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권 3화
세상이 참 많이 변했구나.
찻잔을 기울이던 그리드가 새삼 깨달았다.
마주보고 앉은 하야테를 통해서다
천 년 넘게 스스로를 유폐해온 용살자가 만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전부 그대 덕분이오.”
장밖에 스치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하야테가 빙그레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야테는 만사에 소극적이었다.
자신의 작은 부주의가 드래곤을 자극하고 속세를 위험에 빠뜨리진 않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자신보다 강한 적들과 맞서 싸우는 그리드를 보고 배웠다.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드를 보고 배웠다.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발전하는 그리드를 보고 배웠다.
피해서는 끝이 없다.
설령 패배할지언정 싸우고,배우고,발전해야 옳다.
“당분간 여행을 떠날 계획이오. 오랫동안 한 곳에 터를 잡고 존엄을 지켜온
상위룡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눌 거요.”
“대화...”
드래곤과 드래곤 슬레이어의 대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질 않는다.
서로에게 불을 롱고 칼침을 놓는 것도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당황하는 그리드의 속내를 읽은 하야테가 설명했다.
“태생적으로 고룡의 위협을 받는 대부분의 상위룡은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소.”
절대다수의 드래곤은 스스로가 위대한 종족이라는 자각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러므로 거침이 없고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보인다.
반면 소수의 상위룡은 인간의 관점에서 봐도 이성적인 부분이 있었다.
대부분 고통의 표적이 되는 탓에 신중해서다.
자부심으로 가득한 하위룡,하위룡 사냥에 혈안인 중위룡,상식 밖에 있는 고통과 분명히 달랐다.
그리드가 가르쳐주었다.
“광... 드래곤 나이트가 된 그대의 비화를 통해서 배웠지.”
“...”
차마 광신광룡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하는 하야테였다.
배려 아닌 배려였다.
드래곤 나이트와 관련 된 비화에 광신광룡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단순하다.
비화를 목격한 시점이 삼사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실제로 미친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걸 일일이 해명해야 하나.
자칫 구차해 보이진 않을까.
그리드가 잠시 망설이는 틈에 하야테가 말을 이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인신을 섭외하도록 하겠소.”
“...!”
하야테는 템빨계에 발을 들인 시점부터 구조를 파악했다.
그리드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정확히 간파하고 자신이 도울 방법을 모색했다.
인신의 수색과 섭외를 돕겠다고 결정한 계기였다.
그리드에겐 몸시 감사한 일이었다.
“결사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근 추이가 나쁘지 않다고 하오. 대수림의 질풍에게 이변이 생긴 눈치라고 하더군.”
인신을 두문불출하게 만드는 원인은 신화 포식자들에게 있다.
그중에서도 무후총의 망령과 대수림의 질풍이 활동 범위가 넓다.
높이 솟은 산을 영역으로 삼은 산군과 달리,그들의 영역은 규모부터가 압도적으로 컸다.
특히 대수림의 질풍의 하수인들은 '숲'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활개를 치는 까닭에 광풍이라고 불렸다. 인신들에게 가장 위협적이라고 했다.
‘드비리온도 자칫 쉽게 당할 뻔 했다고 말했었지.’
드비리온은 사냥의 신이다. 숲에서 활동할 때 여러 권능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연명하는 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무후총의 망령의 하수인들은 숫자가 너무 많았고 대수림의 질풍의 하수인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까닭에.
아무튼 신화 포식자는 강하다.
그리드가 직접 체험했다.
보통의 상대에게 변고를 겪을 리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리드가 입술을 매만졌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설마...’
“세상엔 숨어 지내는 겁쟁이들이 제법 많잖니. 썩어 사라질 힘들은 내가 거두는 편이 낫지.”
마리로즈.
사람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여태껏 없던 종류의 고통과 쾌락을 가르쳐준 그녀는,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었다.
그리고 신화 포식자를 압도할만한 존재는 하야테를 제외하고 그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신화 포식자를 잡아먹은 거야?’
질풍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후후 웃으며 혀를 날름거리는 마리로즈...
무시무시한 모습을 상상해본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하야테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대가 베풀어온 은혜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소.”
“부디... 몸 조심하십시오.”
“이래 뵈도 천 년 이상을 숨어지낸 몸이오. 자칫 고룡이 추적해온다 한들 내 한 몸쯤 건사할 수 있소.”
“네…”
미인계를 조심하라고, 그리드는 조언을 하고 싶었지만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로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지언정 하야테는 절대자다.
마리로즈와 마주치는 순간 정체를 파악하고 어련히 경계할 터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소.”
하야테가 라인하르트까지 달려온 이유는 그리드를 걱정해서였다.
백성들을 지키면서 싸우기엔 도미니언이 너무 고강했으니 힘을 보탤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다.
굳이 길게 머물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자리에서 일어나던 하야테가 문득 미소를 머금었다.
노심초사한 표정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던 아이린과 시선을 마주친 것이다.
그녀의 곁에 선 로드도 보았다.
