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7권 - 13화
[<아수라의 파편>을 처치하였습니다.]
‘아수라?’
템빨제국의 전력은 크게 분산되어 있는 실정이다.
지옥과 천상뿐만 아니라 지방 귀족들을 경계하느라 여력이 적었다. 발할라가 적해를 등진 방벽이 되어주고 있다지만 환국을 완전히 좌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템빨단의 눈과 귀가 전부 닫힌 건 아니었다.
로제를 목격하고 추격하기 시작한 랭커들이 그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제보해줬다.
기회가 올 때마다 템빨단에 성의를 보여 놔야 이로운 점이 많았으니까.
덕분에 로제를 추적해온 그리드는 전반적인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작은 시골 마을.
정체불명의 악마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려는 아그너스와 그에게 협력하는 로제.
우선은 사람들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으므로, 그리드는 악마부터 해치웠다.
아수라.
무투가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 혹은 일부 몽크가 섬기는 투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악마였다.
아수라를 전설의 무도가, 혹은 인신쯤으로 추측해왔던 그리드 입장에선 대단히 꺼림칙했다.
주는 경험치가 상당히 많아서 더욱 찝찝했다.
‘파그마나 알렉스가 그렇듯 아수라도 바알에게 혼을 저당 잡힌 건가?’
단순히 영혼을 빼앗겼다고 보기엔 완전한 수족 같은 느낌인데...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라 눈살을 찌푸리던 그리드가 짐짓 놀랐다.
걸레처럼 찢겨나간 아수라의 파편들을 아그너스가 일일이 불태워서 소각했기 때문이다.
파편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그리드에게 경험치가 추가로 들어왔다.
그리드가 아수라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었단 반증이었다.
‘처치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이 아수라의 죽음을 판정했다. 그리드에게 합당한 경험치를 제공했다.
한데 알고 보니 살아있었다고?
아수라가 죽음을 기만하는 계열의 패시브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혹은 저 그림자 하나하나가 아수라의 본체이거나.
‘뭐가 됐든 아그너스는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단 거지?’
“죽여라.”
아그너스가 목을 내밀어왔다.
페이커에게 막말로 무한 척살을 당하고 약화된 끝에 바알에게 버림받은 그는, 전성기와 비교해서 확실히 약해진 상태였다.
최근엔 어디서 사고를 쳤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
사람들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널 왜.”
아그너스의 비쩍 마른 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리드가 검을 거뒀다.
엄밀히 따져서 그리드에겐 아그너스를 죽일 명분이 적었다.
과거의 악연들은 아그너스가 아이린과 로드를 구해줬을 때 사실 대부분 청산했다. 페이커가 수십 배로 되갚아주기도 했다.
로드의 곁을 지키겠다는 페이커를 그리드가 강제로 지옥 원정대에 합류시킨 이유?
페이커의 성장이 중요해서이기도 했지만 페이커가 <살생부> 스킬을 아끼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지금의 아그너스는 페이커가 눈에 불을 켜고 쫓아가 죽일 정도로 가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싫으면 관둬라.”
아그너스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지금의 난 죽일 가치도 없다는 거냐는 둥, 자존심이 상해서 발광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폐, 폐하...!”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을 주민 수백 명이 그리드를 발견하고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제국은 무지막지하게 넓다.
또한 초상화나 황궁에서 서술하는 황제는 미화되게 마련이다.
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황제를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해야 정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템빨제국민들은, 산 속에 숨어사는 화전민들조차도 황제의 얼굴을 단숨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리드는 황제이기에 앞서 신이기에.
미화가 필요 없이 신성한 그의 초상, 신상, 성전에 너무나도 익숙했다.
“...”
그리드는 고개 숙인 사람들의 태도를 면밀히 관찰했다.
슬쩍슬쩍 아그너스를 살피고 안도하는 그들의 모습을 토대로 그들에게 아그너스가 어떤 인물인가를 파악했다.
‘변했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특히 악하거나 게으른 사람일수록 제멋대로 쉽게 살아가는 법에 익숙해져서 교정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런 주장에 공감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이 변한 케이스니까.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그너스는 더욱 신뢰했다.
자신은 결코 감당하지 못했을 과거를 지닌 사내.
