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권 5화
먼 옛날.
어느 왕국의 고을에 새로운 영주가 부임했다.
욕심이 몸시 많은 자였다.
온갖 핑계를 동원해서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율과 노역을 부과했다.
영주성의 성벽과 첨탑이 높아질수록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물론 백성들이 넋 놓고 당했던 것은 아니다. 임금께 영주의 죄목을 나열한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나라는 그들을 돕지 않았다.
영주가 세율을 올린 판단이 합당하다는 이유였다.
혹시 몰라 파견한 감찰관은 영주에게 뒷돈을 먹고 백성들의 고충을 외면했다.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성벽을 높이 쌓은 영주의 공을 도리어 높이 평가했다.
감찰관이 돌아간 이후.
영주는 백성들을 원망했다.
내게 충성하고 복종해야하는 너희가 왜 나를 배신한 것이냐며,배신감에 치를 떨며 백성들에게 적대감을 품었다.
그때부터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생겼다.
잘 먹지 못해서 병에 걸리고 죽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갔다.
그들을 구한 사람이 바로 라스다.
영주를 잘못 만나 삶을 잃고 목숨마저 잃어가는 사람들.
그들을 가없이 여긴 소년은,자신의 비상한 머리와 부친의 권력을 이용해서 백성들을 도왔다.
절묘한 위치에 제방을 쌓고 대규모 어획을 해서 백성들에게 베풀었다.
부친의 의심을 사진 않았다.
단지 큰 호수를 독점하고 싶어서 제방을 쌓은 거라고 설명했으니.
영주의 방해도 없었다.
그의 부친이 영주였으니까.
악독한 영주의 아들이었던 소년은,자신을 사랑하는 아비의 마음과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을 도운 것이다.
소년 덕분에 백성들의 굶주림이 해소되어가던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아들이 만든 호수의 쓰임새를 알게 된 영주의 눈이 돌아간 것이다.
호수에 독을 풀었다.
검게 변한 호수 위로 죽은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다.
죽은 물고기의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수면은 보이지 않고 물고기의 배만 보일 지경이었다.
백성들은 탄식했고 소년은 절망했다.
“저들의 부모가 되셔야 할 분이 어찌 그러십니까?”
태어나 처음으로 아비에게 호통 친 소년이 호수에 몸을 던졌다.
인간의 피와 섞여야 비로소 물을 정화하는 약초를 잘근 씹은 뒤였다.
저들에게서 호수를 빼앗으면 죽어서도 아버지를 원망하겠다는 아들의 원망이,저주가,영주의 귓전에 영원토록 맴돌게 되었다.
호수가 검게 죽었다가 다시 푸르게 살아난 그날.
소년은 죽었다.
죽어서야 신이 됐다.
인신 중에서도 드문 경우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소년은 자신의 죽음을 몰랐다.
인간들의 염원으로 다시 태어난 이후 복잡하게 얽힌 기억이 죽음을 망각시킨 탓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에서 피가 아닌 물을 흘리는 소년.
어획의 신 라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리드 일행을 낯설게 느끼는 눈치였는데,그리드의 정체를 어렴풋이 추측했던 드비리온과 전혀 달랐다.
아무래도 호수와 강을 전전하며 연명해온 탓에 속세를 모르는 듯 했다.
“템빨신이라고 합니다.”
“템... 빨신.”
“그대처럼 인간들의 염원으로 탄생한 신이자 대제국의 황제이기도 해.
인간들을 여러 입장에서 지키고 보살펴 오신 분이란다.”
“전 사람들을 보살핀 적 없습니다.”
가리온의 첨언에 그리드가 정색했다.
내가 사람들을 보살피다니?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경험이 많긴 하지만,보살폈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감히 질어질 수 없는 말이었다.
민망해서 얼굴이 터질 지경이다.
그리드의 반응을 물끄러미 살피던 라스가 빙그레 웃었다.
“얼마 전 탄생한 새로운 신계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군요.
어부들의 입을 통해 종종 소식을 접했습니다. 무척 훌륨하신 분이라고...
게다가 지금은 저를 구해주신 은자이시죠. 어떤 목적이 있어서 저를 찾아오신 걸 텐데,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두 팔 걷고 돕겠습니다.”