그리드의 가족.
그리고 백성들.
내가 온갖 이유를 핑계로 외면해온 속세엔 소중한 존재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그리드가 일구고 지켜낸 존재들이었다.
‘두 번 다신 외면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하야테의 표정이 결연했다.
안 그래도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아이린과 로드가 반사적으로 위축되어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었다.
덥썩.
그리드가 하야테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두르지 않고 공손한 태도로,하야테의 두 눈을 응시한 채였다.
“재차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목숨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주십시오.”
당신의 목숨이 지닌 가치는,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과 비교해도 그렇다.
속세 너머에서 세상을 지탱해온 탑의 붕괴를 누가 어찌 감당할까.
그리드의 두 눈에 담긴 생각을 읽은 하야테의 마음이 씁쓸해졌다.
희생해선 안 되는 몸.
천 년이 넘도록 변치 않는 신세가 그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소.”
그것은,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다짐이기도 했다.
“...”
멀리 선 로드가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인간이되 신의 아들인 청년은 많은 걸 느끼고 있었다.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짊어진 고독과 책임을 통감하고 큰 자극을 받았다.
아버지의 발자취를 쫓던 여행을 돌이켜 본다.
많은 경험을 쌓고 감동을 얻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특별한 교감을 쌓진 못했다.
아버지가 지나온 길은 이미 단단히 완성 된 길이었기 때문에 로드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가 여행 중 느낀 감동은 대부분 아버지의 업적을 확인하고 감탄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치열함이 적었고 필사적인 무언가가 결여됐다.
하지만 이 순간 충족됐다.
그리드와 하야테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향유하면서,로드는 그간 자신의 발목을 붙잡아온 여유를 버렸다.
여러 훌륭한 스승들께 배웠던 가르침을 필사적으로 되새겼다.
급격히 확장 된 사고가 이해를 도왔다.
템빨계의 신성이 당연히 로드에게 호의적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았군.'
신전을 떠나는 하야테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로드의 잠재력을 느끼고 마음의 짐을 조금쯤 덜어낸 것이다.
***
지옥에서 활약 중인 플레이어들이 잦은 희소식을 보내오는 실정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마냥 기뻐하지 못했던 이유는,지상이 위태로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천사들과 무신 제라툴의 강림사건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기어코 등장한 도미니언이 쐐기를 박았다.
아스가르드가 대놓고 지상을 적대하기 시작한 이때 지옥에 집착하는 게 옳냐는 의문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그리드가 잘못 된 고집을 부린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더러 있을 정도였다.
이때 등장한 드래곤 슬레이어의 존재감이 몸시 컸다.
특유의 품격이 조금 전까지 천재지변을 일으켰던 도미니언을 언뜻 하찮게 만들었다.
굉장히 큰 갑옷과 창을 무장했던 도미니언과 상반되는 행색이어서 더욱 그랬다.
가벼운 옷차림과 느긋한 걸음이라니.
산책이라도 나온 줄 알았다.
내내 진중한 태도로 그리드를 마주했던 도미니언만 우스워졌다.
그 와중에 가장 놀라운 건 브라함의 태도였다.
브라함의 높은 콧대는 만인이다 아는 사실인데,하야테 앞에선 유독 겸손했던 탓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괴물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리드를 마주하는 태도가 공손했다. 신전 창가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는데,
손님인 하야테가 직접 차를 내리더니 그리드에게 손수 따라주기까지 했다.
만인이 목격했다.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한 기자들이 대서특필해서 전 세계에 전파됐다.
덕분에 그리드에게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의 의심과 불만이 쏙 들어갔다.
단순히 하야테의 취미가 다도일 뿐이었지만,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것이다...
“저게 바로 용살자의 힘인가...?”
로드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사실을 느낀 브라함이 전율했다.
막말로 뭐 한 것도 없이 세상을 바꾼 하야테의 파급력에 감탄을 넘어서 경악이 나왔다.
자신도 언젠간 반드시 용살을 이루겠다는 꿈을 재차 품으며 로드에게 손짓했다.
“너는 당분간 나와 함께하도록 하자. 네가 하야테에게 얻은 깨달음을 잊기 전에 확실히 교육시켜야겠다.”
“영광입니다!”
“고작 다도 따위의 무의미한 행동으로 깨달음을 주고 세계를 안정시키는 경지라...
용살을 이루면 자연히 도달하게 되는 경지일까…”
“...”
“...”
사도들이 브라함을 어이없게 쳐다봤지만 아무튼 분위기는 좋았다.
대수림의 질풍에게 변고가 생겼다라... 확실히,인신들이 꽤나 자유로워졌겠구려.
그들이 어디에 터전을 잡았을지 내 몇 군데 예상되는 곳이 있소.”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가리온과 드비리온을 대동한 그리드가 여행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리드는 언젠가 해보았던 고전게임 삼국지를 떠올렸다.
재야에 숨은 장수들을 섭외하기 위해 대륙 곳곳을 이 잡듯이 뒤졌었는데,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상황이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