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47화 (1,535/1,794)

템빨 77권 - 7화

드래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오만이다.

의복처럼 두른 <절대방어>로 죽음을 면역하고 단 한 번의 숨결로 도시를 초토화시키는 괴수이지 않나.

그들은 당연하게도 두려움을 모르며 콧대가 높았다.

자신 외의 존재를 전부 하찮게 여기기로 유명했다.

존중이라는 개념을 몰라 엮여봤자 흉할 뿐이라는 선조들의 조언이 대륙 각지에 역사로 남아있었다.

한데 반 년 전쯤부터 이변이 발생했다.

거대한 드래곤 한 마리가 주기적으로 레이단을 방문해서 선물을 주고 간다는 것이다.

드래곤이 호의를 베풀다니?

그리드에게 죄책감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풍문이 있었는데, 도무지 납득이 안 됐다.

애초에 드래곤이 왜 죄책감을 품는단 말인가?

도시를 부수고 사람들을 해쳐서?

그들 입장에선 개미를 짓밟은 것처럼 감흥 없는 일일 텐데 뭘 새삼스럽게?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도 레이단을 찾아갔다.

이번 드래곤 강림 이벤트에 그리드가 참석한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한데 도시에 입장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아득히 높기로 유명한 레이단의 성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긴 행렬이 있었다.

레이단을 찾아온 방문객들이 이룬 행렬이었다.

“입장료까지 받는다면서? 근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아?

민간에도 악명 높은 행정관 라빗이 입장료를 받겠다고 선포했다.

아무나 받아들였다간 치안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안 그래도 반발심을 느끼던 차에 길게 이어진 행렬을 보자 의욕이 꺾였다.

“굳이 도시에 들어갈 것 없이 바깥에서 구경하자.”

“그게 좋겠어. 그리드를 못 보는 건 아쉽지만 드래곤은 산처럼 크니까 멀리서도 잘 보이겠지.”

결국 몇몇 사람들이 대열에서 이탈했다.

캠핑이라도 온 마냥 텐트를 설치하고 논밭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내렸다.

쏴아아아아!!

폭우였다.

“여기 원래 사막 아니었냐?”

“구름이 너무 짙어. 이래서는 드래곤도 제대로 안 보일 거야.”

“제기랄, 어쩔 수 없지. 어서 도시에 들어가자.”

텐트를 걷은 사람들이 바삐 이동했다.

말 그대로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방문객은 그들로 끝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이동경로를 이용하지 않고 워프 게이트를 타고 넘어온 부르주아들도 굉장히 많았다.

레이단은 막말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붐볐다.

거대한 콩나물시루 같았다.

마침.

“...?”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

“고생하셨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관광객들을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어준 라빗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영주성 안.

라우엘이 초췌한 몰골로 앉아있었다.

전장과 도시 관리 등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풍수사로 전직했던 그는 자신의 직업에 새삼 큰 회의감을 품었다.

“사람들한테 푼돈이나 뺏겠다고 궁극기를 쓰는 대제국의 재상이라니... 이런 건 너무 하찮지 않습니까? 제가 이래 뵈도 도사 칭호까지 얻은 몸인데.”

“방문객의 숫자가 무려 120만 명이고 그들에게 7골드씩 걷었습니다. 고작 20만 골드가 없어서 레이단이 휘청거렸던 시절을 회상하시며 부디 견뎌주십시오.”

“어린이들의 방문 비율은 무척 적더라? 우리 라빗 장관님께선 거기까지 예상하셨던 건가?”

두 사내를 다소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라보던 가릿샤가 물었다.

레이단 영주의 질문이다.

라빗이 성심성의껏 설명했다.

“맞습니다. 어떤 겁 없는 부모가 자식의 손을 이끌고 드래곤을 구경 오겠습니까? 미취학 아동은 무료로 입장시켜주겠다고 선전했던 배경엔 나름의 계산이 깔려있던 거지요.”

호의 베푸는 척 광고를 하고 실제론 생색에 그친다.

장사의 기본이었다.

뿌듯하게 웃는 라빗의 표정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가릿샤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연전연승할 때 보였던 표정과 닮았다.

“으이구, 잘나셨어.”

핀잔을 준 가릿샤가 라우엘을 재촉했다.

“어서 나가자. 곧 그리드가 도착할 거야.”

잠시 후.