어둠 속 괴물을 목격한 직후였다.
인신들의 뼈를 제 뼈에 붙여 기괴망측한 형상을 이뤘던 괴물이다.
라스는 확신했었다.
이 순간의 공포를 죽어서도 잊지 못할거라고.
지옥에서 유명한 악마들을 마주 할지언정 잠시 후 내 몸을 잘근잘근 씹어 먹을 저 괴물보단 두렵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한데 지금 바로 공포를 떨쳐냈다.
덜덜 떨리던 몸이 거짓말처럼 진정됐다.
물과 호수를 노을빛으로 물들인 그리드의 신성이 따스해서였다.
무후총에 끌려가기 직전 그리드에게 구해진 라스는,그리드의 수준을 정확하게 가늠했다.
대단히 고강한 자.
한데 심지어 겸손하고 건전한 품행을 지녔다.
이자를 의지하고 싶다.
라스의 본능이 희미한 바람을 품은 즉시.
“저희의 가족이 되어주십시오.”
그리드가 용건을 꺼냈다.
“템빨계에서 저희와 더불어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강자의 강요 따위 추호도 없는 정중한 요청이었다.
더군다나 라스는 오랫동안 고독했고 불안했었다.
마음의 이끌림을 느꼈다.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물고기가 없는 곳에선 제 존재 의미가 흐릿해집니다. 애초에 제겐 딱히 권세가 없습니다.
당신들의 세계에 머물 자격이 있을지 의문입니다만...”
얼마 전 탄생한 새로운 신계는 규모가 몹시 작았다.
호수나 강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설령 강이 있을지언정 라스는 약한 신이다. 사람들의 어획을 돕는게 고작이었다.
이런 내게 쓰임새가 있는가?
스스로를 의심하는 라스에게 가리온이 설명했다.
“그대가 함께하는 것만으로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된단다. 본디 신계란 많은 신이
머무를수록 세가 커지는 법이고 그대는 작게나마 풍요를 상징하는 신이니까.
사람들에게도 이로울 거야.”
사냥의 신 드비리온과 어획의 신 라스.
이들의 본질은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는 것에 있다.
함께할 경우 궁합이 좋았다.
템빨계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터였고 사람들은 감사함을 느끼며 신들을 더욱 숭배할 것이었다.
이로운 순환이 완성된단 의미다.
물론 호수나 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가리온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굳이 근심할 부분은 아니었다.
가리온이 대지의 신이며 템빨신의 사도 중엔 피아로가 있다.
둘이 힘을 합치면 템빨계에 호수나 강을 만드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하면 함께하겠습니다.”
라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어획의 신 ‘라스’가 템빨계 소속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신을 영입하여 템빨계의 레벨이 1 올랐습니다.]
[템빨계에 라스의 신전을 건설하면 템빨계의 규모가 조금 확장될니다.]
[사냥의 신 드비리온과 어획의 신 라스가 <풍요의 신들(1)> 효과를 발생시깁니다.]
[우호적인 존재가 템빨국을 방문할 경우 경험치 획득률 상승과 공복 페널티 감소,
숲에서 이동 속도 상승,잠수 시간 증가 버프를 얻습니다.]
‘됐다.’
시작이 좋다.
그리드는 기뻐서 속으로 쾌재를 질렀지만 마냥 웃진 못했다.
조금 전 리치들이 왜곡시킨 공간을 베고 진입했던 무후총에서 마주친 망령이 마음에 걸렸다.
예상보다 강하고 사악한 존재였다.
순수 악.
바알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 놈의 활동 반경이 예상보다 크다 이거지...’
마냥 방치했다간 후환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섣불리 토벌하기엔 꺼려지는 부분이 많았다.
무후총의 규모가 굉장히 크다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Satisfy 최대 규모의 던전.
그리 단언해도 좋을 정도로 무후총은 거대했다.
외부에서 봤을 땐 숲과 산으로 보이는 수준이라 도리어 오랜 세월 발견되지 않았었다.
규모가 큰 만큼 얼마나 많은 함정과 시련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다.
망령에게 도달하기까지 무척 긴 시간이 걸릴 터였다.
