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권 2화
경고란,말 그대로 ‘미리 주의를 주는’ 행위를 뜻한다.
어떤 결과의 전조이므로,경고 자체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행해졌다.
신의 경고가 위협적인 이유다.
전조를 생략한 절대자의 의도는 도무지 피할 길이 없다.
징벌과 비교하면 수위가 낮을지언정 반드시 목적을 이룬다는 법칙을 세웠다.
아주 먼 과거의 지크가 나태의 저주에 저항하지 못했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스가르드가 칠악성을 징벌하기에 앞서 보냈던 경고가 바로 지크를 잠재우는 것이었고,
지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저럴 수가?’
지크는 더욱 더 믿기지 않았다.
불쑥 나타난 전쟁의 신이 투척한 창.
그것은 필중해야 옳았다.
그리드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지 못할지언정 반드시 성과를 거둬야했다.
한데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드의 춤사위가,성역과 더불어 위력을 키운 권능이 도미니언의 창을,경고를 우습게 쳐냈다.
도리어 역으로 되돌려주었다.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진 격.
재차 무너지는 질서를 목도한 도미니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머니께선,왜?’
쩌어어어엉!!
도미니언은 날아온 창을 피하지 못했다.
그것은 템빨신의 경고였으니까.
주륵.
모든 걸 꿰뚫는 창과 무엇으로도 뚫지 못하는 갑옷이 충돌했을 때 결과는 ‘비긴다.’는 것이다.
다만 갑옷이 흡수한 데미지가 온전히 착용자에게 전달되므로 창이 무조건 손해는 아니다.
굳게 물린 도미니언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인간의 피처럼 붉었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종교인들의 믿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현장엔 삼신교 출신의 인간이 많았다.
하지만 감격하는 자가 없었다.
머잖아 죗값을 똑똑히 치르게 되리라...
자신이 더 이상 인류의 편이 아님을,앞서 도미니언은 천명했다.
흐릿하게 남아있던 믿음마저 버리게 만드는 태도였다.
이젠 삼신교 출신의 인간들도 오직 그리드만 의지했다.
템빨계를 세운 그리드를 삼신만큼 위대한 존재로 추앙하면서다.
그들의 마음을,도미니언은 고스란히 느꼈다.
하지만 괘씸하게 여기거나 분노하진 않았다.
오래 전 인간을 사랑했던 그는,이미 큰 실망을 맛봤었다.
그 뒤론 인간에게 어떤 기대를 품어본 적이 없다.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고 분노도 없었다.
배신을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순순히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한데.”
어느새 다가온 지크가 도미니언에게 검을 겨눴다.
규칙성 없이 회전하는 룬어가 발밑의 구름을 헤집고 있었다.
여신의 신성을 입고 금색으로 빛나는 구름을 접근조차 못하게 만든다는 것은,
지크가 신성을 부정하는 언어를 기어코 완성했다는 의미가 됐다.
- 최악의 변절자답구나.
도미니언이 말했다.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한탄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일곱 반신.
세간에는 칠악성이라고 알려진 그들이 배신했던 순간을 떠올려서다.
지크가 그들의 배신을 주도했었다.
- 머잖아 새 주인의 발목까지 붙잡을 기세로군.
룬어의 영향을 크게 받은 구름 일부가 색을 잃어갔다.
신성의 상실이다.
온통 황금이었던 하늘 곳곳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였다.
"그럴 일은 없소."
- 그건 너 자신도 모르는 일이지.
도미니언이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 지크를 바라보고 있다간 애써 묻어둔 과거의 추악한 기억이 떠오를까 두려웠다.
- 새로운 신계를 세운 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자신을 강타한 시점부터 그리드의 지배력에서 벗어난 창을 회수한 도미니언.
그가 여전히 지상에 선 그리드를 내려 보며 말했다.
- 너는 인간이 존엄하다고 믿겠으나 진실은 다르다.
