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7권 - 8화
헥세타이아가 만든 창을 봤을 때.
그리드는 자신과 헥세타이아의 실력 차이를 재차 실감했다.
딱히 불만은 없었고 당연하게 납득했다.
헥세타이아는 대장장이의 신이다.
능력치와 권능이 아이템 제작에 몰빵 된 그를 상대로 대장기술을 비비겠다는 건 몰염치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자신이 무조건 불리하다곤 생각 안 했다.
헥세타이아의 소검이나 창의 재질은 디바인 스톤이다.
헥세타이아가 창조한 고유 물질.
그것은 필시 대단한 금속이었지만, 드래곤의 비늘이나 뼈와 비교해서 우위라고 볼 순 없다.
오늘 제논의 비늘을 보고 확신했다.
<제논의 심장부 비늘>
등급:신화
회색룡 제논의 비늘 중 최우선 순위로 재생되는 비늘입니다.
드래곤 하트가 자리한 오른쪽 가슴을 감싸므로 가장 두껍고 단단합니다.
‘여태껏 다뤄봤던 비늘하곤 확실히 급이 달라.’
그리드가 크란벨과 싸웠을 당시.
드래곤 하트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했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감탄을 거듭하며 비늘을 살피는 그리드의 마음에 조금씩 자신감이 싹텄다.
‘언젠간 헥세타이아의 작품을 넘어서는 드래곤 웨폰을 만들자.’
가능성은 충분했다.
제논은 하위룡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제논의 비늘을 이용해서 상위룡 이프리트와 크란벨의 신체 일부를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언젠가 중위룡, 상위룡의 비늘을 쓰면 좀 더 완벽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고 고룡의 신체를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고룡은... 김칫국 마시는 거긴 해. 일단 투구부터 잘 만들자.’
기왕 좋은 비늘을 얻은 김에 크란벨의 머리를 재현해 볼 생각이다.
투구는 방어구 중에서도 방어력이 높은 편이고 급소 방어에 특화 된 중요 부위이므로 투자 가치가 높았다.
탈수와 이별하는 점에 대해선 조금의 아쉬움도 없었다.
사신수의 숨결로 만든 방어구들도 하나둘씩 교체하는 마당에 새삼 탈수에게 미련이 남겠는가.
탈수... 그러니까 탈리마의 수치가 여전히 싸가지가 없는 편이라서 싫은 게 아니다.
툴툴대면서도 말은 잘 듣게 된지 오래니까.
다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쓸모가 없어졌다.
아이템을 지배함에 있어서 굳이 탈수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탈수의 포지션은 시끄러운 방어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그리드에 한해서다.
탈리마의 수치는 대상을 무장 해제 시키는 <왕의 부정>, 에고 아이템을 지배하는 <왕의 명령> 스킬 외에도 <왕의 지배>라는 고유 스킬을 지녔다.
<왕의 지배>
착용자의 정신을 지배해 육체를 빼앗습니다.
왕의 지배가 유지되는 동안 착용자의 공격력과 모든 속도가 20퍼센트 상승하고 치명타 면역과 약점 공격 면역 상태가 됩니다. 단, 지배가 끝난 후 착용자는 반드시 사망합니다.
스킬 자원 소모:없음
스킬 지속 시간:착용자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24시간
착용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스킬.
탈수의 착용 조건이 ‘없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정말 노골적이고 악랄한 저주다.
정신 지배 계열 스킬인 탓에 그리드는 당연히 면역했지만, 그리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탈수를 착용하는 순간 죽음을 피할 길이 없을 터였다.
‘상황에 따라서 써먹을 때가 생기겠지.’
기사의 면갑에 산양의 뿔이 솟은 형태.
탈수의 외향은 꽤 멋진 편에 속했다.
라우엘이 눈을 반짝이며 꼭 한 번 써보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그쪽(?)계열 취향을 저격하는 디자인이다.
대상을 잘만 저격하면 쉽게 씌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휴우...
폐기처분을 면한 탈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능이 워낙 높은 탓에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길 싫어했고, 착용자를 저주하고 죽이길 반복한 끝에 만마전에 봉인 됐던 괴물.
