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55화 (1,543/1,794)

템빨 77권 - 15화

기억의 단편에 남아있는 모자가 있다.

평범한 여인과 비범한 아이.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하고 샹들리에가 떨어져 박살나는 가운데 모자는 서로를 지키고자 애썼다.

힘없는 여인은 아들을 감싸 안았고, 아이는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제 몸처럼 큰 검을 집어 들었다.

아마도 교황청...에서 있었던 일이다.

야탄의 종들에게 둘러싸인 모자를, 내가 도왔다.

본래 야탄의 종들과 협력하다가 등에 비수를 꽂은 격이었는데 여러 불이익이 생길 걸 알고도 나섰다.

‘잘한 일이었다.’

이제는 청년이 된 소년.

환한 얼굴로 떠들어대는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아그너스는 과거의 자신을 칭찬했다.

작은 감격이 밀려왔다.

스스로를 칭찬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이토록 행복한 일인지 태어나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괜히 태어나 한 여인을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았던 내가.

오물보다 못한 이 쓰레기가, 처음으로, 자부심을...

“거기서 딱 제가...”

로드의 모험담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고개 숙인 아그너스의 숨죽인 오열을 눈치 채지 못한 척 노력하면서, 로드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

항상 옳은 선택을 하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후회를 하고, 괴로워한다.

특히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많은 후회를 남겼다.

그리드도 그랬다.

어린 시절에도, 학창 시절에도, 사회에 나와서도.

온갖 이유로, 핑계로, 다양한 후회를 남겼다.

심지어 요즘도 가끔 샤워를 하다가 그때를 떠올리며 비명을 내지를 정도다.

하지만 매몰되진 않았다.

후회란, 어차피 지난 일이기에 성립되는 것이다.

그래, 다 지나간 일이다.

앞으로 또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힘내라.”

아그너스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보고 자리를 피해준 그리드가 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중얼거렸다.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로드의 힘찬 목소리가 아그너스를 배려하고 있었다.

대견한 녀석.

***

그리드의 서사를 닮은 로드의 모험담은 아이린이 찾아온 뒤에야 끝났다.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하는 아이린에게 머쓱한 표정을 짓는 아그너스가 그리드를 웃게 만들었다.

“우선 원정대를 귀환시켜라.”

둘만 남게 된 후.

그리드에게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 받은 아그너스가 종용했다.

“지옥 땅을 밟는 모든 존재의 그림자엔 아수라의 파편이 스며든다. 놈이 바알의 눈이고 귀다.”

“...?”

그리드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지옥 땅을 밟는 모든 존재에게 스며든다고?

뜻은 이해했지만 설마 싶었다.

“아수라의 파편은... 아까 내가 처치한 놈을 말하는 거지?”

“어. 말 그대로 파편이다. 지극히 일부였어.”

“지극히 일부치고는 꽤 센 편이었던 것 같은데.”

풀버프 상태의 5융합 검무와, 칠악성 버프까지 중첩 된 5융합 검무 연타로 단숨에 처치하긴 했지만, 풀버프 상태의 5융합 검무를 한 번이라도 견뎠다는 게 대단한 점이다.

그렇게 맷집 좋은 놈이 불완전한 상태였다고?

납득하기 위해선 어떤 가설을 세워야만 했다.

“지옥의 숨겨진 최강자 포지션인가?”

“이해가 빠르군.”

이해가 빠를 수밖에.

그리드는 지상의 숨겨진 최강자 하야테와 신계의 숨겨진 최강자 치우를 만나보았다.

심지어 드래곤 중 최강일 거라는 굴절룡도 알았다.

굴절룡은 상상 속 존재일 확률이 높았지만 아무튼, 지옥 역시 실력자가 숨어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아수라... 관련 설정들을 봐선 처음부터 악마였을 것 같진 않은데. 정확한 정체가 뭔지 가리온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리드가 생각하는 동안 아그너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놈이 바알 이상의 실력자일 거란 보장은 없어. 하지만 바알과 비교해서 손색이 적을 거란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게 아니면 납득이 안 될 정도로 강력한 능력과 무위를 지녔지. 당장 내가 아는 능력만 해도 분리와 합체, 기생과 은신, 스킬 흡수와 전이...”

“스킬 흡수와 전이?”

“지옥에서 나름 유명한 권력자가 있었다.”

마르바스.

