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7권 - 6화
게임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스토리에 결말이 있거나 컨텐츠가 고갈되게 마련이니까.
비단 싱글 게임 뿐 아니라 다중 사용자가 즐기는 온라인 게임도 마찬가지다.
개발진이 매번 새로운 컨텐츠를 추가한다고 해봤자 큰 의미가 없는 탓이다.
각 분야 최고의 실력자 수백 명이 수천억 자본을 등에 업고 만든 영화도 쫄딱 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쉽다.
게임 업계 종사자들은 신이 아니다.
다수의 사람을 만족시키는 컨텐츠 개발에 항상 성공하진 못했다.
도리어 업데이트를 거듭할수록 반발을 사는 게임이 부지기수였다.
결국 모든 게임은 서비스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용자가 줄어들게 마련이었고 끝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PvP 시스템이 존재하는 온라인 게임의 수명이 특히 짧았다.
PvP는 자연히 승자와 패자를 갈랐고, 승자에게 더 좋은 보상이 뒤따르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됐기에.
게임의 수명을 늘리기 위한 방법이 뭘까?
게임업계가 오랜 기간 고민해온 최대의 난제.
그 해답이 바로 시즌제에 있었다.
일정 기간이 지날 때마다 게임 환경을 초기화하는 식으로 이용자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이다.
체스류 게임이나 AOS, FPS 등의 게임처럼 단순히 랭킹을 초기화하는 수준이 아니다.
MMORPG 경우엔 스토리와 레벨을 완전히 초기화시켰다.
사람들이 다시 처음부터 동등한 위치에서 게임을 시작하도록 말이다.
물론 적당한 선은 지켰다.
기존 이용자에게 박탈감을 덜 주게끔 전 시즌에 얻었던 직업과 아이템 등은 일부 계승됐다.
반면 퀘스트와 히든 피스의 내용, 사냥터나 던전 정보 등에 변형을 가미해서 기존 지식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전 시즌에서 많은 정보를 독점했던 승자에게 일반인과 똑같이 맨땅에 헤딩하며 알아가라는 의도였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간단한 예시다.
게임 회사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시즌제를 활용했다.
여러 획기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전 시즌의 승자와 패자, 기존 유저와 신규 유저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시즌제를 도입한 게임은 대부분 호평을 얻게 됐다.
시즌제를 도입한 게임과 도입하지 않은 게임의 수명 차이는 확연할 정도로 컸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Satisfy를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이 멸망해버렸지만 말이다.
“그리드가 제국을 넘어서 신계까지 만들어버렸다, 이대로는 그리드의 권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그따위 비약적인 논리로 시즌제를 운운하는 게 아닙니다. 막말로 요즘 누가 그리드를 의심합니까? 그리드는 강해진다고 해서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인물이 아니라 도리어 책임감을 느끼는 스타일입니다. 위인이죠.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시즌제를 도입해야한다고 열변을 토하던 교수가 도중에 중립 기어를 박아버렸다.
그리드를 좋아하는 여론이 절대다수로 많다는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자신의 의견이 객관적가치를 지녔다고 어필하기 위한 수작일 터였다.
“게다가 지옥에 이어서 천상까지 플레이어의 적이라는 게 명확해진 시점입니다. 그리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하는 인류 입장에서 템빨계의 탄생만큼 반가운 소식도 없죠. 더욱이 Satisfy를 단순한 롤플레잉 게임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전체의 2할이 채 안 된다는 통계도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단순히 집이나 정원을 꾸미기 위해서, 가족이나 연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낚시나 운동 등의 여가활동을 즐기기 위해서, 혹은 업무 용도로 활용하기 위해서 등등 다분히 일상적인 이유로 Satisfy를 즐긴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죠.”
후로이의 살벌한 눈길을 피하며 물로 입을 축인 교수가 말을 잇는다.
“저는 단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드와 랭커들이 지옥과 천국을 토벌하고 모든 이야기가 끝을 맺었을 때, 혹은 토벌에 실패해서 사람들의 일상이 지켜지지 못하게 됐을 때,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Satisfy를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는 거죠.”
“세상을 초기화하면 NPC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교수가 어떤 말을 할 때마다 그리드를 운운하며 칭찬하자 나설 기회를 잡지 못하던 후로이가 적절한 순간에 말을 끊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교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NPC요? 굳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닐 텐데요? 세상이 초기화 된다는 것은 시스템의 초기화를 뜻하고 그럼 NPC도 당연히 함께 초기화 될 거 아닙니까?”
