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7권 - 16화
‘무슨 수로?’
바알이 떠난 후.
라인하르트가 혼란으로 들끓는 가운데 아그너스가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알기로 바알의 본체는 지상에 강림하지 못한다.
잘게 쪼갠 의식의 파편을 특정 대상에게 이식하고 그 몸을 빌려야 비로소 강림할 수 있다고 배웠다.
한데 방금 전 바알은 진짜가 맞았다.
플레이어의 성향과 기분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되는 모습을 지닌 절대자.
서열 제1위의 대악마 바알.
지금의 아그너스에겐 무지막지한 공포로 다가왔다.
‘지옥 달을 지상에 보내 지옥화를 꾀했다고 해도.’
바알을 강림시킬 정도의 마기는 어디서 공급한 걸까?
더욱 위협적인 형태로 변한 지옥 달의 모습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애초에 지옥 달을 지상으로 보낸 이상 지옥의 마물과 악마들은 크게 약화됐을 것이다. 그건 바알도 마찬가지일 테고.
이런 상황에서 인간들을 볼모로 잡고 그리드를 유인하는 건 스스로 위험을 자처하는 격이지 않나?
여러 의문에 빠진 아그너스가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마음이 점차로 초조해졌다.
바알의 출현이 그의 지식과 정보를 일부 부정한 여파다.
진실로 믿었던 지식과 정보가 잘못 된 것이란 사실을 알고도 침착하긴 힘들었다.
그의 혼란을 읽은 라우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바알의 정보는 대개 거짓으로 판명이 나는 경우가 많죠.”
상대는 악마 중의 악마다.
진실, 신뢰 따위와는 세상에서 거리가 가장 먼 존재란 의미다.
놈과 관련 된 정보는 대부분 거짓투성이였다.
“너는... 바알이 처음부터 지상에 강림할 수 있었다고 보나?”
“제라툴이며 리파엘도 지상을 제 안방처럼 드나드는 마당에 바알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바알의 권한이 그들보다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을 텐데.”
바알과 리파엘은 대척점에 있는 존재이나 명백히 달랐다.
지옥의 주인은 바알인 반면 천상의 주인은 리파엘이 아닌 레베카니까.
바알이 야탄을 배신하고 지옥을 탈취한 시점부터 그의 격은 리파엘을 초월한 것이다.
고작 지상을 오가는 일?
처음부터 쉬웠을 거라고 라우엘은 짐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잠잠했던 이유야 뻔했고.
‘아직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으니까.’
바알의 행동 원리는 쾌락의 추구로 직결된다.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을 테지.
지금이 바로 기다려온 순간인 거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고개를 드는 라우엘의 얼굴이 어두웠다.
지옥의 상황을 영사하는 하늘에서 온갖 사건과 사고가 벌어지고 있었다.
피 튀기는 혈전이 난립했고 고통과 비명이 뒤따랐다.
세상에 공포가 전염되어갔다.
***
“이게 말이 됩니까?”
S.A 주주총회.
뿔난 주주들이 성을 냈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Satisfy의 환경 때문이다.
낮이든, 밤이든.
대륙 어디에서든 하늘을 올려 보면 기괴하고 끔찍한 달이 보였다.
무수한 눈을 뒤룩뒤룩 굴리는 붉은 달.
놈이 하늘에 영사하는 영상들은 또 어떤가.
지옥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살육전이 재생됐다.
그야말로 수라도였다.
온전한 정신으로 감당할 만한 풍경이 아니었다.
Satisfy를 게임이 아닌 메타버스로 접근하는 일부 주주들은 더 큰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 Satisfy란 사회, 경제, 문화 활동 등이 현실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이뤄지는 또 다른 세계였다.
배경 스토리와 관계없이 일상이 영위되어야 가치가 커지는 공간인 셈인데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보통 상식적인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린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끔찍한 광경이 가득 찬 하늘 아래서 데이트나 취미를 즐기고 사업적 만남을 가질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실제로 Satisfy 접속률은 눈에 띄는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번엔 그리드가 쉽게 해결해줄 문제 같지도 않던데요. 제가 게임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 바알이라는 놈이 범상치가 않던데.”
