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7권 - 14화
“잠깐! 잠깐만요!!”
사람들은 그리드에게 온갖 찬사를 보낸다.
가끔 보면 위인 수준을 넘어서 천사 취급하는 무리도 있었다.
품행이 훌륭한데다 많은 선행을 베풀기 때문이라는데, 그리드의 적이 된 입장에서 그런 이야길 들으면 웃음밖에 안 나왔다.
현실과 Satisfy 양면에서 선행을 많이 베푸는 건 부정 못하겠다.
근데 품행?
품행을 본받아야하긴 개뿔, 저건 순 깡패 새낀데.
자식에게 그리드 위인전을 읽히는 부모들은 자식이 건달로 자라지 않도록 예의주시해야할 거라고, 로제는 이 순간 확신했다.
어느새 목덜미에 드리운 차가운 칼날을 느끼면서다.
아니, 기분만 그럴 뿐이고 실제로는 차갑지 않다.
금속 특유의 냄새나 감촉이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느낌.
목에 닿은 칼날은 분명히 실제하고 있었고, 로제의 시야 한쪽을 채웠으나, 어째선지 로제는 실체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기(氣)계열 스킬로 빚은 무기가 더 뚜렷한 존재감을 발휘할 것 같았다.
‘이게 드래곤 웨폰...’
로제는 그리드와 싸운다고 가정해봤다.
자각하지 못하고 베이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초월적인 속도로 휘두르는 검이 기척조차 없으면 베이는 수밖에.
“일단, 일단 검을 좀 거둬주세요.”
대화 도중에 다짜고짜 협박하며 칼을 뽑다니...
그리드의 흉포함에 질린 로제가 반쯤 경기를 일으켰다.
눈과 목소리가 떨렸고 호흡이 거칠었다.
그녀의 반응을 통해서 그리드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죽으면 얻는 손해가 무척 큰가.’
템빨단 내부에서 로제는 바주카단이라고 불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주머니 괴물’에 등장하는 악당들 말이다.
주인공의 앞길을 자신만만하게 가로막았다가 허무하게 패배하고 도망치길 반복하는 삼류 악당.
로제의 기질은 그들과 닮았다.
매번 덤비고 처참하게 박살나길 반복하지 않나.
그럼에도 또 다시 찾아와 까부는 걸 보면 죽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패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녀에게도 걸린 게 많다는 뜻이 됐다.
‘뚜렷한 목적을 갖고 지상을 방문한 눈치였지.’
로제가 출현했을 때 떠올랐던 월드 메시지를 곱씹어 본 그리드가 판단했다.
현재 로제는 가치 높은 퀘스트를 진행 중이며, 여기서 죽었다간 입는 손실이 평소보다 크다...
-아주 좋은 기회네요. 더 강하게 밀어붙이시죠.
실시간으로 상황을 전달 받은 라우엘이 조언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금의 성역을 전개했다.
그 즉시 세 사람이 빌려 쓰고 있는 촌장의 집이 펼쳐졌다.
통나무가 아니라 종이로 지어진 집처럼, 천장과 벽이 분리되어 땅에 닿았다.
주황색 극광이 물결처럼 흐르기 시작했고 일대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높은 절벽이 솟아올라서다.
새카만 색감으로 반들거리는 절벽은, 흑철로 이루어져 있었다.
“협곡...”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친 절벽들 사이에서 아그너스가 중얼거렸다.
광인으로 떠돌던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테일렌 협곡.
그리드가 최초의 서사시를 썼던 그곳은, 아그너스의 무의식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와 닮았던 그리드가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로 완성됐던 장소이기에.
당시 느꼈던 온갖 감정들을 생생하게 떠올린 아그너스가 의미 없는 가정을 해보았다.
‘그때의 내가 그리드를 부정하지 않고 긍정했으면 어땠을까.’
허탈감과 배신감, 그리고 분노 따위에 매몰되지 않고 솔직하게 부러워했다면.
나 또한 그리드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때부터 바뀔 수 있지 않았을까.