“바알이 놈을 죽이고 흡수한 힘을 내게 이양하더군.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바알 고유의 권능인 줄 알았는데...”

아그너스가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했다.

바알과의 계약이 끝난 직후.

그림자에서 솟아나온 아수라의 파편이 온갖 힘을 빼앗아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그리드의 얼굴이 굳었다.

지옥 원정대의 그림자마다 아수라의 파편이 기생하고 있고, 아수라의 파편에게 기생한 대상의 스킬을 빼앗는 능력이 있다면...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군요.”

마침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라우엘이 끼어들었다.

“바알이 원정대에게 마물 웨이브를 보내고 있는 이유 말입니다. 원정대를 충분히 육성한 뒤 그들의 힘을 빼앗을 의도였던 거군요. 일종의 양식장인 셈이네요.”

처음부터 꺼림칙했다.

바알이 보내는 마물 웨이브는 지옥 원정대의 성장을 명백히 촉진시켰으니까.

순수한 호의로 해석하는 건 불가능했고, 바알이 워낙 괴팍한 놈이라 변덕을 부리는 거라고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제 보니 변덕 따위가 아니었다.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음흉한 새끼.’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지옥에서 바알의 본체를 마주했던 순간의 기억이다.

지옥의 절대자는, 당시의 그리드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악마 안드라스를 조롱하고 짓밟는데 심취해있을 뿐이었다.

은혜를 배신하고, 존경을 짓밟고, 신뢰를 농락하고, 의지하는 자를 조롱해야할 악마가, 어찌하여 자신에게 충성하고 존경을 표하는 거냐며 비웃어댔었다.

여태껏 자신을 믿고 섬겨온 충신을 아주 잔인하고 악랄하게 짓밟았단 말이다...

그래.

그 잔악함이야말로 놈의 본성이다.

“원정대가 위험해.”

초조해진 그리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지옥으로 떠나려는 그를 진정시킨 라우엘이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악마가 아닌 플레이어의 스킬을 빼앗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아그너스 당신이 빼앗긴 스킬도 ‘바알의 계약자’로 쌓아올린 스킬이지 계약자 신분과 별개로 배운 스킬들은 여전히 보유중이잖아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 내가 빼앗긴 스킬 중에 2개는 바알의 계약자와 관계가 없는 스킬이었다.”

룬의 힘 하나와 네크로맨서 고유 패시브 스킬 하나.

“너희 동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거다.”

아수라가 사용하는 <스킬 흡수>의 정확한 효과는 ‘악마의 힘을 회수하는 것’과 ‘최대 2개의 스킬을 랜덤으로 빼앗는 것’이다.

아그너스는 확신하고 있었고, 라우엘에겐 그의 확신을 부정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너와 내가 만났다는 사실을 바알이 알게 된 이상 계획을 앞당길 테니까.”

아수라의 파편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감시다.

그리드, 아그너스, 로제 세 사람의 만남이 성사된 시점부터 인식했을 바알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략적으로나마 추측했을 것이다.

그 가증스러운 놈은 겉보기와 달리 섬세하고 영리하니까.

“아수라의 파편이 그리드 님께 기생할 확률은요?”

“없어. 신성을 견디지 못하겠지. 그리드와 그 주변 인물들에겐 함부로 달라붙지 못할 테니까 그리드에게 서두르라는...?”

아그너스가 도중에 말을 멈췄다.

그리드의 몸을 둘러싼 신성이 갑자기 크게 요동친 까닭이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느낌으로 아그너스와 라우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뭐죠?”

“이건...”

그리드가 황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새카만 하늘이 창밖 풍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별빛은커녕 달빛조차 집어삼킨 하늘.

마치 검은색 물감을 덧칠해놓은 것 같았다.

“늦었다.”

아그너스가 눈살을 찌푸렸고,

“아.”

라우엘이 탄식했다.

점차 짙어지는 어둠이 도시의 불빛까지 삼키고 있었다.

온통 새카맣다.

유일하게 템빨계가 있는 구역만 빛을 유지했다.

점령당했다.

그리드와 라우엘이 깨닫는 순간 도시 곳곳에서 여섯 종류의 빛이 피어올랐다.

메르세데스의 검기를 뜻하는 은색, 사리엘의 신성을 상징하는 금색, 브라함의 마력이 일으킨 자색, 지크의 룬이 교차시키는 벽색, 피아로의 자연지기가 만든 녹색, 네펠리나의 속성을 교란하는 오색.

