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50화 (1,538/1,794)

템빨 77권 - 10화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너희는 나의 강림을 열망하여라.”

아이들아, 그것으로 충분하다.

천장을 올려본 채 중얼중얼.

아모락트는 태연하게 혼잣말을 지껄여댔다.

면사에 가려진 탓에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미친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란 사실을 유추하는 건 몹시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로제는 개의치 않고 감격했다.

그녀는 지난 몇 달 동안 지독한 불안감에 시달려왔다.

지옥 엘리베이터라는 괴상한 기계를 타고 지옥을 침략하는 인간들의 숫자가 나날이 늘어나서?

그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지옥을 배회하는 어중이떠중이는 대악마 로제를 살찌우는 식량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주력 원정대였다.

템빨단의 간판 랭커 다수와 이종족 왕들이 포함 된 최정예 파티.

놈들은 바알이 보내는 마물 떼를 영양분마냥 섭취하고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좌시했다간 필시 사달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로제는 감히 나설 깜냥이 안 됐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바알과 여전히 유라를 탐내며 섣불리 나서지 않는 아모락트를 욕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개XX들, XX년놈들, 부모 망신시키는 버러지들 등등.

로제의 욕설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가운데.

바로 오늘.

아모락트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템빨신을 만나봐야겠다고 했다.

바알 저놈이 아무래도 수상하니 협력을 제안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지옥 원정대의 성장을 경계하기보단 바알이 하는 짓을 좌시하기 싫은 눈치였다.

아무래도 좋았다.

뇌세포가 없는 게 아닐까 싶은 다른 대악마들과 달리 협상이라는 카드를 떠올린 그녀가, 로제는 그저 대견할 따름이었다.

태초의 3악은 뭐가 달라도 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캄캄한 천장을 올려본 채 혼잣말하는 모양새가 영 괴이하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들 앞에서 연설하기 전에 연습하는 거겠지. 계획 따위 모르는 대악마들하곤 다르게 철두철미하네. 과연 태초의 3악이야.’

아모락트의 권한은 다른 한 자릿수 대악마와 비교가 안 된다.

그녀는 몹시 자유롭다.

무저갱 따위를 이용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직접, 혹은 분신을 지상에 강림시킬 수 있었다.

물론 페널티를 피할 순 없겠지만 괜찮다.

아모락트는 그리드나 템빨단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또한 연습하는 연설의 내용을 봤을 때, 인간들의 지지를 얻는 방식으로 페널티를 완화하는 조화를 부릴 수도 있는 듯했다.

“과연 주군이시다. 주군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라.”

“...?”

로제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아모락트에게 충성하는 대악마 유칼이 수정구를 바라보며 킬킬 웃고 있었다.

놀랍게도 지상의 상황을 중계해주는 수정구였다.

세상에, 차원 단위를 뛰어넘는 중계방송 도구라니?

“이런 게 있었어?”

“바보 같은 질문이군. 하기야 너는 인간 출신인 촌놈이라 잘 모르겠구나. 이 수정구엔 아모락트 님의 사역마와 시야를 공유하는 주술이 걸려있다.”

물론 아모락트는 이 수정구의 도움 없이도 사역마와 시선을 공유할 수 있고, 지상에서 활동하는 아모락트의 사역마는 무려 일천이 넘으며, 사역마를 심을 수만 있다면 천상까지 엿볼 수 있다는 둥, 잘난 척 지껄이는 유칼을 로제는 무시했다.

정확히 말하면 유칼의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본 채 혼잣말하는 줄 알았던 아모락트가 실은 인간들을 향해 연설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경이를 느낄 뿐이다.

‘저건 거의 신이잖아?’

차원을 초월하는 영향력.

태초의 3악의 저력은 실로 놀라웠다.

기대하고 상상해온 것 이상이었다.

곧 닥쳐올 일들도 상상을 뛰어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모락트의 연설을 듣고 감격한 야탄교인들과 일부 인간들이 그녀의 강림을 열망하고, 그들의 열망을 양분 삼은 아모락트가 지상에서 위용을 떨치고, 그녀를 좌시하지 못하게 된 그리드가 협상 테이블에 앉고...

어쩌면 지옥과 템빨제국의 연합이 탄생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모락트가 바알을 경계하듯 그리드 또한 바알을 두려워하고 있을 테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연히 한 배를 타겠지.

로제의 기대감이 점차 부풀어 오르는 그때였다.