“저는 NPC들에게 다시 시작되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시킬 거냐고 물었던 겁니다만, 당신은 NPC들을 죽일 생각부터 했던 거군요. 잠재적 살인마 주제에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다니. 말세로군.”
“죽...? 지금 무슨...”
교수가 당황했고 이때부터 후로이의 원색적인 비난이 시작됐다.
교수가 쌍둥이라는 점까지 이용해서 욕설을 퍼부어댔다.
누구나 납득할 만한 논리를 제시하진 않았다.
교수부터 그리드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니까.
NPC를 초기화 한다고?
그게 무슨 미친 개소리란 말인가?
오직 그리드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활동하는 후로이에겐 교수를 욕할 명분이 차고도 넘쳤고, 욕을 하는데 있어서 논리 따윈 필요치 않았다...
“어... 음... 잠시 광고 보고 오시겠습니다.”
기껏 힘들게 섭외한 템빨단의 간부를 함부로 제지하지 못하던 진행자가 간신히 수습했다.
사람들은 시즌제에 부정적이라는 설문 조사 결과를 확인하면서다.
당연한 결과였다.
Satisfy는 일반적인 게임과 달랐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게임보단 또 다른 세계로 인식하고 활용했다.
퀘스트를 진행하고, 몬스터를 잡고, 레벨을 올리고, 타인과 경쟁하고, 세력을 키우고... 그런 건 Satisfy의 지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드와 템빨단을 응원하는 이유다.
사람들은 평화를 바랄 뿐이었다.
굳이 시즌제를 도입해서 기껏 적응한 환경, 쌓아온 인연 등을 초기화해야한다는 주장 따위 헛소리로 치부했다.
S.A그룹도 마찬가지였다.
게임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업데이트조차 않는 회사가 무슨 시즌제를 도입하겠는가.
교수는 욕을 먹어도 싸다는 게 사람들의 공통 된 의견이었다.
***
템빨국의 상징은 한때 대장장이였다.
그리드를 필두로 삼은 수천수만 명의 대장장이가 국가의 살을 찌웠다.
자연히 공업이 발달했고 많은 분야의 기술자가 유입됐다.
국가가 번성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장인이 된 기술자들이 도제 교육으로 새로운 기술자를 생산하기도 했다.
장인의 나라인 것이다.
“혹시.”
3개의 신전이 마주보는 지점에 생긴 호수.
가리온과 피아로가 만든 그 거대한 호수를 장인들이 아름답게 꾸몄다.
호수 주위로 다양한 색채의 꽃과 나무를 심었는데, 지면 위로 백색 자갈을 깔아 도심 한가운데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운치가 있었다.
호수 자체가 라스가 기거할 신전이었기에 라스의 신상과 초상화를 그린 벽 등은 호수 주변에 듬성듬성 배치했다.
마치 자연 속에 펼쳐진 전시관 같은 느낌.
전체적인 규모는 그리드의 신전보다 훨씬 컸다.
템빨계의 크기가 신전의 크기와 정비례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작정 크게 지어본 것이다.
설령 비례하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앞으로 템빨계는 이 호수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호수는 무조건 커야 이롭다는 판단이었다.
“무패왕을 아십니까?”
라스가 죽어서 신이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생긴 의문이 있다.
무패왕 마드라.
살아생전엔 제국의 대군을 홀로 베어 조국을 수호했고, 죽어선 데스나이트가 되어 번헨 열도를 지켜낸 존재.
아쉽게도 번헨 열도의 인마대전은 역사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조국 루반나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존재했었다.
제국에서 무패왕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긴 했으나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루반나의 백성들만큼은 무패왕 사후 최소 수십 년 동안 무패왕을 그리워하고 제사를 올렸을 수도 있다.
숭배했을 거란 의미.
“마드라, 당연히 알지요.”
드비리온과 라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반면 가리온은 무패왕을 알고 있었다.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무패왕의 검술의 위력을 떠올린 그리드가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가리온이 마드라를 모를 리 없다.
마드라도 어지간히 부수고 다녔을 테니까.
“그 또한 인신이 된 건 아닐까 궁금하신 거겠죠.”
“네... 아무래도.”
딱히 기대는 안 했다.
마드라의 육신과 영혼은 더럽혀졌다.
