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7권 - 12화
바알의 사역마에게 감시를 받고 있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로제는 경각심이 아닌 희열을 느꼈다.
플레이어 중 유일한 대악마.
현재 공백인 바알의 계약자로 적합한 사람이 나 외에 누가 있단 말인가?
은연중에 품어온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바알의 감시가 호의 섞인 관심으로 다가왔다.
‘아모락트에게 의리를 지켜야... 할 필요는 없지.’
로제가 대악마가 된 건 순전히 아모락트 덕분이다.
하지만 로제는 대악마가 된 덕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여러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가로 얻은 힘은 빛을 보기도 전에 짓밟히길 반복해왔다.
매번 중요한 순간마다 템빨단을 만나 진압당한 기억밖에 없었다.
그건 로제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로제는 매번 대규모 퀘스트에 참가해왔는데 그때마다 수뇌부의 대가리가 텅텅 비어있던 까닭에 전략, 전술에서부터 밀렸다.
악마들 중에 영리한 놈이 드물었다.
애초에 영리한 놈들은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은밀하게 활동하며 제 잇속 챙기기에 바빴지.
아무튼 로제는 아모락트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을 곁에 두고도 유라에게 집착하는 아모락트보단 바알 곁에 있는 편이 속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바알이 제1위 대악마이기도 했고.
줄을 잘 타야한다.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이자!’
“오물.”
“뭐, 뭐요?”
다짜고짜 욕설을 지껄이는 아그너스에게 로제가 반문했다.
아그너스에게 속내를 읽힌 것 같아 뜨끔했다.
하지만 아그너스의 시선은 로제가 아닌 그녀의 등 뒤에 고정되어 있었다.
꿈틀꿈틀 물결치는 어둠.
바알의 사역마.
“저 그림자는 바알의 오물이다. 지옥 땅을 한 번이라도 밟는 순간, 누구라도 그림자에 저 오물을 묻히고 말지. 바알이 너를 특별하게 여겨서 감시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아그너스도 바알의 계약자 자격을 박탈당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지쳐서 약화되었을 때 그림자에 빌붙어 있던 저 오물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바알의 계약자로 쌓아올린 힘들을 회수해갔다...
아그너스는 그제야 많은 걸 이해했다.
바알이 무슨 수로 지옥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알고 있던 건지.
죽은 악마와 마물의 힘을 무슨 수로 ‘흡수’하고 ‘전이’시켜온 건지.
“지옥은 겉보기와 달리 바알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어. 또한 바알의 놀이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기서 어떤 목적을 품거나 의미를 찾는 것만큼 무가치한 일도 없지.”
지옥에 얽매인 모든 존재는 결국 바알의 뜻대로 운명이 결정된다.
아그너스는 실제로 몇 번이나 목격했다.
바알에게 구원 받고, 힘을 얻고, 바알을 찬양했던 악마들이 종국에는 바알에게 배신당하고, 조롱당하며, 바알을 저주하고 죽어가는 광경을.
바알과 어울리는 놈들은 모두 똑같은 최후를 맞이하리라.
“아모, 아모락트는 다르겠죠?”
로제가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아그너스의 성격을 떠올리면서다.
아그너스는 누가 봐도 광인이었으나, 그러므로 오히려 빈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고 증오의 대상이 됐던 이유 중 하나는 거침없이 진실을 말하는 태도에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으므로 거짓도, 가식도 없는 자.
그게 아그너스였다.
“그 계집을 신뢰하기엔 존재 자체가 저주 아닌가?”
아그너스가 일고의 고민 없이 즉답했다.
분쟁의 대악마.
시선만으로 사람을 광란시키는 저주덩어리.
놈의 본체와 마주하는 존재는 아군을 적으로 인식한다.
전설의 격으로도 저항이 불가능했다.
오래 전, 아그너스가 직접 경험했다.
바알의 궁전에 방문했던 아모락트와 마주쳤을 때.
-아그너스, 못 본 새 혀가 길어졌구나.
로제의 그림자에서 떨어져 나온 바알의 사역마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저것엔 입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검은 연기가 일렁일 때마다 머릿속에 음성이 스며들었다.
볼품없는 생김새였다.
하지만 아그너스는 저놈이 겉보기와 달리 대단한 거물이란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바알의 눈이자 귀.
<아수라의 파편>
무려 수십억 개 단위로 쪼개진 상태에서도 자아를 유지하고 바알의 의지를 실천하는 놈이다.
태초의 3악과 더불어 지옥 최강자 중 하나일 확률이 높았다.
딱히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신들 중에서는 ‘치우’라는 유일신이 최강을 논한다지 않던가.
한데 일반인은 치우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옥에도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강자가 숨어있어야 옳은 것이다.
-볼품없이 쫓겨난 네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 함부로 지옥을 논하느냐.
“똥통에 대해서 말하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하다는 거야? 저 병신새끼.”
아그너스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죽은 연인을 게임에서나마 부활시키고 싶다.
그 헛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애썼던 시절에도 악마들을 혐오했던 그에겐 이제 거리낄 게 없었다.
“자, 잠깐. 이거 괜찮은 거예요?”