“뭣...?”

급기야 흥얼거리듯 떠들던 아모락트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로제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

대악마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땐 대개 그리드가 엮였더랬지.

그리고 그리드와 엮인 대악마는 대부분 죽었다.

영혼조차 못 남기고 소멸해버린 놈이 한둘이 아니었다.

‘설마... 아니겠지?’

태초의 3악이 그리드에게 낭패를 겪는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리드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지금 아모락트는 지옥에 있었다.

하물며 본체였다.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와중에 그리드가 아모락트에게 해를 입힌다는 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근데...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꿀꺽, 로제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궁전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혜안의 위력은 소문 이상이군... 템빨신 곁에 괴물이 있었구나.”

아모락트가 입을 열었다.

신음처럼 토하는 호흡이 그녀의 얼굴을 덮은 면사를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아...

로제가 저도 모르게 탄식하는 사이, 꼬리를 휘둘러 면사를 고정시킨 아모락트가 말을 이었다.

“전설을 이루는 아이야 아주 많다. 신이 되는 아이 또한 적지 않아. 하지만 그들 중 궁극과 절대를 논하는 아이는 채 한 줌조차 안 되었다. 몇 번의 세계를 돌이켜보아도 인간 출신의 절대자는 하나밖에 없었지.”

한데 그리드는 절대지경에 발을 들이기 직전이었다.

아모락트가 실제로 그 무위를 체험해보진 못했지만, 템빨계가 탄생한 마당이다.

아모락트의 지상 강림을 신중하게 고민하게 만든 지상의 신계.

그것을 목도하고도 그리드를 저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찌 일개 인간의 몸으로, 그런...?

신이 되고 수백 년쯤 지났다면 그나마 납득이라도 됐을 텐데, 그리드는 신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어찌 그토록 거침없이 성장했단 말인가?

영영 해소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의문이 오늘, 지금 이 순간에야 비로소 해소됐다.

혜안.

신들이 언급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그 불합리한 눈을 마주하고서 깨달았다.

그리드가 신이 되고 지금까지 순식간에 성장한 비결은 바로 혜안의 힘을 빌려온 덕분이리라.

‘사도의 힘이 곧 신의 힘이지. 제대로 꼼수를 부렸어.’

아주 영악하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자칫 도발해선 안 되겠구나.”

솔직히 말해서, 템빨신과 만나고 싶으면 분신이나 사역마를 보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방문하기에 앞서서 굳이 장황연설을 늘어놓고, 자신이 직접 방문할 채비를 갖춘 이유는, 템빨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나름의 수고였다.

내가 곧 가겠다고 미리 공지를 해놔야 그나마 덜 거부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또한 분신이나 사역마를 보내는 것보단 직접 방문하는 편이 내 힘을 어느 정도 실감시킬 수 있을 테니 협상에 좋을 거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정도론 부족했다.

혜안을 쓰는 괴물을 곁에 둔 채, 상시 혜안을 빌려 써왔을 템빨신의 콧대는 예상보다 높을 것이 분명했다.

지상에 강림하려면 템빨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형태여야 좋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굳이 사람들의 염원을 이용하려다가 템빨신의 불쾌감을 사는 건 악수였다.

애초에 아모락트는 지상의 인간들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이 전혀 없다.

어떤 호의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메르세데스에게 광란의 저주를 건 것도 결코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그 미친 괴물이 이쪽을 제멋대로 들여다보고 제멋대로 저주에 걸렸을 뿐이다.

“음... 종이와 펜을 준비해라.”

“종이와 펜은 왜...?”

“템빨신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해야겠어. 깊이 의논할 일이 있는데 방문을 허락해 줄 수 없겠느냐고.”

“네...?”

“인간 출신이라 청력이 미개한 거냐?”

재차 반문하는 로제에게 유칼이 핀잔을 주었다. 옆구리를 찔러대며 어서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물론 로제의 청력은 건강했다.

그녀가 반문한 이유는 아모락트의 말을 잘못 들어서가 아니라 믿을 수 없어서였다.

서열 제2위의 대악마가, 무려 태초의 3악 중 하나가.

일개 플레이어에게 방문을 허락해 달랍시고 편지를 보내겠다고...?

그리드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이야 로제가 가장 잘 알았지만, 이건 뭐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된 것 같았다.

‘그리드를 고평가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악마가 뭐 이렇게 신사적인데?’

