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7권 - 11화
“후우, 하아.”
“...?”
이른 아침.
산책로에 도착한 영우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슈카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양팔을 느릿느릿하게 휘둘러 대는데, 영우가 어릴 때 즐겨보던 영화 속 태극권을 닮아 있었다.
비율 좋고 예쁘니까 뭔 짓을 해도 어울리네.
생각하는 영우에게 지슈카가 설명했다.
“집중력을 높이는데 좋다고 해서.”
동작을 느리게 풀어나가는 건 의외로 어렵다.
빠르게 움직일 때보다 도리어 높은 집중력과 인내심을 요구했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배운 스킬의 난이도가 엄청 높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동생 세희가 녹화해준 동영상으로 몇 번이나 봤다.
이제 지슈카의 화살은 표적을 노리지 않는다.
애꿎은 땅이나 벽 등에 쏘아진 뒤 튕겨 나와 기이한 각도로 휘어지길 반복한 후에야 비로소 표적에게 닿았다.
목덜미에 꽂힌 화살을 보고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쓰러지는 악마들의 모습이 압권이었다.
안 그래도 은신 효과가 깃든 지슈카의 화살이 더욱 예측 불가능한 무기로 진화한 것이다.
다만 화살을 쏘는 입장에서도 궤도를 계산하기가 쉽지 않아서 활용 난이도가 무척 어렵다고 들었다.
“흠... 나도 한 번 해볼까?”
조깅을 시작하기 전.
영우는 스트레칭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항상 지슈카와 함께였는데, 지금 지슈카는 스트레칭 대신 태극권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영우도 기왕이면 같은 걸 하고 싶었다.
지슈카가 씨익 웃었다.
“내가 그럴 줄 알고 준비해왔지.”
지슈카의 손목시계에서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태극권 영상.
무려 하오가 직접 찍어서 보내준 영상이다.
중국 명문 무가의 후계자인 하오는 태극권의 극치를 구사했다.
모든 동작마다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이해를 도왔다.
이 영상의 가치를 굳이 돈으로 환산하면 수십억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교본이었다.
하지만 영우의 표정은 영 찝찝했다.
“하오랑 따로 연락해?”
“응? 그거야 당연하지. 친구니까.”
영우가 없는 곳에서 템빨단과 하오의 공동전선은 수차례 반복되어 왔다. 벗이 되지 않으면 도리어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영우의 반응은 영 떨떠름했다.
“친구...? 친구...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다고?”
친구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되뇌던 영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본인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눈치였지만, 경직 된 눈매가 그의 불쾌한 심정을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었다.
만약 지슈카가 평범한 여성이었다면 엄청난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자기는 현실에 애인이 둘이고 게임 속 부인이 셋인 주제에 내 친구 사이를 의심하는 거냐며.
하지만 지슈카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헤벌쭉 풀어진 얼굴로 홍조를 띄우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친구 맞는데에... 흐응, 남자랑은, 연락하지 말까?”
“응.”
“그, 그러지, 뭐.”
지슈카는 의외로 구속 받는 걸 좋아했다.
***
“뭐? 그리드가 무림인?”
“응! 완전 그렇다니까!”
지옥.
동료들에게 아침에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하는 지슈카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내용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그리드가 태극권 영상을 단 두 번만 보고 완벽하게 마스터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현실에서 말이다.
하오가 만든 영상에 싱크로율 100퍼센트라는 평가가 떠오른 순간 지슈카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만약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다른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으리라.
물론 Satisfy에서의 경험이 현실에도 반영된다는 사실이야 진즉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리드처럼 사람이 완전히 천재가 되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과장이 좀... 많이 지나친 거 아니냐?”
“과장 아니야.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거라고.”
“그럼 사실은 그리드가 따로 태극권을 익히고 있던 거겠지. 걔 운동에 워낙 관심이 많잖아.”
“그, 그런가...?”
확실히, 그 편이 현실적이긴 했다.
그리드야말로 워낙 집중력을 요하는 일을 많이 했으니 진즉 태극권을 배웠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치고 처음 따라했을 땐 싱크로율이 53퍼센트밖에 안 나왔는데.’
일부러 장난 친 건가...?
‘장난꾸러기. 귀여워.’
갑자기 실실 웃는 지슈카를 동료들이 외면했다.
지평선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새로운 마물 떼가 다가오는 것이다.
***
‘하오가 대단하긴 하구나.’
영상을 시청하며 태극권을 배우는 내내 실감했다.
느릿하게 구현되는 동작에 이어지는 몇 마디의 설명들이 몹시 친절했다. 개나 원숭이 따위를 교육시키는 심정으로 임하는 듯했다.
배우는 것에 영 소질이 없는 그리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쉽게 풀어지는 동작에 이해까지 보태지니 1시간이 채 안 돼서 마스터할 수 있었다.
스륵.
그리드의 왼손이 너울거렸다.
불시에 기습을 가해온 몬스터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동작이었다.
날쌘 공격을 부드럽게 낚아채고, 흘려보냈다.