탈수는 한낱 도구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해왔으나 이젠 달랐다. 자신에게 쥐어진 삶을 영위하길 희망했다.
어두컴컴한 만마전에서 벗어나 그리드와 함께 모험하면서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그랬냐.”
탈수의 방어력은 최소 1에서 최대 2,750이다.
자기 기분에 따라서 방어력을 조절해대는데, 본성이 사악해서 그런지 좋은 꼴을 보여준 적이 드물다. 특히 난전에서 방어력을 1로 만들어 그리드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게... 난 잘하려고 노력했는데...
뭔가 핑계를 대려다가 입을 닫는 탈수에게 그리드는 더 이상 핀잔을 주지 않았다.
탈수의 비협조적인 성격은 앞서 말했듯이 본성의 문제였다.
그리드에게 힘으로 굴복하고 마음으로 감명을 받았을지언정 본질적으로 선하지가 않다. 충성심을 기대해선 안 됐다.
이야루그트와 닮은 것이다.
‘크란벨의 머리.’
그리드가 두 눈을 감고 집중했다.
드래곤의 두상엔 뿔이 있다.
힘, 권위, 생명, 영원 등의 뜻을 지닌 몹시 강력한 상징이다.
만약 그리드가 이프리트를 만나지 못한 세계선이 존재한다면.
그 세계선의 그리드는 감히 드래곤의 뿔을 만들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의 그리드는 운 좋게 이프리트를 만나 그녀의 뿔을 만들어보았다.
이프리트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었다.
그때의 경험을 살린 그리드는 크란벨의 뿔의 형태를 참고한 신검까지 만들어냈다.
양쪽 관자놀이 부근에 2개의 뿔이 솟아있던 크란벨의 머리를 제대로 재현해낼 자신이 있었다.
물론 그대로 재현해선 안 됐다.
드래곤의 주둥이가 과장되게 튀어나와 있는 탓이다.
착용하기 적절하게끔 형태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굳이 크란벨의 머리를 만들 계획을 짠 이유이기도 했다.
이프리트의 외뿔은 크란벨의 뿔에 비해서 너무 컸다. 더 많이 축소시켜야하는 까닭에 가치가 떨어질 확률이 높았다.
‘평소보다 더 최선을 다해야 돼.’
어폐가 있는 말이긴 했다.
그리드는 늘 최선을 다해왔으니까.
평소보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딱히 불가능을 의식하지 않았다.
가능하든 말든.
항상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잘하도록 노력해왔다.
설령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더라도 똑같은 태도를 견지했다.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비결이고, 기본이다.
‘투구는 다른 부위의 방어구와 비교해서 특별하다.’
드래곤의 머리엔 뿔이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입이 존재한다.
실제 드래곤이 브레스를 방출하고 용언을 구사하는 기관 말이다.
용언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용언은 드래곤 중에서도 언약의 이행을 몇 번이나 완수한 드래곤이 완벽하게 구사하는 권능이므로 단순히 템빨로 구현하는 게 말이 안 됐다.
하지만 브레스는 기대해 볼만 했다.
그리드가 앞서 만들었던 건틀릿 즉, <이프리트의 팔>만 해도 드래곤 하트의 기능 패턴을 토대로 약소 브레스를 구현하지 않았나.
크란벨의 머리쯤 되면 조금 더 강력한 브레스가 스킬로 귀속될 지도 몰랐다.
뿔이 갖는 상징적 의미들을 토대로 생존력이 크게 발달할 것은 기정사실이고.
“제발, 신이시여.”
“네?”
“누구를 부르시는 건지...”
“...”
제논에게 비늘을 받고 돌아온 이후.
<아이템 창조>를 토대로 크란벨의 머리를 설계하기에 앞서 습관처럼 기도를 올리던 그리드가 입을 닫았다.
그의 주변엔 가리온과 드비리온, 라스가 있었다.
다짜고짜 신을 찾는 그리드의 모습에 하나 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런 태도들이 그리드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인간미들이 없긴 해.’
조금... 정서가 다르다.
대장간을 괜히 신전으로 옮겼나?
후회하다가도 그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제작과 강화엔 장소와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다.
MMORPG 탄생 초기부터 전해져 내려온 선인들의 유서 깊은 지혜였다.