미친 거 아니야?

어이 없어서 혀를 내두르면서도, 로제는 충실히 명을 수행했다.

펜과 종이를 찾기 위해 성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악마와 마물들이 머무는 성에 필기도구 따위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종이랑 펜... 없는데요?? 중립 지역에 가서 구해 올까요?”

“품격이 떨어진다. 마족들이 쓰는 종이의 질은 형편없을 테니까.”

“그럼요? 아, 지상에 사역마가 많다면서요? 사역마를 보내서 뜻을 전하시죠?”

“그건 예의가 아니다. 템빨신의 위계를 감안하면 엄청 큰 실례를 범하는 셈이지.”

아니, 그게 대악마가 할 말이냐고.

여전히 적응을 못한 로제가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로제, 이렇게 된 이상 네가 지상에 다녀오도록 해라. 네 출현 정도야 템빨신이 딱히 신경 쓰지 않겠지.”

“네...? 저, 저보고 직접 템빨신을 만나 아모락트님의 뜻을 전하고 오라고요?”

로제가 질색했다.

안 그래도 야탄의 종 출신인 로제는 인간 사회에 적이 많다.

하물며 대악마가 된 이후엔 거의 모든 플레이어가 그녀를 증오했다.

거의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취급이랄까.

심지어 템빨단의 척살 대상이기도 했었다.

즉, 로제에겐 사신 역할이 부적합하단 의미다.

아마 라인하르트를 방문하는 즉시.

아니, 라인하르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객사하지 않을까...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다. 네 수준으로는 템빨계의 신성을 감당하지도 못할 테고.”

현기증을 느끼는 로제의 시야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종이와 펜>

★히든 퀘스트★

제2위 대악마 아모락트님께서 처음으로 당신에게 단독 임무를 내리셨습니다.

지상에서 종이와 펜을 구해오세요. 종이와 펜의 질이 좋을수록 보상이 커집니다.

퀘스트 보상:결과에 따라 다름

[축하합니다. 대악마가 된 이후 최초로 단독 강림 이벤트를 획득하셨습니다.]

[당신의 출현이 세상에 널리, 강렬하게 전파 될 것입니다.]

“...XX.”

로제의 욕설 실력은 나날이 발전 중이었다.

***

“끝이야? 진짜로?”

“네...”

지옥에서 시선을 거둔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투명한 눈동자에 번졌던 빛이 갈무리되며 유리 파편처럼 튀었다. 푸른 머리카락 주변에 잠시 눈꽃처럼 흩날렸다가 사라져갔다.

이제 남은 건 봄바람을 타고 흐르는 꽃잎들뿐이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붙은 꽃잎을 떼어준 그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다소 허무한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역시 안도감이 훨씬 더 컸다.

여태껏 그리드는 정말로 많은 절대자를 만나보았다.

하야테, 마리로즈, 리파엘, 가브리엘, 제라툴, 도미니언, 치우와 드래곤들...

그들 중 그리드를 전율시키지 못한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나 같이 실로 대단했단 의미인데, 방금 전 아모락트의 음성에 깃든 힘은 그중에서도 유독 특별하게 다가왔다.

극한의 불길함.

절망감마저 싹트게 만들었다.

고작 음성 따위에 깃든 힘이 그랬다.

이 따스한 세상에 불쑥 밤과 겨울이 찾아오게 만들었을 정도다.

이대로 아모락트가 강림하게 둬선 안 된단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한데 메르세데스와 눈 몇 번 마주쳤다고 물러나다니...

‘혜안이 사기긴 사기다.’

혜안에 의존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던 비반의 가르침이 새삼 절실히 와닿았다.

루비의 신성과 메르세데스의 혜안.

천상의 신들이 혐오하고 지옥의 악마들이 두려워하는 그 힘들의 근원은 대체 뭘까.

의문을 품던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메르세데스의 몸이 부르르 떨렸기 때문이다.

고개를 푹 숙인 채였는데, 눈보다 흰 목덜미와 귓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완전히 진이 빠진 듯했다.

아모락트가 만만치 않았다는 반증이리라.

“몸이 안 좋구나. 어서 의원을...”

“아, 아뇨, 괜찮습니다! 쉬, 쉬고 오면! 괜찮아요!!”

“...괜찮은 것 같긴 하네.”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메르세데스는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평소와 비교해도 오히려 컨디션이 좋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