현실의 기술을 Satisfy에서 구현해낸 것이다.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프로 복서들은 Satisfy에서도 복싱을 구사한다.
하오는 수십 종류의 무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당연히 어떤 유의미한 효과를 내진 못했다. ‘스킬’ 판정을 받지 못하므로 좀 복잡한 경로를 지닌 평타에 그쳤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워낙 초월적인 스탯이 있었다.
최대치의 힘과 속도로 구사하는 기술은 그 자체로 스킬에 가까운 위력을 발휘했다.
‘나보다 약한 상대들을 제압할 땐 꽤 쓸모가 있겠어.’
어지간해선 스킬이나 마나 등의 자원을 소모할 필요가 사라졌다.
물론 큰 발전이라고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드가 상대하는 적들의 수준이 워낙 높아서다.
그들에겐 이런 꼼수가 먹히지 않는다.
실전에선 사실상 무의미한 셈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희망을 품었다.
아침에 태극권을 마스터하고 느꼈던 감동이 여전히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걸 갓 핸드에 응용하자.’
갓 핸드의 단점은 명확하다.
느렸다.
절대자는커녕 초월자에게도 제대로 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백날 검을 휘둘러봐야 쉽게 닿질 않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갓 핸드의 가치를 깎아내릴 순 없었다.
당장 갓 핸드는 인공 감각의 뼈대가 되어주고 있다.
갓 핸드가 펼치는 은사가 그리드에게 위험을 경고해주는 덕분에 그리드는 절대자와 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충분히 만족해왔다.
하지만 이젠 만족해선 안 됐다.
금의 성역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선 갓 핸드를 대량으로 만들 필요가 있어서다.
인공 감각을 펼치고도 수량이 남을 갓 핸드들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마침 오늘 태극권을 배운 것이다.
‘느림의 미학. 갓 핸드의 움직임에 태극권의 원리를 대입하면 반드시 큰 효과를 볼 거다.’
사실 태극권은 정(精), 기(氣), 신(神)을 수련하는 내가권법이다.
현대 사회에선 오장육부를 단련하는 건강 체조쯤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Satisfy는 현실과 달랐다.
이곳에선 방금 그리드가 보여준 것처럼 태극권을 진짜 무술로 활용할 수 있었다. 스탯이 실현시켜줬다.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압한다는 태극권의 이론을 극대화시킬 수 있단 뜻이다.
‘자.’
오래간만에 사냥터를 찾아온 그리드가 눈을 감고 집중했다.
우선 한 개의 갓 핸드를 직접 컨트롤했다.
재촉하지 않고 느리게 움직였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 인위적인 흐름들을 제압하게끔 유도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힌다.
갓 핸드란, 기본적으로 의념으로 움직이는 무기다.
손을 대지 않고 의식만으로 컨트롤해야한단 말이다.
벌써 10년 넘게 사용해온지라 컨트롤이 제법 숙달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물며 느리게 움직이는 건 더욱 더 힘들었다.
단순히 ‘뭘 해라.’가 아니라 태극권의 동작을 세세하게 지시하고 속도까지 조절하는 게 쉬울 리 있겠는가.
“배고파.”
곁에서 호법을 서던 랜디의 스태미나가 고갈 됐을 무렵에서야.
“허억... 허억...”
그리드는 간신히 한 개의 갓 핸드를 뜻대로 움직이는 게 가능해졌다.
마침 덩치 큰 몬스터 한 마리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필드 보스였다.
랜디를 제지한 그리드가 갓 핸드를 컨트롤했다.
자신보다 빠르고 강력한 보스의 앞발 휘두르기를, 갓 핸드가 부드럽게 제압했다. 손목을 낚아채 꺾어서 보스의 돌진이 멈추게 만들었다.
“죽이네.”
그리드가 흡족해서 웃었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긴 일렀다.
이제 고작 한 개의 갓 핸드만 컨트롤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수십 개, 수백 개의 갓 핸드를 동시에 컨트롤하려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노력해야할지 감이 안 잡혔다.
‘...내가 초능력자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수십 개는 무리지.’
한 10개 정도만 동시에 컨트롤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남들이 보기엔 10개도 초능력 같겠지만.
아무튼 목표를 조금 낮춘 그리드가 이번엔 2개의 갓 핸드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실패한 까닭에 보스의 접근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
크르...?
현재 그리드는 4개의 드래곤 아머를 무장하고 있다.
세트 효과를 포함하면 피격 시 절대 방어 확률이 무려 80퍼센트였다.
적의 공격을 대부분 무효화시킨단 의미다.
때리는 쪽이 도리어 지쳤다.
며칠 후.
그리드는 총 4개의 갓 핸드를 컨트롤하게 됐다.
느릿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갓 핸드들이 그리드에게 닥쳐오는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흘리는 광경이 압권이었다.
“대단하다냥.”
“다섯 개부턴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네... 음?”
감탄하는 노에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던 그리드가 표정을 굳혔다.
[제32위 대악마 ‘로제’가 지상에 출현하였습니다.]
로제.
그리드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다.
야탄의 종 출신으로 워낙 많은 악행을 저질러서 한때 그리드는 그녀를 증오했었다.