추악한 쓰레기들에게 괴롭힘 당한 끝에 사랑하는 여인마저 잃고도, 그는 완전히 타락하지 못했었다.
무의식중에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습을 문득문득 봤었다.
“아그너스 네가 저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겠다.”
“...”
아그너스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 안도하며 기뻐하는 사람들.
그들을 보는 그리드의 눈빛이 따뜻해서, 아그너스는 굳이 변명거리를 찾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그리드가 제안했다.
“나랑 잠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아그너스는 그리드가 자칫 살려 보낼 뻔했던 아수라의 파편을 확실하게 처리했다.
바알의 계약자 출신답게 악마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증거였다.
생각해보면, 바알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플레이어는 단연코 아그너스일 것이다.
그리드에겐 아그너스의 지식이 필요했다.
“싫...”
“이 마을은 제국의 영토인데. 여기서 살고 싶으면 당연히 국적을 옮겨야 되지 않나? 갑자기 단속이라도 떠서 불법체류자 신분에 발목이 잡혔다간 골치 아플 거야.”
“...”
권력은 요긴하게 쓰인다.
옛날, 대륙의 공적이 됐던 시점부터 국적을 잃은 아그너스의 약점을 그리드는 손쉽게 파고들었다.
“누, 누추하지만 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촌장이 그리드와 아그너스를 안내하는 그때였다.
“그, 그리드 님!”
로제가 그리드를 뒤쫓아 왔다.
몸을 다시 인간 크기로 줄인 그녀는 이마에 솟은 뿔을 양손으로 가린 채였다.
악마를 혐오할 게 분명한 그리드에게 되도록 인간처럼 보이려는 노력이었다.
“아, 아모락트 님... 아니! 아모락트 그놈이 감히 그리드 님께 전할 말씀이 있다고 몹시 공손한 태도로 부탁했거든요!? 헤헷!”
“...들어나 보지.”
로제가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던 장면을 떠올린 그리드가 여지를 줬다.
잠시 후.
아그너스, 로제와 마주보고 앉은 그리드는 기분이 묘해졌다.
전 바알의 계약자, 그리고 대악마와 자신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다니.
세상이 참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먼저 말해.”
그리드가 로제에게 눈짓하자 로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
평소엔 음흉하게 번뜩이던 그녀의 두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늘 흠모해온 그리드 님을 모실 기회를 얻어서 영광이에요! 허락해주신다면 인증 샷이라도 찍고 싶은데... 대악마는 스크린 샷이나 동영상 촬영 기능이 먹통이라... 아하핫...”
대악마는 인간과 완전히 적대해야하는 입장이다.
지옥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지상에 유출할 경우 지옥이 크게 불리해질 수도 있기 때문인지 촬영과 소통 기능에 많은 제약이 생겼다.
한때 로제의 취미가 디저트 가게에서 찍은 인증 샷을 SNS에 올리는 거였던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페널티였다.
그러므로 로제는 만사형통을 바랐다.
여러 손해를 감수하고 대악마가 된 김에 승승장구하고 싶었다.
이 순간 자존심을 버리고 그리드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이유다.
“본론만 지껄여라.”
로제를 재촉하는 사람은 그리드가 아닌 아그너스였다.
안 그래도 이 자리가 불편했던 그는 로제의 헛소리를 잠자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속으로 아그너스를 욕한 로제가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두 손을 연신 비벼대며 굽실거리는데, 그 모습이 언젠가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보았던 똥파리를 닮았다고 그리드는 생각했다.
“그, 그렇죠. 저희 따위가 감히 그리드 님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아선 안 되겠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모락트는 바알을 견제해야한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그리드 님도 아시다시피 바알이 워낙 사이코패스잖아요? 지옥을 지금 상태로 변질시킨 당사자가 다름 아닌 바알이기도 하고...”
“...”
그리드가 아그너스의 눈치를 살폈다.
저희 따위.
아그너스를 은근히 자신과 엮는 로제의 태도를 보고 아그너스가 당연히 화를 낼 줄 안 것이다.
한데 의외로 아그너스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어떤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태도.
그런 것치고 눈빛은 또 살아있다.
적어도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것 같진 않았기에, 그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고 말았다.
‘미운 정도 정이라더니.’
이제는 아득히 먼 옛날로 느껴지는 과거.