머잖아 반드시 인간에게 실망하고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너를 위로하고 손을 내밀어줄 동반자는 이 세계에 없음을 명심해라.
어머니.
레베카 여신께선 템빨신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다.
템빨신이 아직 인간이던 시절부터 그랬다.
도미니언과 쥬다르는 그 사실을 알았으나,이유까진 알지 못했다.
설령 이유를 알았다고 해도 그리드를 이 이상 존중할 순 없었다.
새로운 신계를 세워 아스가르드의 영향력을 약화시킨 것은 명백히 선을 넘은 행위이므로,그리드를 영원히 적대할 생각이다.
그것이 주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었다.
“쓸데없이 비장하군.”
잠자코 있던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신전 앞에 선 채다.
저 의외로 영리한 놈은,템빨계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않고 있다.
고강한 사도들을 믿고 활용하는 태도가 몹시 자연스러웠다.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해두는데,내가 사람에게 실망할 일은 없다.”
막연한 믿음 따위가 아니다.
그리드는 최악의 인간을 이미 겪어 봤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인간을 제멋대로 재단하고,기대하고,시기하고, 실망했던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확연히 달랐다.
“꺼져.”
그리드가 축객령을 내렸다.
마음 같아서야 도미니언의 신격을 훼손시키고 싶었지만 장소가 너무 나빴다.
템빨계는 라인하르트 전체가 아닌 일부 신전을 뜻하니까.
라인하르트 한복판에서 싸우기엔 도미니언이 너무 강했다.
전투의 여파만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터였다.
‘저건 베기 까다롭다.’
그리드가 방금 전 지배했던 창의 정보를 떠올렸다.
<도미니언의 창>
공격력:41,000
내구력:21,300/21,300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신물입니다.
...
..
압도적인 공격력.
하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공격 시 무조건 관통한다.’는 옵션이었다.
도미니언의 갑옷은 베기와 찌르기 절대 면역 등의 옵션을 보유하고 있을 공산이 컸다.
단기결전을 노리는 게 불가능한 상대인 것이다.
‘저런 놈하고 싸우려면 시기를 잘 고를 필요가 있겠지.’
당장 급한 일은 새로운 신을 섭외하는 일이다.
템빨계의 레벨을 빨리 올리고 싶다.
적어도 라인하르트 전역을 감싸는 수준까지 키워놔야 바알 레이드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으리라.
‘지옥에 갈 때 가장 걱정되는 게 빈집털이를 당하는 거니까.’
템빨계가 탄생하기 전까진 감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스모펠을 비롯한 기사들과 사
리엘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템빨계가 있는 마당에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 진심이군...
도미니언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그리드의 확신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살아온 세월이 짧기 때문일 테지.
저놈도 언젠간 나와 같은 일을 겪게 될 테고 결국 나와 같아질 것이다.
스르륵.
하늘을 가득 채웠던 황금 구름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제히 더 높은 상공으로 치솟는 모양새가 장관이었다.
그 위에 선 도미니언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져갔다.
별다른 말은 남기지 않았다.
절대자의 풍모로 비췄다.
다짜고짜 나타나 렘빨신과 사도들을 대적하고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 사람들을 경탄시켰다.
그를 물러나게 만든 그리드는 당연히 더 대단해 보았다.
곧 도미니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집중됐다. 선망을 품은 채였다.
플레이어들의 눈이 특히 반짝였다.
신.
심지어 삼신 중 하나인 도미니언과 겨루고도 무사하다니?
그리드가 무신 제라툴을 패퇴시켰던 장면을 뉴스와 인터넷에서 수십 번도 더 접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감동의 크기를 비교할 수가 없었다.
‘뒤지는 줄 알았는데.’
십년감수하는 사람이 많았다.
템빨신전을 둘러싼 거룩한 신성.
템빨계를 촬영하기 바빴던 플레이어들은 사실 도미니언의 출현을 꽤 늦게 인지했다.