과거가 아닌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을까.
“어...? 어어?”
플레이어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든 이적의 행사.
갑자기 변모한 풍경에 로제는 당황하고 있었다.
언어구사능력을 반쯤 상실한 채 표정을 다양하게 바꾸는데, 지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해 큰 혼란을 느끼는 눈치였다.
쿠르르르릉...
절벽이 흘러내렸다.
그리드의 일부가 된 주작의 심장이 발하는 열기가 흑철을 초콜릿처럼 녹였다.
지면에 닿는 즉시 굳어 켜켜이 쌓인 흑철은 멈춘 파도와 같았다.
높고 크다.
로제는 삼켜질까봐 두려웠다. 무지막지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한 발 늦게 눈치 챘다.
새카만 파도의 끝 날이 모조리 뾰족했다.
저건 파도가 아니라 수천수만 개의 병장기다.
얽히고설킨 병장기가 전부 나를 겨누고 있다...
‘진짜... 진짜로 미친놈인가?’
로제는 본인이 악역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플레이어를 적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정작 적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그리드에겐 적대심을 품지 못했다.
압도적인 격차를 알았고, 같은 게이머로서 존경심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
그리드를 만난 순간부터 로제는 쭉 공손했다. 한 순간도 예의를 잃지 않았다.
한데 그리드는 그녀에게 검을 겨누었다.
검을 거둬달라고 부탁했더니 말로만 듣던 심상세계를 펼치고 수천 개의 병장기를 들이밀었다...
...어쩌라고?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 혼란에 빠진 그녀에게 그리드가 해답을 제시했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야. 그냥 평소처럼 지내다가 우리가 원할 때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주고, 우리가 원할 때 우리가 원하는 스탠스를 취해주면 돼.”
이건... 도둑놈 아닌가?
그리드도 말하면서 뜨끔했다.
하지만 의외로 로제의 표정이 풀렸다.
‘구두 약속 따위야 문제없지.’
귓속말은 물론이고 스크린 샷과 동영상 촬영마저도 불가능한 몸이다.
대악마 로제는 매우 폐쇄적인 신세였으므로, 오히려 템빨단은 그녀를 감시할 수단이 없었다.
막말로 로제가 템빨단의 요구대로 행동하는지 아닌지 템빨단이 무슨 수로 확인한단 말인가?
“...좋아요. 제가 악마들을 배신했다간 엄청난 위험에 빠질 수도 있지만 뭐, 사실 전 템빨단을 좋아하거든요. 템빨단과 협력할 수 있게 돼서 영광이네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삼킨 로제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신, 제 부탁도 들어주세요. 아모락트와 동맹을 맺어주시면 좋겠어요. 이건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부탁이 아니에요. 어떻게든 바알을 없애야만 지상이든 지옥이든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템빨단과 아모락트의 협력은 그야말로 이 세계를 위한 협력이라고요!”
“좋다.”
로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의 태도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에게 그리드가 말했다.
“템빨단 지옥지부에 가면 옷을 두껍게 입은 서큐버스들이 있을 거야. 내 심복들이지. 그들을 데리고 아모락트를 만나서 정확한 협상 내용을 조율하도록 해.”
“네?”
템빨단 지옥지부야 대충 짐작이 갔다.
유라가 지배하고 있는 크리스탈 성일 테지.
근데 옷을 두껍게 입은 서큐버스라니...?
이성을 매혹하는데 혈안이 된 서큐버스가 옷을 두껍게 입을 리 없잖은가?
다 떠나서 아모락트랑 협상하는 자리에 한낱 마물들을 데려가 봤자 무슨 의미가...
“나는 그들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으니까 커뮤니케이션은 걱정 말고. 자세한 이야기는 라우엘하고 이어서 하지?”
그리드가 금의 성역을 거뒀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협곡과 병장기의 파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세 사람은 다시 나란히 마주보고 앉은 형국이 됐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서 또 다른 거물이 등장했다.
템빨제국의 재상, 라우엘.