사람들이 상상해온 모습 그대로 거대하고 멋진 드래곤이 레이단에 강림했고 마침 열린 워프 게이트에서 그리드 일행이 출현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의 신경이 드래곤보다 그리드 일행에게 더 집중됐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미남미녀들이 화려한 복색으로 치장한데다 그리드의 신성이 워낙 황홀했다. 절로 시선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못 본 새 더 헌앙해지셨구려.]

그리드 일행과 드래곤을 번갈아 보며 감탄하던 사람들이 급기야 경악했다.

긴 목을 내려 그리드와 눈높이를 맞추는 드래곤의 태도가 무척 정중했기 때문이다.

말투부터 공손했다.

‘이런 미친?’

‘이 정도였다고?’

사람들은 그리드의 서사시와 템빨신교의 성전을 예의주시해왔다.

그리드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대강이나마 추측 가능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드래곤과 한창 엮였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알았다.

하지만 설마 드래곤에게 인사를 받는 위계에 올랐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드래곤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조차 경계하는 존재라지 않던가.

상상 초월.

백만 명의 인파가 할 말을 잃자 도시에 적막이 내려앉은 그때였다.

“저게... 고작 저까짓 게 드래곤일 리 없다!!”

누군가가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울부짖는 느낌에 가까웠다. 음성에 강력한 적의가 담겼다.

만인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 쓴 음침한 인상의 사내가 보였다.

누가 봐도 나 야탄교 출신 흑마법사요, 라고 말하는 생김새였다.

“저건...! 저놈은 그냥 살이 뒤룩뒤룩 찐 비룡이야!!”

야탄교는 삼신교와 마찬가지로 파벌이 크게 2개로 나뉜 상태다.

그리드가 밝혀낸 지옥의 진실을 믿고 템빨신교와 우호를 맺은 급진파, 진실 따위는 개의치 않고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는 온건파.

이들의 차이점은 야탄 신을 숭상하느냐, 악마를 숭상하느냐로 갈렸다.

급진파는 야탄 신 자체를 숭배하는 반면 온건파는 악마의 힘을 원했다.

온건파가 기존의 야탄교에 가까웠다.

그들은 여전히 인간을 납치해서 제물로 바치고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에 집착하고 있었다.

저놈은 후자다.

심지어 거물.

이곳에 별 탈 없이 잠입했음이 증거다.

‘야탄의 종. 오래간만에 보는군.’

그리드의 높은 통찰력이 흑마법사가 품은 불길한 마력을 읽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리드는 놈으로부터 금세 시선을 돌렸다.

길가의 돌멩이 취급하듯 관심을 거두는 모양새.

로브를 벗어던진 흑마법사가 살벌하게 소리쳤다.

“이 몸의 정체를 알면 무시할 수 없을 거다! 내가 바로 야탄의 두 번째 ㅈ...”

야탄의 두 번째 종 지제일.

그는 힘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천륜까지 어겨가며 사람들을 해치고 야탄의 종이 된 것이다.

당연히 드래곤에게 환상을 품었다.

어지간한 대악마 이상으로 경외하며 평생에 한 번쯤은 만나보길 소망해왔다.

한데 그 경외의 대상이 철천지원수인 그리드를 상전처럼 모시는 광경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주화입마에 빠져서 마력이 역류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곳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다.

공기만 축내는 잡것들.

하찮은 일상을 영위하길 바랄 뿐인 저놈들은, 존재 가치가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으나, 우리들 현자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놈들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냈다.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놈들의 피와 살을, 생명을 악마에게 바치고 완성하는 주술은 보통의 마법과 궤를 달리하는 강력한 마법으로 완성된다.

쓸모없는 것을 의미 있게 만드는 기적.

나는, 위대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

지제일의 사고가 멈췄다.

그리드에게 소리쳤던 순간부터 목숨을 버릴 각오를 마쳤던 광인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단위 주술을 완성하고 그리드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길 꿈 꿨으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드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거대하고 검은 그림자가 불쑥 다가왔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압력에 짓눌린 지제일의 머리가 뻥하고 터졌다.

“...”

“...”

어느새 지제일의 곁에 도달해 있던 메르세데스와 피아로가 출수를 거두고 등을 돌렸다.

분수처럼 폭발하는 핏물이 그들의 예복에 단 한 방울도 닿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메르세데스가 도도한 얼굴로 펼친 중력장이 휘몰아치는 핏물과 살점을 짓눌러 땅속으로 파묻어버렸다.

“...?”

정적만이 감돌았다.