세상이 금박으로 뒤덮인 것처럼 반짝일 무렵에야 범상치 않은 구름떼가 몰려왔단
사실을 깨달았고,그때부터 주위를 살피다가 구름 위 도미니언을 발견했다.
[전쟁의 신 도미니언이 강림하였습니다.]
몇 명의 목격자가 생긴 직후 월드 메시지가 출력됐다.
거대한 신전을 등지고 선 그리드는 진즉부터 도미니언을 마중 나온 눈치였다.
도미니언이 뭐라고 떠들어댔다.
사람들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순간.
콰앙!!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폭발했다.
하늘을 반으로 가른 푸른 섬광이 그리드의 코앞까지 쇄도해 있었다.
도미니언이 투척한 창의 궤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다.
섬광이 가일층 짙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고작이었다.
역방향으로 선회한 투창이 도미니언을 강타하고 더 큰 폭음을 터뜨린 뒤에야 상황을 조금씩 유추하기 시작했다.
도미니언이 피를 흘렸다.
그리드에게 반격을 당한 것으로 보였다.
필시 큰 싸윰이 벌어질 터였다.
또 다시 많은 사람이 죽을 거란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데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리드와 그의 사도들이 신중하게 지켜냈다.
"흐음."
엘니다나.
평범한 템빨단원이 그 광경을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녀는 인마대전 이후 설립 된 템빨단 6군 소속이다.
인마대전 당시 템빨국을 지원한 공로로 템빨단과 밀접해진 라이언 상단 출신이었다.
명랑한 성격의 회계사인데,랭킹은 높지 않지만 셈이 빨라서 라우엘의 눈에 들었다.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라우엘이 직접 섭외했다.
라이언의 눈치를 보진 않았다.
라이언 상단과 관계가 밀접해졌다고 말하긴 했지만, 템빨단이 실제로 라이언 상단에게 호의적인건 아니었다.
템빨단은 라이언 상단을 집중 관찰 대상에 넣고 곁에 뒀을 뿐이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엘니다나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질 때쯤.
“느리군.”
브라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워낙 미성이라 소란 속에서도 귀에 꽂혔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브라함에게 집중됐고,이어서 브라함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금발의 미남자가 있었다.
주름 한 점 없는 옷깃과 단정한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깔끔하게 잘 생긴 얼굴과 멋진 조화를 이뤘다.
한 눈에 봐도 격조가 높아서 브라함의 형제인가 싶었다.
한데 이름의 색이 이상했다.
여태껏 본적 없던 옥색.
하야테라는 이름이 한층 더 낯설게 다가왔다.
“방향 감각이 흐린 편인가? 드래곤 슬레이어도 완벽하진 않은가본데,
너무 괘념치 마시오. 당신의 결점은 내가 메우면 그만이니까.”
“...!”
“...!”
두 눈을 부릅뜬 사람들이 헛숨을 삼켰다.
드래곤 슬레이어.
그래,얼마 전 월드 메시지로 등장했던 용살자의 이름이 필시 하야테였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던 와중에 의외의 인물까지 출현하자 사람들의 충격이 컸다.
신기해하고 반가워하는 한편 불안을 느꼈다.
원가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였다.
“괜찮습니다. 템빨계의 신들께서 당신들을 지켜주실 겁니다. 불안은 기도로 떨쳐내도록 하세요.”
사리엘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가운데 메르세데스가 피아로에게 전음을 보냈다.
- 하야테 공께선 귀환 주문서를 못 쓰셨잖아요.
"..."
- 하야테 님의 귀환 지점은 라인하르트가 아니니까요. 우리보다 한 발 늦으시는 게 당연하죠.
눈처럼 하얀 브라함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자신이 꿈꾸는 궁극을 이미 이룬 존재를 처음 만난 그는,겉보기와 달리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오늘은 관에서 자면 안 되겠군.’
잠을 설치다가 관을 부술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