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권 19화
‘회(回)를 첫 검초로 삼는 게 옳나?’
두 번째 6융합 검무.
새로운 검무의 창조를 앞둔 그리드의 고민이 깊어졌다.
후발선지 (後發先至).
늦게 칼을 내어도 상대방을 먼저 치는 묘리.
그리드가 반드시 습득해야 할 기술이었다.
적들의 수준이 그리드보다 높은 탓이다.
템빨계의 정보를 토대로 그리드는 실감했다.
여태껏 싸워온 천사와 신들이 얼마나 큰 페널티를 떠안고 있었는지.
한데도 고강했다.
특히 제라툴의 위계부턴 속도면에서 우월했다.
제라툴과의 전투를 복기하면 상황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지상에 떨어진 제라툴의 신격이 하필 그리드의 신격과 동률을 이루는 수준까지 격하되지 않았다면?
그리드와 제라툴의 신격이 교감하는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드는 무신의 시간을 자각하지 못하고 단칼에 베여버렸을 확률이 높다.
베인 후에야 인공 감각에 읽힌 검로를 깨닫지 않았을까.
‘물론 반응이야 했겠지만.’
막말로 그런 의심이 생길 정도로 제라툴의 검이 빨랐다는 말이다.
한데 그리드는 이미 거의 완전체에 가까운 상태였다.
레벨 면에서도,아이템 면에서도.
그에겐 강해질 수단이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은 이미 한계인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잠재력까지 쥐어 짜인 듯이 메말랐다.
현재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속도의 상한선이 증명했다.
대적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은 상한선.
즉,플레이어의 한계.
‘빌어먹을.’
욕지기가 났다.
몇 번이고 한계를 넘어섰는데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플레이어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닌가.
우린 대체 얼마나 더 노력해야…
“후우...”
원망이 분노로 벼려지기 직전.
심호흡한 그리드가 마음을 추슬렀다.
평정심을 잃어서 판단력이 흐려지면 좋을 게 없다. 안 하던 실수도 하게 된다.
‘초조해 할 필요 없어. 내가 강해질 수단은 아직도 많다.’
지금처럼 신위를 올려서 새로운 융합 검무를 창조하거나,템빨계를 키워서 유리한 영역을 확장시키거나,격을 올리는 방법 등이 남았다.
하나 같이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경험과 노력으로 극복할 문제였다.
게다가 템빨을 계속해서 발전시킬 수도 있다.
드래곤 웨폰 이상의 아이템이 실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장담하기 힘들었지만,그리드는 자기 자신을 믿었다.
템빨신이지 않나.
템빨신은 <아이템 창조>라는 레전드리 스킬을 기반으로 창조신이라는 과분한 이명까지 얻었다.
드래곤 웨폰 이상의 아이템? 까짓것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라비늄이 도울 것이다.
...아마도.
‘다 잘 될 거다. 고대의 주문서 남은 것도 여태껏 잘 보관해왔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그리드는 우선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6융합 검무로 후발선지를 구사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선 회(回)를 외면해야 한다.
후발선지는 반격과 개념이 달랐다.
반격이란 적의 공격에 응수하는 것이다.
적의 공격을 제압하길 추구하므로 적의 공격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반면 후발선지는 전체적인 흐름을 이용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보다 자유롭고 효과적이다.
이게 뭔 개소리냐고 물어봤자 소용이 없다.
그리드도 최근에야 알게 된 개념이라 제대로 정립하기 힘들었다.
‘아무튼 이게 맞아. 치즈와 치즈케이크가 닮은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르듯이 후발선지와 반격은 다르다.’
어제 먹은 치즈케이크를 떠올리는 그리드였다.
유라와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과 지슈카가 찾아와 있었다.
지슈카가 사온 치즈케이크의 맛이 기가 막혔다.
뉴욕에서 2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치즈케이크 전문점이 한국에 상륙한 기념으로 사왔다고했는데,여태껏 먹어본 치즈케이크들과 비교해서 월선 깊은 등미를 자랑했다.
살이 뒤룩뒤룩 찔 것 같은 맛이라 자주 먹긴 힘들 듯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불현듯이 떠오를만큼 맛이 흘륭했다.