한낱 미신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통계가 존재했다.
관상학과 닮았다고 봐야 옳다.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이곳 템빨계에서 아이템을 제작하고 강화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은 건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아마도.
‘시작하자.’
심호흡하고 마음을 추스른 그리드가 제작을 시작했다.
쉬지 않고 풀무질하는 발짓이 기계처럼 정교하여 실수가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속 불길은 그리드의 뜻대로 움직여 마치 그리드의 의지가 형상화 된 것처럼 보였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구나.’
삼일 밤낮으로 드래곤의 비늘을 제련하는 그리드의 모습에 신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신은 인간과 비교해서 전능하다.
대부분의 일, 특히 자신의 분야에서 원하는 바를 뜻하는 대로 이룰 수 있었다.
땅을 즉시 수복하는 가리온의 권능이 대표적인 예시다.
극한의 집중력을 유지한 채 어떤 작업에 열중한다는 건 신에게 몹시 낯선 일인 것이다. 굳이 불필요한 고행이었다.
한데 이 순간 그리드는 고행을 짊어지고 있었다.
극기.
저런 독한 면이 있기에 세월을 무색하게 했구나.
신들이 깨닫는 사이 며칠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고,
[<목단룡 크란벨의 머리>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리드의 아이템 제작이 끝났다.
제논의 비늘을 수백 개로 쪼개서 연결하고 별도로 만든 2개의 뿔을 결합시킨 투구.
포효하는 순간에 목이 베인 드래곤의 머리 같은 모양새다.
위아래로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착용자의 얼굴이 위치하는 구조였다.
다만 아가리의 하단부가 좌우로 갈라져 착용자의 목을 감쌌기 때문에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고 투구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
다소 야성적이었는데 그리드와 무척 잘 어울렸다.
날 선 듯이 날카로운 그리드의 눈매와 날것 그대로의 느낌인 투구가 멋진 조화를 이뤘다.
사나운 기세로 천하를 호령하는 대군주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갖고 싶다.’
드비리온이 자신도 모르게 열망을 품었다.
저걸 쓰고 숲에 사냥을 나가면 어깨가 절로 으쓱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물욕이었다.
드비리온이 자신의 욕망에 당황하는 그때 그리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자 투구를 구성하는 비늘 중 일부가 작동하며 위치를 바꿨다.
좌우로 솟았던 두 개의 뿔이 역방향으로 회전해서 목을 두텁게 감쌌고, 차양의 역할을 하던 아가리 상단부가 내려앉아 그리드의 두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감싸는 면갑으로 변모했다.
야성적인 느낌이 사라지고 단단하면서도 고귀한 느낌을 준다.
두꺼운 목도리를 두른 겨울철의 기사를 연상시켰다.
‘따로 도색을 해야 다른 방어구들과도 잘 매치가 되겠어.’
투구야 안 보이게 설정할 수 있다.
특히 그리드는 왕관과 투구를 중복 착용 가능하기 때문에 평소 왕관이 보이게끔 설정해 놨다.
하지만 앞으론 투구가 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다.
투구에 붙은 특수 옵션 때문이다.
★스킬 <다소 불완전한 브레스> 생성.
<다소 불완전한 브레스>Lv.1
즉시 마력을 방사해 경로 상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지력 40배에 해당하는 고정 데미지를 입힙니다.
사용자의 격이 높을수록 데미지가 추가 상승하며, 빠른 속도로 인해 절대 명중률 보정을 얻습니다.
적중과 동시에 대상의 마법 저항력 대폭 감소. 관통과 다단 히트 효과 발생.
스킬 마나 소모:50,0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25분
*이 스킬은 <약소 브레스>와 쿨타임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이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크란벨의 머리>의 면갑 모드가 해제되고 개방 됩니다.
*투구 이미지 숨김 설정 시엔 착용자 본인의 입을 직접 크게 벌려야 스킬이 전개 됩니다.
“...”
명색이 황제가, 신이, 한 길드의 수장이,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가, 입에서 불을 뿜겠답시고 사람들 앞에서 주둥이를 벌려댈 순 없는 것이다.
그리드에겐 최소한의 위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