다짜고짜 나타나서 소리치던 흑마법사에게 드래곤의 거대한 발톱이 천천히 다가간다 싶더니 흑마법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체다카 길드 출신이자 레이단의 현 영주인 가릿샤가 미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느리지 않았나?’

조금 전.

제논이 뻗은 발톱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자신뿐만 아닌 일백만 대중에게 아주 선명하게 인식됐다.

한데 정작 발톱의 표적이 됐던 흑마법사는 반응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발톱에 짓눌려 터지는 순간에야 의아하단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무슨 조화지? 그리드가 말했던 용언이란 것에 당한 건가?’

체다카 출신 템빨단원 중 일부는 사령관으로 성장해왔다.

일신의 무력보단 병법과 통솔력을 연마했다.

공교롭게도 가릿샤는 방금 전 제논의 한 수를 가늠할 능력이 없었다.

골똘히 궁리하는 그녀의 표정을 읽은 피아로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단지 거대해서 눈에 보였을 뿐일세.”

실제로 용의 발톱은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피아로조차도 바람의 흐름이 바뀐 것을 느끼고서야 눈치 챘다.

막말로 소름이 돋았다.

메르세데스도 비슷한 감상을 느낀 듯했다.

빤히 제논을 살피는 투명한 눈동자에 은근한 호승심이 깃든 걸 보면.

‘과연 드래곤은 지고한 존재로구나.’

드래곤의 위대함을 실감할수록 그리드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피아로였다.

이쯤 되자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그리드의 옛 모습이 거짓 같았다.

마침 사람들이 하나둘씩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멋진 드래곤의 모습에 매료되었던 그들이 뒤늦게 공포를 느끼고 하얗게 질려갔다.

하지만 잠시뿐이다.

사람들은 다시 공포를 잊었다.

[내 습관처럼 인간을 해치고 말았구려. 미안하오... 죗값을 치르라면 치르겠소.]

그리드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드래곤의 모습이 황당해서 공포를 잊게 만들었다.

“백번 죽어 마땅한 놈이었습니다.”

그리드는 제논을 존중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짊어질 줄 아는 그의 고매한 성정이 좋았다.

한데 살찐 비룡 취급이라니...?

그리드가 불쾌할 지경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표정을 읽은 제논이 크게 오해했다.

황급히 아공간을 펼쳐서 선물을 꺼냈다.

[오늘 당신께 바치고자 준비해온 내 비늘이오. 심장 부근을 감싸며 자랐던 비늘이라 특히 단단할 것이라고 자부하오.]

바친다.

내 비늘.

드래곤이 입을 열 때마다 튀어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의 의식을 점차 아득하게 만들었다.

‘진짜로 등에 태울 기센데?’

저래서야 조금 전 죽은 흑마법사의 말대로 비룡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나?

그리드에게 길들여진 듯한 드래곤의 모습에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고,

‘확실히 다르군.’

그리드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소중히 잘 쓰겠습니다.”

같은 드래곤의 비늘이라고 해도 부위에 따라서 질이 달랐다.

이번에 제논이 준 비늘은 몹시 훌륭해서, 그간 모아온 비늘과 합쳐서 견갑과 투구를 만들면 대단한 작품이 탄생할 것 같았다.

[영광이오.]

지옥, 바알, 아스가르드, 천사와 신들, 무후총의 망령, 그리고 칸.

쌓여만 가는 근심거리 탓에 진심으로 웃는 일이 적어져가던 요즘.

그리드가 오래간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혜안으로 읽은 메르세데스가 감격했다. 제논에게 은근히(?) 품었던 호승심을 거뒀다.

한편 네펠리나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미치광이라서 차라리 다행이구나. 그리드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겠어. 다만 내가 상종해선 안 된다. 아쉽지만 아버지의 광증을 풀 힌트는 다른 곳에서 얻도록 하자.’

살만 뒤룩뒤룩 찐 비룡.

제논에게 외쳤던 흑마법사의 심정에 공감하는 네펠리나였다.

이날.

전 세계가 그리드와 드래곤을 주제로 들끓었다.

드래곤에게 비늘을 갈취하는 마당에 설마 바알과 싸워서 지겠냐며,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용기를 북돋았다.

드래곤의 움직임에 반응했던 메르세데스와 피아로의 무용을 칭찬하면서다.

특히 드래곤을 상대로도 기가 죽지 않았던 메르세데스의 모습에 매료 된 사람이 많았다.

그리드가 친히 사도들을 이끌고 레이단을 방문한 보람이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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