“맞아요. 바알이 등장하자마자 강력하기로 유명한 라인하르트의 군대가 도미노처럼 쓰러지더군요. 평범한 사람들이 기절한 거야 두말 할 필요도 없고요.”
“당시 현장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인터넷에 올린 영상을 보면 디버프가 상당하덥디다. 심지어 그리드가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는 모습도 찍혔던데 말이오. 우리 윤 이사님도 보셨소?”
“에, 그게...”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주주들의 목적은 친목이 아니다.
회사에 책임을 묻고 해결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모인 거였다.
비난이 빗발쳤고 분노가 전염되어갔다. 욕만 안 할 뿐이지 고성이 오가는 게 야구장의 관람석 같았다.
윤상민 이사가 상황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해주지 않았다.
주주들이 바라는 건 이 사태의 종결 선언일 뿐, 배경 설명이나 핑계 따윈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잠자코 있던 임철호 회장이 마이크를 켰다.
“우리는 Satisfy에 개입하지 못합니다.”
사실상 최악의 답변이었다.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긴 주주들이 맹렬히 항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철호 회장의 표정은 담담할 뿐이다.
지옥 에피소드가 예정보다 수십 년 더 빨리 열리긴 했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기에 그렇다는 보고서를 화면에 큼지막하게 띠운 채 팔짱을 끼었다.
“늘 그랬듯이 플레이어들을 믿어보시죠.”
“플레이어들은 무슨... 아까 브리핑을 듣자니 지옥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졌던데요. 이번에도 그리드만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그리드 혼자선 해결 못합니다.”
임철호 회장의 단호한 말에 주주들이 더욱 술렁였다.
그리드가 해결을 못한다고?
그리드를 최후의 희망으로 여기던 주주들이 급기야 망했다는 말까지 입에 담기 시작했다.
임철호 회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엄밀히 말해서 Satisfy가 망할 일은 없습니다. 설령 플레이어들이 지옥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실패할지언정 그땐 또 다른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될 테니까요.”
종말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장치에 불과하다.
지옥, 아스가르드, 환국, 드래곤.
어떤 세력이 최후의 승자가 될지언정 Satisfy는 돌아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 있더라도.
설령 인류가 승리하여 ‘엔딩’을 보더라도 괜찮다.
스토리의 끝이 Satisfy의 끝을 뜻하는 건 아니니까.
이후의 스토리는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어나가면 그만이었다.
***
세상이 삽시간에 변했다.
지옥의 현황을 비추는 하늘이 사람들의 정신을 괴롭혔다.
악마들과 싸우다가 참혹하게 죽는 저들 중에 나의 가족이나 친구가 있진 않을까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싸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역시 불안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머리 위에서 항시 재생되는 고어 영화라니.
시선 둘 곳이 적었다.
그나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단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미친 새끼.”
바알이 돌아간 직후.
대장군 아스모펠과 군인들이 백성들의 인솔을 맡았다.
혼란에 빠진 민심은 라우엘과 귀족들이 달래겠노라 했다.
덕분에 그리드는 자신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늘 위로 날아올라 지옥 달을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마주했다.
무량대수의 핏발 선 눈동자가 그리드를 무심하게 스쳤다.
한시도 쉬지 않고 뒤룩뒤룩 구르며 세상천지에 지옥의 상황을 전파할 뿐이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무한히 분절 되어 스크린화 된 하늘이라니.
“진짜 미친 새끼다.”
자꾸만 욕이 튀어나왔다.
욕을 참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지옥의 인간들을 인질로 잡고, 지옥에 있어야 할 달을 지상으로 차원 이동시켜 지옥의 실황을 중계하는 용도로 활용하는 등.