아그너스와 치열하게 싸웠던 기억들이 뇌리에 스친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 시절과 달리 쇠락한 아그너스와, 그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 나.
어느 쪽이 정상이지?
둘 다 비정상이긴 한데... 내가 조금 더 이상한 것 같긴 하다.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강해진 걸까.’
혼자서만 너무 멀리 온 느낌이다.
이해하기 힘든 불안과 고독이 불현듯이 밀려왔다.
“아모락트에게 바알은 늘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존재였는데, 마침 그리드 님께서 지옥을 정화하겠다고 선포하신 거예요. 평소부터 그리드 님의 위업과 덕망에 큰 관심을 품어왔던 아모락트는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죠. 이참에 그리드 님을 믿고 협력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함께 힘을 모아 바알을 해치우고 싶다고...”
로제가 연신 떠드는 가운데 그리드의 의식은 점차로 침잠해갔다.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독보적인 존재가 된 걸까.
단순히 노력의 결과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같은 플레이어와 경쟁하던 시절이 그립다.
원망하고 시기하면서도 때로는 의지가 되었던 라이벌이 많았던 시대.
그때가 훨씬 더 즐거웠던 것 같다...
“너.”
“...”
문득 불러오는 목소리에 그리드가 정신을 차렸다.
건너편에 앉은 아그너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눈치인데, 추억 보정은 빼라. 나는 단 한 순간도 너와 동등했던 적이 없어. 영락한 내 모습을 통해서 어떤 감회를 느낄 이유가 네겐 하등 없단 말이다.”
아그너스는 항상 고독과 불안에 시달려왔다.
그리드의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쉽게 읽어냈단 의미다.
그 감정의 근간이 무엇인지까지.
“너와 같은 눈높이를 가진 괴물은 처음부터 크라우젤 하나였다.”
놈은, 이 세계에서 내게 첫 번째 좌절감을 안겼던 재능의 총아다.
언젠가 반드시 너의 경쟁자로 돌아올 만한 놈이다.
그러니까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고독과 불안은 섣부르다.
그런 말들은 삼킨 아그너스가 입을 닫았다.
더 이상 지껄이기엔 낯짝이 뜨거워질 것 같아서였다.
‘씨발.’
예전부터 그리드 저놈만 보면 감정이 들끓고는 했다.
힘든 과거를 간직하고도 나와 달리 우뚝 섰던 놈을 향한 반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내가 놈에게 품은 감정은 반감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깨닫고 이마를 덮는 아그너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리드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지랄.”
“...저, 계속 말해도 되죠?”
로제는 허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드에게 아모락트와 협력했을 때 생길 이점들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애초에 아모락트가 종이와 펜을 구하는 이유는 그리드에게 서신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동맹 제안 서신.
만약 로제가 이 자리에서 그리드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하면 종이와 펜을 구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이다. 퀘스트 보상의 가치가 훨씬 더 높아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말이죠...”
“다 알고 있어.”
연신 떠드는 로제의 말을 그리드가 중간에 잘랐다.
“네? 뭘요?”
“바알이 지옥을 그 모양 그 꼴로 만들 때 협력한 존재가 아모락트잖아. 그 과정에서 베리아체가 추방당했던 거고.”
“...”
“분쟁의 대악마. 과거에는 베리아체를, 이제는 바알을 고립시켜서 내분을 유도하는 놈을 내가 무슨 수로 신뢰하고 손을 잡지? 놈하고 손을 잡아서 설령 바알을 레이드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이후에 원하는 결과를 얻을 거란 보장이 있나?”
“아, 그게... 헤헤, 제게 해명할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네요.”
로제는 이 상황이 무척 당혹스러웠다.
그리드가 지옥에 대해서 이토록 훤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자신도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들을 어떻게...
물론 당황을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리드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귓속말로 소통 중인 라우엘의 조언을 따라서 곧장 말했다.
“로제 당신, 우리 측 첩자가 될 생각은 없나?”
“저, 악마인...”
“싫으면 일단 죽어.”
“...”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그너스는 생각했다.
저 독한 놈이 저래서 저기까지 올라갔구나.
저렇게까지 하니까 지존이 됐구나.
그래놓고 고독을 느끼는 건 염치없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