템빨단을 적대하는 모든 세력에겐 천하의 쓰레기, 죽일 놈, 개자식 따위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세 분이 함께 계신 모습을 보니 감회가 깊네요. 세월의 흐름이 실감 된다고 할까요. 후훗.”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는 라우엘의 손등에 검은 용의 형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한쪽 눈동자엔 어떤 문양이 나타나기도 했다.
소문대로 스킨을 도배한 모습이었다.
로제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안 그래도 그리드를 상대하느라 피곤하던 차에 라우엘과 엮여야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로그아웃이 하고 싶었다.
“로제 님은 저랑 자리를 옮기시죠. 비즈니스는 제가 담당하는지라.”
“아... 하하핫... 네...”
로제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라우엘을 따라나섰다.
오늘, 그녀는 철저하게 분석당한 뒤 손발이 묶일 것이다.
앞으로 템빨단과 협력하는 기간 동안 모든 행동과 선택을 템빨단에게 통제당할 터였다.
각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모인 템빨단에는 너무 많은 수단과 방법이 있었으니까.
잠시 후.
아그너스와 단 둘이 된 그리드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와 함께 바알을 죽이자.”
아그너스의 지식과 경험.
칠악성의 힘들이 함께할 때 발생하는 시너지.
그리드는 아그너스가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아그너스의 체질이 베티와 같아졌다는 점도 주목했다.
당장은 무력이 쇠락했을지언정 잠재력은 엄청날 것이다.
‘약해졌다고 해도 어지간한 하이랭커보단 훨씬 강하고.’
그리드는 반드시 아그너스와 협력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설득해야할지 감이 안 잡혔다.
꺼낼만한 협상 카드가 없다는 게 문제다.
사실상 현역에서 은퇴한 아그너스에게 로제 같은 욕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고민하는 그리드에게, 아그너스가 대답했다.
“좋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그리드가 기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아그너스의 금안은 오래간만에 섬뜩하게 빛났다.
“나도 한 번쯤은 바알을 비웃어주고 싶군.”
아그너스는 바알의 계약자로 활동하는 기간 내내 소망을 이용당했다.
죽은 연인을 부활시킨답시고 인형을 만들어냈을 때 비웃던 바알의 얼굴이 요즘도 악몽에 나왔다.
바알에게 버림받았을 땐 그간 쌓아올린 힘을 대부분 빼앗기기도 했다.
세월을 잃은 격이다.
기왕이면 되갚아주는 편이 즐겁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즐겁고 싶었다.
원망하고, 증오하고, 후회하는 삶에 지쳤다.
그걸로 그리드와 협력할 이유는 충분했다.
***
“...”
라인하르트, 템빨성.
템빨단 소속 플레이어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드와 나란히 걷는 사내를 목격한 여파다.
늘 기름을 칠했던 녹발은 산발이 된 채 늘어졌고, 광기로 번들거리던 금안은 빛을 잃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사내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봤다.
아그너스.
역대 최악의 플레이어.
그가 왜, 이곳에?
죄인으로 호송되어 온 건가 싶었지만 아니다.
수갑조차 채워지지 않았다.
그리드와 나란히 맞춘 걸음걸이에 위축 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술렁일 때였다.
“어? 아저씨!!”
복도 저 끝에서, 로드가 달려왔다.
우선 아버지에게 공손히 인사한 뒤, 활짝 웃는 얼굴로 아그너스의 메마른 손을 붙잡았다.
생명의 은인을 만났으니 기쁠 수밖에.
“정말로 오래간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
안 그래도 긴장감이 감돌던 복도에 침묵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붙임성 좋은 로드가 어떤 수모를 겪을지 벌써부터 걱정했다.
손을 뿌리쳐지는 건 기본에, 욕설을 당하거나 침을 맞을 수도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모든 예상이 틀렸다.
아그너스는 로드의 손을 뿌리치지도, 욕설이나 침을 뱉지도 않았다.
“그래.”
오히려 짤막하게 대답해주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경악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