그리드의 사도들이 불빛을 집어삼킨 어둠에 저항하여 주변을 밝혀나갔다.

겁에 질린 백성들을 인도하는 등대였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 병사와 기사들이 백성들을 인솔하는 기척을 느낀 그리드가 작게 안도했다.

첨탑 위로 날아오른 그의 주황색 신성은 어느새 태양처럼 부풀어 있었다.

템빨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번쩍거리며 어둠을 걷어냈다. 사도들의 작은 빛에 닿아갔다.

급기야 합쳐진 빛은 길을 이뤘고 길 끝엔 템빨계가 존재했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이곳이 신이 세운 나라임을 상기한 백성들이 안도하며 두려움을 떨쳐냈다. 빛의 길을 따라 템빨계로 나아갔다.

그들을 비웃듯이.

“...!”

새카만 하늘 중심에 붉은 달이 떠올랐다.

기이하게 꿈틀거린다 싶더니 무지막지하게 큰 눈이 서서히 눈꺼풀을 벗었다.

라인하르트의 전경을 한 눈에 담고도 남을 거대한 눈.

수천만 명의 백성이 그 눈과 시선을 마주친 기분을 느꼈다.

그리드와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라우엘이 침음했다.

“지옥 달...”

월드 메시지가 확인시켜줬다.

[지옥 달이 눈을 뜹니다.]

뒤룩뒤룩 움직이는 거대한 눈동자 주변으로 수천수만 개의 눈동자가 추가로 떠올랐다.

달의 표면이 온통 눈이다.

하나 같이 겹눈이었다.

수천수만 개의 눈동자 안에 또 무수한 눈동자가 존재했다.

어떤 것은 빙글빙글 회전하고, 어떤 것은 위아래로, 사선으로 움직이며 라인하르트를 구석구석 핥아댔다.

소름이 돋았다.

인마대전 당시 보았던 지옥 달이 한층 더 진화한 느낌.

아그너스도 놀란 눈치였다.

“저 많은 시선은 뭐지?”

지옥 달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인마대전을 겪고 학습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눈이 박힌 달.

달에 박힌 눈 하나하나가 지상을 관측하는 시선이며, 광선을 쏴 대상을 말살하는 병기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존의 지옥 달만 해도 사람들을 감당 못할 두려움에 빠뜨렸다.

한데 이 순간 떠오른 달은 족히 수십만 배 이상의 시선을 보유한 것이다.

잠자리 따위의 복안(複眼)을 연상시키는 눈알들이 뒤룩뒤룩 움직이며 사냥감을 수색하는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참혹했다.

인류가 상상해온 모든 재앙의 수준을 초월하는, 종말의 형상이었다.

“이런 씨발.”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토했다.

무수히 많은 눈이 점차 붉게 충혈되었기 때문이다.

곧 억수 같은 광선이 쏟아질 것이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 노인과 아이를 구분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쌓아올린 문명을 손쉽게 박살낼 터였다.

수천만 백성들의 몸에 구멍이 뚫릴 것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룰 것이다...

그리드는 사실상 패닉에 빠졌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기 앞에서 최선의 대응책을 찾은 게 패착이었다.

당장 눈앞의 사람들이라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어야 옳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지옥 달 등장 후 고작 2초.

광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말의 빈틈도 없이 모든 면을 가득 채운 채 퍼부어졌다.

그리드가 순보를 썼다.

머리를 비우고 보유한 스킬을 모조리 휘둘러 하나의 광선이라도 더 소멸시켜갔다.

별 소득 없는 발악이란 사실을 깨닫기까지 찰나였다.

시야 범위 스킬들로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광선의 숫자가 많고 범위가 컸다.

바로 그때.

쿠르르르르릉!!

사방팔방에서 땅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아치를 이루고 켜켜이 쌓여 돔을 만들었다.

라인하르트라는 거대한 도시를 통째로 뒤덮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한 지붕이었다. 쏟아지는 광선을 막아주는 우산이었다.

-서두르세요.

대지의 신 가리온의 음성이 도시 전역에 퍼졌다.

조급하지 않고 느긋했으며, 상냥하고 따스한 음성이었다.

그녀의 태도에서 용기를 얻은 백성들이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굿.”

