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권 4화
태초신들의 의도로 탄생한 신,혹은 반신과 달리 인신의 목적성은 흐릿하다.
영문도 모르고 태어난 자가 절대다수였다.
어느 날 문득 거머린 권능과 영생을 달갑게 여기는 자가 적었다.
아니,도리어 원망했다.
신화 포식자에게 표적이 되고 고통 받는 탓이다.
신화 포식자들은 집요했다.
우연히 인신의 기척을 발견하는 순간 대상의 배경을 연구한다.
인신을 탄생시킨 인간들의 염원을 토대로 인신 본인조차 모르는 본능을 파악했다.
그리고 미끼를 던져서 자신의 영역으로 유인했다.
예를 들어 드비리온이 무후총 근처의 숲을 방문했던 이유는,그 숲에 인간들을
풍요롭게 해줄 사냥감이 존재한다는 헛소문에 홀린 까닭이다.
그나마 다행히 무후총 내부에는 진입하지 않았고,덕분에 무후총의 망령에게 잡아먹히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만,그때부터 그의 삶은 지옥으로 변했다.
안 그래도 질풍의 하수인들에게 추적을 당하던 상황에 포식자의 하수인들까지 달라붙고
말았으니 잠시도 쉬지 못하고 매일 목숨을 위협 받게 됐다.
고통,고립.
대부분 인신들의 삶을 점철하는 개념이었다.
“견디기 힘들 거예요.”
대지의 신 가리온.
땅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거의 전부 살펴온 그녀는 인신의 고통을 헤아렸다.
삶을 견디지 못한 그들이 변질되어갈 것을 걱정했다.
반면.
“거기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소.”
드비리온은 단호했다.
“인신은,타락하지 않소이다.”
인간이었기에 인간을 이해하고,원망하지 않는다.
인간의 염원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 한다.
그리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사람이죠.”
인간은 오랜 역사 동안 존엄을 지켜왔다.
개개인의 지혜에 의존한 결과가 아니라 협동을 이룬 결과였다.
커다란 위기가 찾아와 위협할 때마다 인간은 협력했다.
평소에 죽자 살자 싸워온 상대와 서로를 의지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새로운 대적에 맞서길 반복하는 식이었다.
인신이 인간을 배반할 리 없는 것이다.
당장 그리드와 드비리온이 증거였다.
“흐흥.”
가리온이 슬며시 웃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크게 휜 눈으로 그리드와 드비리온을 힐끔힐끔 살피는데,기분이 몸시 좋아보였다.
“왜 그러시오?”
“그야 기뻐서요. 서로를 믿어주는 이들이 앞으론 나의 가족이구나,생각하니까 든든하네요.”
“가족은 무슨...”
드비리온이 정색했다.
인간시절부터 쭉 홀로 숲에서 살았던 그는 가족이란 표현이 영 낯설었다.
“가족이 뭐 대습니까? 한 지붕아래 살면 가족이죠.”
그리드가 웃으며 말하자.
“과연... 부인이 여럿이라 하더니 발상이 꽤나 자유롭구려.”
드비리온이 탄식했다.
딱히 핀잔을 주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감탄하는 태도였고,그리드 또한 당당했다.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사랑은 많이 나누면 나눌수록 좋더군요.
행복해서 여러모로 이롭습니다. 드비리온 님께서도 꼭 좋은 사람을 만나...”
그리드가 문득 입을 닫았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가리온의 빛이 묘한 압박을 줬기 때문이다.
어떤 기대가 담긴 눈빛.
‘뭐지…?’
그리드 입장에서 가리온은 수천 년도 더 살아오신 어르신이다.
그래서 소녀처럼 빛나는 눈에 담긴 열망을 섣불리 재단하지 못하고 의아해하는 그때였다.
“그만.”
드비리온이 신호를 보냈고,
드르륵!
물결치듯 뻗어나가던 땅이 움직임을 멈췄다.
“ 이쯤이오.”
누군가는 바다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호수의 앞이었다.
과연 미약하나마 신성이 느껴졌다.
호수 깊은 곳에서부터 옅게 번지는 파문이 세 신의 감각에 잡혔다.
“조금 늦은 것 같네요.”
“서둘러야겠소.”
인신들이 은거한 장소를 추측하는 드비리온과 땅을 통째로 음직이는 가리온의 공조는 무척 훌륭했다.
단 하루 만에 다섯 곳의 목적지에 도착해서 주변을 철저히 수색하고 지금 이 순간 한 명의 인신을 찾아냈을 정도다.