바알의 능력과 의도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놈은, 지상의 모든 존재로부터 하늘과 안식을 빼앗았다.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공포와 혐오에 노출 된 인류는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됐다.
파직!
그리드가 아이템 합체를 전개했다.
구젤의 도와 크란벨의 뿔을 합쳤다.
드래곤 웨폰의 융합.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됐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소용돌이치듯 일그러져갔다.
아직은 그리드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었다.
긴 칼자루를 결국 양손으로 거머쥐었다.
그럼에도 팔이 덜덜 떨렸다.
이를 악 문 그리드가 시야 범위 스킬을 썼다.
지옥 달을 두 눈에 똑똑히 담은 채,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버프를 두르고 칼을 휘둘렀다.
스파아앗!!
소리가 뒤따르는 일격이었다.
폭음이 번졌을 무렵엔 이미 주황색 신성이 하늘을 가득 물들였다.
하지만 지옥 달엔 닿지 못했다.
제아무리 시야범위 스킬이라도 우주에 있는 달까지 베지는 못하는 듯했다.
실망하는 그리드의 두 눈에 새로운 광경이 들어왔다.
달 위에 다가가 닿는 아주 작은 그림자들.
브라함이 끌어당긴 운석들이다.
표적을 지옥 달로 지정한 브라함이 메테오를 때려 박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지옥 달은 미동 하나 없이 굳건하게 존재했다.
“내 마법으로도 달을 부술 순 없나.”
쯧,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린 브라함이 멀쩡한 달을 노려보며 말했다.
“...”
방금 그게 마법 공격이라기엔 상당한 억지가 아닐까?
태클 걸 부분이 너무 많았지만 그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마침 은익을 펼친 메르세데스가 곁으로 다가왔다.
투명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달과 영상들을 분석했다.
...!
지옥 달이 브라함의 메테오를 맞았을 때와 달리 조금씩 흔들렸다. 급기야 요동쳤다.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파지직!!
“...!”
“...!”
그리드와 사도들의 얼굴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지옥 달의 눈 중 몇 개가 피눈물을 흘린다 싶더니 하늘을 가득 채웠던 영상 중 일부가 꺼지기 시작한 탓이다. 어지럽게 일렁이는 영상들 틈새로 온전한 하늘이 문득문득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내 새로운 영상들이 나타나 틈을 메웠다.
지옥 달엔 눈이 너무 많았다.
손상 된 눈이 빠르게 새로운 눈으로 대체됐고 꺼졌던 영상들이 다시 켜지길 반복했다.
“그만. 그만해.”
메르세데스의 손을 붙잡아 품으로 끌어당긴 그리드가 속삭였다.
허억, 허억... 거칠게 호흡하는 메르세데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유리보다 투명했던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졌고 경련하는 눈가엔 핏줄이 섰다.
“저건... 이곳에 있지 않아요.”
그리드의 가슴에 파랗게 질린 얼굴을 기댄 메르세데스가 설명했다.
“여전히 지옥에 존재하고 있으면서... 인계의 달을 거울삼아 비치는 거예요.”
그리드의 공격이 닿지 않았던 이유다.
지상에 떠올라 있는 지옥 달은 환영에 불과했으니까.
애초에 시야 범위 스킬의 표적이 되지 않았다.
브라함의 메테오가 때린 달은 지옥 달이 아니었던 거고.
‘그럼 브라함은... 괜히 죄 없는 진짜 달에다가 메테오를 갖다 박은 건가?’
그리드가 깨닫는 시점엔 이미 브라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트롤이란 단어에 몹시 민감한 그였기 때문에 그리드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우리가 직접 가는 수밖에 없겠다.”
그리드의 판단은 빨랐다.
바알의 초대를 받아들이겠노라 선언했다.
사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하늘을 올려 본 그리드가 씨익 웃는 비반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뒤로 결사들이 있었다.
이전 시대의 전설들.
역사의 뒤편에서 세계를 지켜온 위대한 영웅들이 출병한 것이다.
도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
베티는 아그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