로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쳤다.
검은 그림자가 점차 어떤 형상을 갖춰나갈수록 온갖 상태이상을 유발한 까닭이다.
당연히 대악마는 대부분의 상태이상에 저항했으나, 지금은 예외였다.
급기야 인간의 형상을 완성하고 세 쌍의 팔을 뻗는 아수라의 파편으로부터 지독한 공포를 느꼈다.
명백한 살기가 아그너스와 로제, 그리고 마을주민들에게도 향했다.
목격자를 모조리 없애려는 눈치였다.
아니, 아무런 이유 없는 살의일 수도 있다.
본래 악마란 그런 존재니까.
“저쯤이야 괜찮아야지.”
본체도 아니고 수십억 개의 파편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콧방귀 뀐 아그너스가 데스나이트와 해골 군단을 소환했다.
로제가 귀를 의심했다.
아그너스가 일부 해골에게 ‘사람들을 지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뭐야? 왜 저래?’
아그너스의 약자 멸시는 유명했다.
약한 사람은 살 자격이 없다는 듯이 증오하고 해쳐대는 통에 광견으로 불렸던 것이다.
종종 여성에겐 함부로 대하지 않는단 소문이 뒤따랐지만 당연히 헛소문 취급을 받았다.
한데 이 순간 아그너스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약자를 우선순위로 보살폈다.
그리드의 영웅담에 감화되어 도리를 운운하는 평범한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보였다.
힘을 잃은 여파일까?
지난날 동안 쌓아올린 악명을 떨쳐내야 터전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걸까?
잘못 된 판단이다.
아그너스는 무려 15년 가까이를 악인으로 살아왔다.
이제 와서 선행을 베풀어봤자 그를 향한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 결국 자기만족이란 뜻인데.’
죄는 씻지 못할지언정 죄의식만큼은 벗고 싶다거나.
그것 참, 멋없는 남자다.
악역을 맡았으면 응당 마지막 순간까지 악인으로 살다 갈 것이지.
로제는 쯧쯧 혀를 차면서도 아그너스에게 협력했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자신 역시 아수라의 표적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오해를 풀고 자시고 간에 일단 살아남아야 종이와 펜을 구하고 무사히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었다.
채챙!
처음 몇 번 공방을 교환했을 때, 로제는 꽤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수라의 파편은 자신보다 조금 우위의 능력치를 지녔을 뿐이고 아그너스는 명불허전의 강자였으니까.
‘일개 사역마가 대악마급이라는 게 소름 돋긴 해.’
로제는 인마대전 당시 보았던 커다란 개구리를 떠올렸다.
체파르데아.
놈 또한 바알의 사역마에 불과했지만 무려 한 자릿수 대악마에 버금가는 힘을 지녔었다.
아모락트의 심복 유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봤을 때야 순순히 납득했다.
하지만 아수라의 파편은 아수라의 극히 일부라지 않나.
굳이 본체와 비교하면 손톱 아니, 머리카락 한 올 수준의 힘밖에 내지 못한단 의미가 됐다.
근데도 대악마와 동격이다.
이쯤 되면 아수라의 본체는 태초의 3악과 큰 차이가 없지 않나?
아수라의 정체가 무엇인지 로제는 새삼 궁금해졌다.
아주 잠시.
찰나지간에 품은 호기심이었다.
한데 지불한 대가는 몹시 컸다.
아수라의 형상을 이룬 그림자가 갑자기 커진다 싶더니 로제의 가슴에 구멍을 꿰뚫었다.
보통의 플레이어는 쌓을 수 없는 그녀의 막대한 생명력이 무려 20퍼센트나 한 방에 날아갔다.
템빨단을 상대로도 겪어보지 못한 파괴력이었다.
한 순간 머리가 하얗게 질린 그녀의 귓전에 아그너스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이런 식인가. 다른 파편들이 모여 드는군. 쯧.”
아수라의 파편은 지옥 땅을 밟은 모든 존재의 그림자에 깃든다.
단순히 악마와 마물들만 감시하는 게 아니란 의미다.
최근의 인간들은 지옥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하므로 죄다 바알의 손바닥 위였다.
바로 근처에 또 다른 아수라의 파편이 있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 지금처럼.
-킬킬! 키키킥!!
사방팔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한 그림자들을 등에 업고 몸을 부풀린 아수라의 파편이 광소를 터뜨렸다.
낱개로 있어야 도리어 이성을 유지하는 타입 같았다.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쳐줄 수 있나?”
“네...?”
후덜덜 떨다가 어안이 벙벙해지는 로제였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반문하는 그녀에게, 아그너스가 설명했다.
“갈 곳 잃고 방황하던 내게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들이다. 괜히 나 때문에 그들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데.”
“당신 때문...? 나 때문 아닌가요? 내가 우연히 이곳을 방문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에요?”
“네 그림자를 건드린 건 나지.”
사실 로제 탓이 맞긴 했다.
그녀 때문에 위치가 발각당한 아그너스는 언젠가 반드시 악마들의 침공을 감수해야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 탓을 할 때가 아니라 협력해야 할 때였다.
수백 명 사람들의 목숨이 달렸다.