게다가 도중에 마주칠 간부 격 존재들의 수준만 해도 초네임드급 보스 수준일 공산이 컸다.
그리드 혼자서 토벌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고 사도들을 동원해야 공략 가능성이 보였다.
한데 지금은 무후총 공략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자원을 아껴야 했다.
단적인 예로 물약이다.
피해를 입었다가 복구한 레이단의 염금술 시설에서 만드는 물약들은 바알 레이드를 대비해서 비축하고 있었다. 무후총에서 소모하기엔 시기적으로 옳지 않았...
‘아니,그게 아니지.’
준비한 자원을 모조리 무후총에 써버린다고 가정해보자.
공략에 실패하면 또 모를까,성공하면 손해보다 이득이 훨씬 더 컸다.
그리드와 사도들의 레벨이 크게 오르고 강력한 아이템도 대량으로 획득할 테니까.
‘일정을 조율하자.’
어차피 지옥 원정대에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적어도 템빨단 1군이 전원 500레벨을 달성할 때까지 그리드는 바알 레이드를 미루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때 였다.
그리드의 생각을 헤아린 가리온이 충고했다.
“무후총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아요.”
“망령이 그 정도로 강합니까?”
“망령이 강한 건 둘째 문제죠. 망령의 본질을 생각해보세요.”
“망령의 본질...? 신화 포식자 아닙니까?”
“아뇨. 그건 부가적인 역할에 불과하죠. 무후총의 망령이 왜 무후총의 망령이겠어요?
무후총을 떠나지 않기 때문인데,무후총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또 뭘까요.”
“그야 무후총을 지키기 위해... 아.”
그리드가 망령의 본질을 깨달았다.
놈은 무후총의 수호자다.
여태껏 많은 인신을 사냥해오면서도 놈은 단 한 번도 무후총을 벗어난 적이 없다.
얼핏 그레니어의 산군과 달았지만 명백히 다른 점이 있다.
산군이 지키는 그레니어는 단순히 산인 반면 무후총은 결국 누군가의 무덤이라는 점이다.
무후총의 망령은 왜 하필 누군가의 무덤을 수호하는 걸까.
어쩌면 무덤의 주인이 그걸 바라서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겼다.
“망령을 해쳤다간 자칫 무후총의 주인을 자극할 수도 있는 거죠.”
“무후총의 주인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저도 몰라요.”
“당신이… 모르신다고요?”
무후총은 대지 위에 건설 된 무덤이다.
한데 대지의 신 가리온이 무후총의 정체를 모른다니?
그리드는 당황했고 가리온의 아름다운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네,아시다시피 제 권한은 절대적인 게 아니잖아요? 제가 대지를 보살피게 된 계기는
결국 어머니가 그것을 바라서였고,어머니께는 저를 통제할 권리가 있었죠.
무후총은 제 입장에서도 불쑥 생긴 시설이었어요. 무후총을 만든 존재는 아마도
어머니이거나 어머니에 버금가는 존재일 가능성이 높은 거예요.”
무후총을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고 판단하는 이유다.
그곳엔 불길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깊이 염려하는 가리온의 모습을 본 그리드가 애써 관심을 거뒀다.
‘굳이 지금 무후총에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인신을 섭외하는 중이다.
곧 제논의 전리품이 도착할 시기이기도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귀환합시다.”
템빨계에 나란히 선 그리드,가리온,드비리온의 신전이 마주보는 지점에 커다란 분수가 있다.
그 자릴 호수로 바꿔서 라스의 신전을 만드는 건 어떨까.
생각해본 그리드가 귀환 주문서를 꺼냈다.
같은 시각.
“혹 부모님과의 관계가 소원하진 않습니까?”
“그걸 지금 갑자기 왜 묻소?”
“교수님껜 쌍둥이 동생이 둘씩이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현실에선 후로이가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식 중에 반드시 후레자식이 태어날 거란 사실을 예측하시고 셋을 동시에 낳으셨으니,
교수님의 부모님은 필시 훌륭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위인전이 라도 출판하시라고 잘 아는 작가를 연결해 드려야겠어요.”
Satisfy에 시즌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토론자를 강도 높게 비판한 까닭이다.
NPC야 초기화하면 그만 아니냐는 토론자의 망발이 후로이를 자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