파그마에 의해서 언데드로 전락하고 최근까지도 번헨 열도에 머물렀었다.
데스나이트로 존재하면서 인신이 된다?
데스나이트와 별개의 자아가 신이 될 가능성이 마냥 없진 않겠지만, 현실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마드라는 전설이다.
심지어 전설 중에서도 특출했다.
평범한 소년이었던 라스와 입장이 다른 것이다.
신이 되기 전에 천사로 선별됐을 가능성이 높다.
천사가 된 이후엔 숭배될지언정 신이 되지 못했을 거다.
‘부디 내 추측이 틀렸으면 좋겠군.’
그리드는 자신의 예상이 꽤 자주 틀린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예상도 틀리길 바라고 열심히 추측한 것인데,
“그는 신이 되지 못해요. 당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언데드로 타락했기 때문이죠.”
“...”
이번만큼은 예상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가리온의 아름다운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바알의 노예가 됐을 공산이 커요. 바알이 가장 좋아하는 영혼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불행한 영혼이라고 들었거든요. 안타까운 일이죠.”
바알의 노예가 됐을 거라고...?
괜한 호기심을 품었다가 기분만 우울해진 그리드가 탄식할 때였다.
“워프 게이트가 준비됐습니다.”
기사 한 명이 부복하며 아뢰었다.
‘왜 매번 절을 하는 거지.’
갓 핸드가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부질없게도 기사는 다시 넙죽 엎드렸다.
그를 앞장서 걷는 그리드의 붉은 예복이 펄럭이면서 노을빛 신성이 번진 까닭이다. 절로 경외심을 품게 만드는 광경이라 조아리게 되었다.
***
곧 도착한 워프 게이트 앞에는 브라함과 사리엘을 제외한 사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으...”
네펠리나의 안색이 창백하다.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위대한 해츨링답지 않지만, 그리드에겐 그 모습이 굉장히 익숙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드는 네펠리나의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지질 않았다.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절대자로 행세할 드래곤...?
저 아이가?
“굳이 함께 안 가도 돼.”
그리드가 네펠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언젠가부터 자신을 부모처럼 대하는 네펠리나를 자연스럽게 딸처럼 대하게 된 것이다.
로드와도 꽤 친해진 모양이던데... 로드가 오빠 역할을 맡은 것 같아 황당할 따름이다.
“아니, 갈 것이다. 나는 꼭 보고 싶구나.”
회색룡 제논.
비록 고룡의 자식은 아니나, 다 자란 성체 드래곤이 그리드와 교류를 맺었다고 한다.
진실로 판명난지 오래다.
하지만 네펠리나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존엄한 드래곤이 다른 존재와 교류를 맺었다는 사실이 실감날 리 없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필시 광증을 앓는 것이니라.’
제논이라는 놈은 내 아버지와 같은 증세를 겪고 있을 확률이 높다.
무지막지하게 위험한 놈이라는 뜻.
무슨 꿍꿍이속을 품고 그리드에게 접근한 건지 알아 볼 필요가 있었다.
‘덤으로 운이 좋으면 아버지의 증세를 호전시킬 힌트를 얻을 수도 있겠지...’
어쩌다 보니 일의 경중이 반대가 된 것 같지만, 아무튼 네펠리나는 위험을 감수했다.
자칫 제논에게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알고도 그리드와 동행하길 선택했다.
“가지.”
그리드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가장 먼저 그리드가 워프 게이트에 진입했고 메르세데스와 피아로, 지크와 네펠리나가 차례대로 뒤를 따랐다.
사도 전원 그리드와 같은 옷을 입은 채였다.
명주실을 짜서 만든 얇은 예복.
밑단은 무릎까지 내려오고 소매는 넓어서 화려하다.
움직일 때마다 너울거리는데, 신과 사도들의 모습을 한층 더 신비롭게 가꿨다.
***
[못 본 새 더 헌앙해지셨구려.]
레이단은 인파로 가득했다.
이제는 명물이 된 ‘드래곤의 강림’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드래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평생 보지 못할 존재로 여겨졌던 절대종.
그의 화려한 등장에 넋을 빼앗겼던 사람들이 일제히 워프 게이트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드가 있었다.
그를 발견하고 눈높이를 맞추는 드래곤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긴 목을 아래로 뻗는 모습이 마치 고개를 숙이는 듯해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예상보다 훨씬 더 미쳤느니라.’
제논의 정중한 태도가 네펠리나를 질색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