했기 때문이다.

비반과 결사들은 그래서 더더욱 이번 사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생각이었다.

그리드의 마음가짐도 같았다.

“빠르게 사태를 진정시키고 돌아오도록 하죠.”

바알이 너무 고강했다. 그리드와 사도들도 놈의 디버프에 완벽하게 저항하지 못했으니 결사들도 비슷할 터였다.

하여 그리드는 현실적으로 판단했다.

처음부터 바알을 죽이는 걸 목표로 삼기보단 지옥 달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일단 지상의 풍경부터 원래대로 회복시켜야 인류의 사기를 회복할 수 있다.

지옥 달을 없애면 현재 작동 중인 <수라도>가 끝날 가능성도 높았다.

지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해서 추가 전력으로 삼을 수 있단 의미다.

물론 아직까진 전부 가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라우엘과 그리드는 이 가설이 매우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지옥 달의 기능을 정지시켜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

만약 그럴 경우 인류의 승산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한다는 뜻이 됐다. 막말로 답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Satisfy엔 늘 해답이 존재해왔고, 그리드와 라우엘은 누구보다 많은 해답을 찾아온 최고의 듀오였다. 본인들의 판단을 믿었다.

“출발하죠.”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리엘을 제외한 사도들과 결사들, 그리고 템빨계의 신들과 그리드가 지옥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리드의 인벤토리는 가득 차있었다.

연금술 시설에서 제작한 물약을 모조리 공수한 것으로 모자라 대장일에 필요한 재료들도 빠짐없이 챙겼다.

지옥에서 싸우는 동안 사도들과 결사들의 아이템을 수리하거나 새로 만들어줄 계획이었다.

[템빨신 그리드의 스무 번째 서사시가 시작됩니다.]

[지옥으로 출병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비롯합니다.]

대륙 각지에 존재하는 템빨신의 성전이 은은한 빛을 뿜었다.

앞으로 한 줄씩 추가 될 서사를 기록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

[...]

태초부터 존재해온 고룡이 눈을 떴다.

새하얀 순막이 갈라지며 우주가 드러났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은 최초의 혼돈이오, 홍채에 점점이 박힌 원들은 혼돈으로부터 파생 된 무수한 행성 같았다.

쿠웅...

서서히 고개를 든 고룡이 똬리 튼 꼬리를 펼치자 휘몰아치는 광풍에 거대한 레어가 웅웅 울렸다.

여파가 몹시 컸다.

레어가 자리 잡은 태산과 태산을 둘러싼 숲이 지진이라도 맞은 것처럼 흔들려댔는데, 깜짝 놀란 새와 짐승들이 즉시 보금자리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황이 재미있구나...]

레어 바깥의 풍경을 확인하고 긴 숨결을 토하는 드래곤의 표정이 평온했다.

하지만 주둥이에 번지는 미소는 뒤틀려서 비열해 보였다.

악룡이라는 이명에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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