하지만 이젠 증오는커녕 혐오조차 안 했다.
오히려 조금 동정하고 있었다.
대악마가 된 여파로 아이템 거래 불가, 상점 이용 불가, NPC와 호감도 쌓기 불가, 귓속말과 서신 교환 불가 등의 페널티를 얻었다는 정황이 포착 된 까닭이다.
그나마 큰 힘을 얻었으니 승승장구했다면 또 모를까, 요즘 세상에 30위대 대악마는... 허접 취급 받는다. 하이랭커들의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템빨단을 만날 때마다 패배를 반복했으니 게임 안 접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무슨 배짱으로 지상에 기어 올라온 거지?’
월드 메시지가 뜬 거로 보아 다수의 플레이어에게 목격 된 눈치다.
인파가 많은 곳에 나타난 그녀가 또 어떤 사고를 칠지, 아주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리드가 귀환 주문서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제32위 대악마가 선언합니다.]
[“일만 마치고 금방 돌아갈게요. 죄송죄송...”]
“...”
***
대악마가 되고 최초로 단독 강림 이벤트를 얻게 된 로제.
그녀는 이번 임무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연히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종이와 펜을 구해오면 될 뿐인 임무.
내용이야 하찮았지만 어쨌든 히든 퀘스트 아닌가.
보상이 의외로 좋을 거라고 기대했다.
무려 아모락트가 준 임무다.
어쩌면 태초의 3악과 관련 된 히든 피스를 얻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반드시 성공할 각오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최대한 레벨을 올린 후 드디어 지상에 강림했다.
그제야 알게 됐다.
자신의 출현이 월드 메시지로 떠오른단 사실을.
[지상의 하찮은 존재들에게 선언하십시오.]
심지어 뭘 선언하라고?
‘이런 미친.’
로제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고작 종이랑 펜을 구하면 전부인 퀘스트를 실패하고 싶진 않았다.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민폐 끼치지 않고 금방 돌아가겠다.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하다.
“무슨 속셈이지?”
...별 소용없었다.
하필 떨어진 장소부터 나빴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플레이어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랭커들이 애용하는 최상위 사냥터였다.
따가운 시선에 몸서리친 로제가 슬그머니 뒷걸음쳤다.
‘종이! 종이하고 펜만 구하면 돼! 여기서 시간 끌 게 아니라 어디 작은 마을 하나만 약탈하면 되는 거야!’
과연 악인다웠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로제는 몹시 자연스럽게 악행을 계획했다.
랭커들을 공격하는 손속에도 자비가 없었다. 마구 불꽃을 뿜어대며 추격을 따돌렸다.
그녀는 최대한 변방으로 이동했다.
도시들은 조용히 지나치고 인적이 드문 마을을 수색했다.
그 끝에 도착한 마을에서.
“...어?”
녹발의 사내를 보았다.
아그너스.
바알에게 망가진 장난감 취급 받고 버려진 퇴물.
당연히 게임을 접었을 줄 알았는데, 왜 이런 촌구석에서 아낙들과 함께 빨래를 하고 있단 말인가?
“뭘 꼬라 봐? 뒤지고 싶냐?”
물 묻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묻는 아그너스의 왼손엔 나무 몽둥이가 들려있었다.
방금 전까지 빨래를 때리던 몽둥이다.
대악마에겐 위협이 안 돼야 정상이었다.
한데 로제는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저 몽둥이가 자신의 피로 범벅 된 모습을 상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그너스는 바알의 계약자이기 전에 최강의 네크로맨서였다.
룬과 칠악성의 힘을 함께 소유한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퇴물이 됐어도 쉽게 감당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물론 내가 지진 않겠지만.’
마음을 진정시킨 로제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바, 반가워요.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기쁘네요? 그, 나누고 싶은 이야기야 많지만, 지금은 제가 좀 바빠서. 일단 급한 일부터 끝내고 나중에 다시 인사드리러 찾아올게요.”
“쓰레기가.”
“...네?”
로제가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원망을 받아왔지만, 면전에서 다짜고짜 욕설을 들어본 경험은 드물었다. 황당해서 잠시 말문이 닫혔다.
아그너스의 차가운 금색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뒤져.”
지옥, 바알, 악마, 그리고 후회...
오물 같은 기억들이 아그너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그가 집어던진 뼈창은 로제의 복부를 관통했다.
단순한 착시였다.
실제 뼈창은 로제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쳐 그녀의 그림자에 꽂혔다.
키에엑!!
비명을 토해낸 로제의 그림자가 크게 출렁거렸다. 찰흙처럼 꿈틀거리더니 점차 형상을 갖춰나갔다.
당황한 로제가 뒤를 돌아보자 바알의 사역마가 그곳에 있었다.
“뭣, 무슨...!”
설마 바알도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거였어?
나, 스카웃 제의 받는 거야?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큰 기쁨을 느끼는 로제였다...
급기야 환호하는 그녀에게 닥치라고 말한 아그너스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뼈로 만든 검이 날아와 잡힌다.
자신의 늑골을 벼려 만든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