그리드의 기대보다 훨씬 빠르고 수월한 진행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대수림의 질풍에게 변고가 생겼다곤 하나,무후총의 망령 또한 인신의 수색과 추적에 능숙했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인신을 쫓아왔을 그의 하수인들은 그리드 일행보다 한 발 빨리 현장에 도착해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두 분은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곧장 호수로 몸을 던지려는 가리온과 드비리온을 그리드가 제지했다.
가리온은 땅 위에서,드비리온은 숲에서 온전한 힘을 발휘한다.
굳이 물속으로 떠밀어 약화시킬 이유는 없었다.
‘꼭 도움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드비리온을 찾아갔던 숲에서 마주쳤던 리치가 제법 강하긴 했다.
경험치 드롭량을 계산하면 최소 450레벨 이상이었는데 저 호수 밑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최소 15개가 넘었다.
물론 그리드에겐 위협거리가 아니었다.
랜디와 템빨골들만 보내도 처리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리드는 굳이 직접 나섰다.
유비가 제갈량을 직접 찾아가 삼고초려 했듯이,지유가 주머니피물들을 직접 포획 했듯이,인신을 섭의하기 위해선 그리드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충분한 정성과 호의를 보여야 저 쪽에서도 마음을 열어줄 테니까.
꽈앙!
그리드가 수면 아래로 몸을 던졌다.
‘어획의 신이라고 했지.’
어부들의 염원으로 탄생했다고 들었다.
호수의 생태계를 해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호감을 얻기 쉬울 거다.
판단한 그리드는 함부로 검을 뽑지 않았다.
심지어 이정의 구속구도 벗지 않고 쭉쭉 헤엄쳐나갔다.
사실상 코어 힘만 사용하는 것이다.
지하에서부터 연신 발생하는 충격파가 물의 흐름을 격렬하게 흔들었으나 그리드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래서 스탯은 무조건 높아야 좋다는 거다.
““그만… 포기해라…””
곧 목적지에 도달한 그리드의 귓전에 스산한 음성이 울렸다.
언데드 특유의 공허한 울림이 물속에서도 또렷하게 전파된다.
저 멀리,어두운 심연보다 짙은 검은 마기가 요동치는 게 보였다.
5기의 리치가 한 명의 소년을 포위한 형국이었다.
기세가 몹시 흉흉했다.
리치마다 둘씩 거느린 데스나이트의 덩치가 비정상적으로 커서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서릿빛 오크.’
테루찬의 일족이다.
다수의 리치를 거느린 만큼 무후총의 망령의 활동 반경은 예상보다 큰 듯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몇 번 마주쳤을 수도 있겠어.’
여태껏 그리드가 죽인 리치와 데스나이트는 한둘이 아니다.
그중 무후총의 망령의 하수인이 있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직!
그리드의 발끝에 뇌전이 맴돌았다.
진즉부터 최대치에 도달했던 속도에 청룡의 부츠가 반응하는 순간이었다.
뇌신이,강림했다.
콰자자작!!
““...!””
리치들의 붉은 안광이 큼지막하게 변했다.
위쪽 해류에 이변이 발생했다 싶더니 데스나이트들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것이다.
대응할 틈조차 없었으니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
““새로운,인신인가...””
지팡이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한 리치들이 그리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푸른 전류를 이루는 존재.
광범위한 구역에 감전을 일으키기 시작한 그것은, 번개의 화신이었다.
눈 뜬 채 죽은 데스나이트들의 커다란 머리통을 거머쥔 양손이 쇠사슬에 묶여있어 묘한 위압감을 줬다.
““번개의... 신... 인간들의 염원이 급기야 괴물을 만들었군...””
““사하란의 카일이,아닌가?””
““마력의 회전이,뒤틀린다. 신성에,의해서야. 저자는 진짜,신이다.””
““잡아라. 주인께서 기뻐하시리라.””
리치들이 떠들 때마다 마력의 파장이 커졌다. 동심원을 그리며 번지는 파문이 겹겹이 이어졌다.
하나하나가 마법이었다.
그리드를 구속하고,번개의 흐름을 제한하며,동시에 폭발을 준비한다.
‘대마법사급.’
당연하다.
애초에 리치가 되기 위해선 생전에 높은 경지를 이룩해야만 했다.
하물며 무후총의 망령이 거둔 존재들이다.
고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무덤의 주인이,오랜 역사에 걸쳐 수집한 전력의 수준이 낮을 리 없었다.