스킬 난사를 멈춘 그리드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가리온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었다.

이성은 진즉부터 되찾은 상태였다.

애초에 잃지 않았다. 최선의 방법을 찾다가 타이밍을 놓쳤을 때 잠시 흥분했었을 뿐이다.

쿠르르릉...

잠시 후 광선의 폭격이 멎자 돔이 걷혔다.

새카만 하늘과 지옥 달이 다시금 도시의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드는 우선 백성들의 동향을 살폈다.

사도들의 인솔 덕분에 수만 명의 백성들이 템빨계에 입장을 완료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전체 인구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템빨계의 면적에 한계가 있는 까닭에 사람들이 더 이상 대피할 곳이 없었다.

‘또 다시 폭격이 시작되면 나랑 사도들이 막아야 돼.’

제아무리 가리온이라도 조금 전 같은 대규모 권능을 연속으로 사용하긴 힘들 것이다.

그건 지옥 달 역시 마찬가지다.

놈의 폭격에 횟수 제한이 있단 사실을 인마대전 때 파악했다.

생각하며, 그리드는 지옥 달을 노려봤다.

무수한 시선을 홀로 받아내겠단 심산으로 기세를 끌어올렸다.

언젠가 용들의 감각을 사로잡았던 하야테를 떠올리면서, 그를 본받듯 자신이 짊어진 책임을 감수했다.

-장하다. 태도만 봐서는 이미 절대자구나.

쿠웅!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불쑥 들려온 음성에 깃든 압박감이 무시무시했다.

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을 정도다.

실제로 수많은 백성들이 혼절해버렸다.

[지옥을 지배하는 서열 제1위 대악마 ‘바알’이 출현하였습니다.]

[모든 의지를 상실합니다.]

[성속성을 제외한 모든 속성 저항력이 0퍼센트로 고정됩니다.]

[마기 저항력이 마이너스 200퍼센트로 고정됩니다.]

[치명타 저항력, 약점 저항력, 회피율 보정 효과가 0으로 고정됩니다.]

[적용 중인 버프가 해제되고 모든 버프 적용 불가 상태가 됩니다. 아이템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적용 중인 패시브 스킬이 해제되고 모든 패시브 스킬의 기능이 정지합니다. 아이템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스킬과 마법 사용 시 표적을 설정할 수 없습니다. 타깃팅 스킬과 마법이 논타깃 스킬과 마법으로 변경됩니다.]

[절대 명중 보정을 받는 스킬들이 보정 효과를 잃습니다.]

지옥의 절대자.

바알의 존재감은 인류가 감당할 수준이 못 되었다.

사도들의 안색조차 하얗게 질렸고 그리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생각하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몸과 둔화 된 동작이 낯설었다.

바알이 유발하는 온갖 상태 이상 중에서 ‘공포’만큼은 그리드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세 명의 신들을 휘하에 둔 주신의 위계로도 바알의 격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옥이 아닌 지상임에도.

아니, 어쩌면 이건 격과 관계없는 절대 판정일 수도 있었다.

바알이 세계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조금 전, 지옥에 새로운 규칙을 세웠다.

지옥 달 아래서.

들불처럼 일렁이는 그림자를 휘장 삼아 모습을 반쯤 가린 바알이 입을 열었다.

언뜻 보이는 입 꼬리가 즐겁다는 듯이 솟구쳐 있었다.

-입장은 자유이나 퇴장하기 위해선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단순해. 앞길을 가로막는 악마들과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다. 너희들 인간도 풍류를 아는 종자이니 함께 즐길 수 있을 거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놀이에 이끌리는 건 너희나 우리나 똑같지 않나.

-자, 놀이를 시작하자.

스르륵.

일방적인 선언과 동시에 바알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디버프에서 해방 된 사람들의 숨통이 트인 반면 그리드는 잠시 넋을 잃었다.

하늘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 탓이었다.

[<수라도(修羅道)>가 열렸습니다.]

지옥 달의 무수한 시선들이 지옥의 풍경을 영사하기 시작했다.

한층 더 끔찍하게 변모한 지옥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늘을 스크린 삼아 중계됐다.

대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저들을 방관할 것인가, 지옥으로 내려와 구출할 것인가.

바알이 인류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지옥 에피소드의 본격적인 서막이 바알의 선공으로 열린 것이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