‘지슈카랑 같이 먹어서 더 맛있던 걸 수도.’
유라랑 먹는 밥이 혼자 먹는 밥보다 훨씬 더 맛있듯이.
“템빨신 님?”
감미로운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가리온과 드비리온이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신들의 수준은 높았다.
그리드의 상념이 잡념으로 번진 걸 눈치 챈 기색이다.
“음... 제가 생각해볼 문제가 워낙 많은 탓에.”
“이해해요. 지옥을 견제하는 한편 아스가르드의 원한을 사고 계시니 마음 편한 순간이 있겠습니까.”
하여 걱정했다.
새로운 경지를 목표로 고민하던 그리드의 의식이 갑자기 흐름을 바꾼 걸 보고 눈 뜬 채 악몽을 꾸는 건 아닐까 염려했다.
템빨신 그리드.
고립 된 지상을 홀로 지켜온 수호신이 짊어진 책임을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리드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두 신이 눈빛을 교환하고 말했다.
“저희는 잠시 나가 도시를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사색에 힘쓰시기를...”
신은 숭배 받을수록 강해진다.
가리온과 드비리온이 그리드를 섬긴다고 해서 그리드만 의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왜 헐벗으시오?”
“잠시 뒤에 보면 알아요. 드비리온 당신도 그 냄새나는 가죽옷을 벗고 이 비단을 걸치도록 하세요.”
“...”
두 신이 사람들 앞에 서고자 떠난 후.
신전은 고요해졌지만 그리드 혼자 있는 건 아니었다.
노에와 랜디,그리고 템빨골들이 구석에 모여서 그리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템빨골들과 랜디는 숨소리조차내지 않는 반면 노에는 배를 내밀고 앉아서 털을 쩝쩝 핥아대는 중이다.
노에는 알고 있다.
자신이 뭔 짓을 해도 주인의 집중에 방해가 될 일은 없다는 걸.
우리 주인이 어디 보통 사람(?)인가.
실제로 그리드는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국가대항전 당시의 크라우젤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나’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던 순간들이 있다.
검로를 읽고 차단한 것?
그건 단순히 방어다.
검로를 예측하고 한 발 앞서 비튼 것?
그건 순수한 통찰이다.
갓 핸드가 찌른 빈틈에 반응했던 것?
그건 경이로운 감각이다.
압도적인 힘을 품은 검을 끌어당겨 위력을 반감시킨 건 고도의 기술이었으며,통찰하기 힘든 속도의 검을 역으로 되돌려왔던 건 반격기를 소모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드는 다른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았던 장면이다.
순수한 힘과 템빨로 크라우젤을 완벽하게 제압한 뒤 회심의 일격을 가한 순간.
시야가 불편해졌단 사실을 자각했다.
비산하는 돌의 파편들이 새삼거슬린다 싶더니 높이 쌓인 흙더미가 시야 한쪽을 가렸다.
그와 동시에 크라우젤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였다.
크라우젤의 운신은 여전히 불편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크라우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세상 전체가 훼방을 놓는 듯한 기분이었다.
바닥을 쓸면서 올라온 크라우젤의 발차기는 필시 그리드의 검보다 늦었고,느렸다.
하지만 흙먼지를 일으키고 예상 외의 것을 걷어찼다는 사실만으로 크라우젤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심지어 반격의 빌미까지 제공했다.
뛰어난 순발력과 통찰,감각,기술,거기에 행운까지 더해져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그때 당시 가장 놀란 사람은 크라우젤 본인이었을 것이다.
위기에서 벗어날 수단으로 날린 자진모리가 전투로 엉망이 된 지면을 휩쓸어 흙먼지를 일으키고,동시에 흙더미 속에 숨어있던 암석을 걷어차 자신의 몸을 튕겨줄줄은 그 자신도 몰랐겠지.
당시 크라우젤의 상황은 너무 긴박했다.
그러므로 계산의 영역이 아니었다.
발악적인 행동이 행운으로 연결된 거라고 해석해야 옳다.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는 그런 상황 자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싶단 바람을 품은 것이다.