근데 뭐 어찌라고.
등 뒤에 쪼그리고 앉은 소년,어휙의 신 라스의 곁으로 갓 핸드를 띄운 그리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콰드득!
그리드를 구속했던 온갖 마법이 실타래 풀리듯 벗겨졌다.
전설의 격으로도 저항했을 마법들을 신의 격으로 저항 못할 리 없는 것이다.
““...!!””
리치들의 손이 바빠졌다.
손가락 관절을 역으로 꺾어 이루는 주술.
인간은 만들지 못하는 형태의 마법진을 그려 포격을 쏘았다.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녔다.
심연의 수압을 무시하고 초고속으로 그리드를 덮쳤다.
‘아아,누군지 몰라도 죽겠네.’
저항 끝에 리치들에게 포위당한 라스의 의식은 차츰 희미해지고 있었다.
강제 전송 마법.
다섯 리치가 협동해서 작동시킨 마법이 라스의 몸을 무후총의 망령으로 끌고 가고 있다.
대상이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강하게 압박하는 마법이다.
라스는 육신과 정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을 도우려 나타난 은인에게 감사함을 느낄 여력조차없이,다만 눈앞의 상황을 인지하는 게 한계였다.
“...!”
라스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카만 공간으로 전송 된 '눈’이 옥좌에 앉은 존재를 마주한 까닭이다.
뼈와 뼈를 이은 건가?
누구의 뼈를?
설마 그간 포식해온 신들의, 뼈란 말인가?
저건... 괴물이다.
대적 불가다.
무후총의 망령은 라스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식은땀이 비오듯 흘렀다.
몸을 감싼 물이 땀으로 벗겨지는 기분이다.
라스는 시선을 떼고 싶었다. 저 괴물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고 영영 기억에서 잊고 싶었다.
하지만 전송 된 눈은 라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무후총의 망령을 강제로 응시한 채 라스의 두 눈에, 기억에 똑똑히 새겨갔다. 그
럴수록 라스의 두려움은 커졌고 급기야 발작하기 시작했다.
‘괴로워.’
차라리 인간으로 죽고 싶었다.
이런 끔찍한 고통은 싫다.
하지만 나를 신으로 숭배한 자들을 원망하진 않는다.
독 풀린 호수의 물고기들이 모조리 죽어 둥둥 떠올랐을 때,그들을 도왔던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내가 그들을 의지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의 간절함을 알고도 어찌 그들을 원망하겠는가.
벌벌 떨리는 라스의 두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구원을 바랄 수 없음을 알았지만,라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타락하지 않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려는 어둠을 억눌렀다.
신이기에 그랬다.
그건,무력의 고하와 관계없는 신의 의무였다.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할 것이다.
하찮다는 듯이 비웃는 눈앞의 괴물도, 천상의 신들도,지옥의 악마들도,심지어 인간들도.
무릇 인간이란 이기적이란 사실을 알기에,라스는 한없이 큰 고독을 느꼈다.
하지만 이해했다.
곧 괴물 앞으로 완전히 전송 될 몸이 잘근잘근 씹어 먹히는 순간을 상상하면서도 그랬다.
‘무섭긴 해.’
내가 죽어 남길 뼈는 저 괴물의 어떤 부분을 채울까.
팔? 허리? 다리?
되도록 아래쪽이면 좋겠다.
괴물이 왕관처럼 뒤집어 쓴 저 늑골의 주인처럼 유독 눈에 티는 건 사양이다.
스륵.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아 붉게 충혈 된 라스의 두 눈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군가의 손이 만든 그림자였다.
피물의 손이 여기까지 뻗혔구나. 워낙 팔이 길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생각하는 라스의 코끝에 이질적인 냄새가 스쳤다.
언젠가 맡아보았던 함선의 냄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강철의 냄새였다.
괴물이 풍기는 죽음의 냄새와 전혀 달랐다.
““너어...느은...””
피물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생김새만큼이나 끔찍한 목소리였다.
라스의 몸이 한층 더 경직되는 순간이었다.
“기다려. 조만간 그 커다란 대가리 부수러 올 테니까.”
낯선 사내의 음성이 라스의 의식을 일깨웠다.
거짓말처럼 공포가 사라졌다.
콰드득!!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라스가 보는 세상이 바뀌었다.
다시 호수의 심연이었다.
검지 않고 밝았다.
차가웠던 물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호수 가득 번진 주황색 신성에 의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