약하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되는 사람들을, 아그너스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과 겹쳐보지 않았다. 증오하지 않았다.
사실은 오래 전부터 그랬다.
하지만 바알의 계약자는 악역이었고, 사람들을 해쳐야만 목적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에, 진실 된 마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 된 마음의 무게보다 죽은 연인을 살리고 싶다는 염원이 훨씬 더 컸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질 좋은 종이와 펜을 보답으로 주세요. 당신, 돈은 많죠?”
로제는 긴 소매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아그너스의 손목을 놓치지 않았다.
살점 하나 없는 백골.
아그너스의 종족은 인간이 아니다.
리치? 데스나이트?
아무튼 언데드였다.
자신과 교류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플레이어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기왕이면 인연을 만들어두고 싶었다.
“알겠다.”
아그너스가 거래에 응했고, 로제가 날개를 펼쳤다.
거대화를 써서 대악마다운 위용을 갖추더니 겁에 질린 사람들을 마법으로 포박해 공중으로 띄웠다.
우선 이곳을 빨리 벗어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 멀리서 추가로 날아온 새카만 그림자 2개.
아수라의 파편들이 그녀의 날개를 찢어버렸다.
이어서 인간 형상의 그림자와 합쳐지더니 크기를 더욱 불렸다.
아그너스마저 긴장시키는 위압감이 작은 마을을 지배했다.
사람들이 혼절했고 마법을 취소당한 로제는 조급해졌다.
“죽음의 룬 개방.”
아그너스가 룬의 힘을 모조리 꺼냈다.
칠악성의 힘 <패왕>이 정상적으로 작동 중인 것까지 점검한 후에야 아수라의 파편에게 몸을 날렸다.
쩌엉! 짜아아앙!!
아수라의 파편이 확실한 우위에 있었다.
파편을 불러 모아 힘을 부풀린 놈의 수준은 20위대 대악마와 비견되었는데, 지금의 아그너스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그너스에겐 벤타오의 조롱이 있다.
누구를 상대로든 역전의 가능성을 넘볼 수 있는 비장의 한 수.
-키햐하핫!!
아그너스가 이를 악 물고 버틸수록 아수라의 광소가 커졌다.
놈은 굳이 공격을 방어하지 않았다.
적을 벨 때, 그리고 자신의 몸이 베일 때마다 거대한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웃어댔다.
덕분에 모든 공격의 데미지를 확률적으로 2배씩 높이는 패왕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아그너스였지만, 그의 희망은 점차로 작아졌다.
언데드가 된 몸이 생각보다 단단하지 못했다.
언데드는 대부분의 디버프와 물리적인 상태이상을 쉽게 저항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정이 옅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설정 때문이다.
근육과 살을 잃은 뼈는 공격을 당할 때마다 취약하게 부러졌다.
아그너스의 전투력이 빠르게 약화됐다.
-그 몸뚱이에 어울리게끔 얼굴 가죽도 벗겨주마. 킬킬.
확실하게 승기를 잡은 아수라가 경박하게 웃어대는 그때였다.
콰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세 갈래의 빔이 아수라의 상반신을 꿰뚫었다.
급히 고개를 올린 아수라가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드래곤...?
콰자작!!
두 자루 드래곤 웨폰이, 아수라의 몸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신장>의 효과가 발동되어 스킬 쿨타임이 초기화됩니다.]
[또 다른 칠악성의 힘, <패왕>에 상처를 입은 대상입니다.]
[숨겨진 인연 효과 <칠악성의 의지>가 발생합니다!]
[신장으로 사용하는 다음 스킬에 패왕의 가호가 깃듭니다. 데미지가 반드시 2배로 적용됩니다.]
아수라는 고통을 모르는 눈치였다.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둘로 쪼개진 몸을 동시에 움직였다.
강력한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무장한 불청객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각기 다른 무기를 쥔 여섯 개의 팔이 일제히 움직이는 광경이 현란했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무려 서른 개의 손이 있었다.
하나 같이 나선을 그리며 아수라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는 손.
누구보다 그리드 본인이 가장 놀랐다.
‘어떻게 된 거야?’
태극권은 스킬이 아니다.
특정 명령 값을 입력하면 갓 핸드의 인공지능이 알아서 구사하는 스킬과 달리 기이한 조화를 부리는 평타였다.
그래서 그리드는 자신이 일일이 명령을 내려야만 갓 핸드가 태극권을 구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데 이제 보니 서른 개의 갓 핸드가 태극권을 모조리 학습한 상태였다.
지난 며칠 동안 그리드가 가르쳐줬던 내용을 함께 복습하기라도 한 걸까 싶었다.
‘...충분히 가능하긴 하겠군.’
평범한 사람들도 게임 속의 경험을 현실에서, 현실의 경험을 게임에서 구사하는 실정이다.
갓 핸드의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그걸 못할 리가 없었다.
납득하며 미소 짓는 그리드를 로제와 사람들이 멍하니 지켜보는 가운데.
“죽여라.”
갈기갈기 찢겨진 아수라의 파편들을 불태워 없앤 아그너스가 그리드에게 목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