단순히 흙먼지를 일으키고 암석을 걷어차는 등의 행위를 말하는게 아니다.
전투의 흐름을 지배하여 선공의 이점을 무위로 만드는 것.
자칫 늦게 자각한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리드가 원하는 건 이와 같은 상황들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모든 행위를 뜻했다.
조금 쉬운 예시를 들자면...
“1번아.”
그리드가 의지를 일으키자 갓핸드가 호응했다.
그리드의 품새를 고스란히 재현하더니 열망의 무아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리드는 공격을 뒤늦게 인지했다는 가정을 세웠다.
열망의 무아검이 가까이 다가올쯤에야 검을 뽑았다.
쩌엉!
허공의 인벤토리에서 뽑혀 나온 검의 궤적이 열망의 무아검의 측면을 때렸다.
열망의 무아검은 그리드에게 닿지 못하고 비껴나갔다.
반면 그리드가 뽑은 검은 처음 그린 궤적 그대로 쏘아져서 갓핸드를 후려쳤다.
그리드가 뒤늦게 뽑은 검의 궤적이 '상황’을 만든 결과다.
“그러니까 이런 식인데... 반격이랑 다르다고. 알겠지?”
“...응”
[예…]
신전 구석에 선 랜디와 템빨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공감하는 기색은 없었다.
노에가 뭉툭한 발을 휘적거렸다.
“알았으니까 설명 좀 그만해라 냥.”
“노에 넌 내가 쓸데없이 우기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냐앙?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혼자서 자꾸 설명하는 주인의 태도가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옹.”
“뭐? 이건... 구질구질한 설명따위가 아니야. 내가 공부하는 김에 너희도 함께
교육시키려는 배려인 거지. 노에 너도 탑에 머물면서 결사님들의 수업을 들었잖아?
그거랑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돼.”
“내가 볼 땐 주인이 주인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같…”
노에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역소환 당한 것이다.
이제야 제대로 집중이 되는군.
만족한 그리드가 제(制)의 검무를 떠올렸다.
대상의 행동을 제약하는 이 검무는 동격 이상의 존재들에겐 효용성이 떨어진다.
이프리트전,크란벨전,제라툴전,가브리엘전 등에서 꾸준히 실험해본 결과 평균 0.1 초의 효력을 발휘하는 게 한계였다.
물론 찰나지간에 승패가 갈리는 전투에서 0.1 초의 제약은 무시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무지막지한 파급력을 발휘할 잠재력이 있었다.
하지만 제를 쓰느라 소모하는 기회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대상을 0.1 초 동안 제압하려다가 그 이상의 기회비용을 소모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므로 그리드는 제를 낮게 평가해왔다.
특히 융합 검무에 제를 포함시키는 걸 꺼려했다.
횟수가 한정 된 검무에 제를 섞어버리면 데미지 기댓값이 크게 떨어졌으니까.
하지만 지금 막 생각을 바꿨다.
새로운 6융합 검무에는 제를 포함시키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후발선지를 자유롭게 구사하기 위해선 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후발선지가 필수인 이유는 나보다 훨씬 빠른 적을 제압하기 위해서다.
‘제의 가치는 적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빛날 거다.’
결정한 그리드가 본격적인 구상을 시작했다.
우선 제의 순서를 몇 번째로 둘 지에 대한 고민은 금방 끝냈다.
무조건 첫 번째다. 그래야 의미가 있다.
제 다음으로 연계할 검무는...
신속한 편이 좋다.
빠르게 치고 들어가야 극단적으로 짧은 CC를 유의미하게 활용할 여지가 생겼다.
‘연(聯)?’
동작이 너무 크다.
살(殺)이나 극(極)으로 파고드는 편이 좋겠다.
‘용(龍)을 쓰는 게 가장 효과적이긴 할 텐데.’
용은 검무 중 유일한 돌진기다.
그리고 돌진기는 대부분의 콤보에서 초석으로 삼기 좋았다.
하지만 제약이 너무 많다.
용이 솟구치는 돌진기이기 때문이다.
시전자가 대상의 하단에 위치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했다.
락(落)과 연계해서 궤도를 억누르는 방법이 있긴 했지만 그 과정은 추가 동작을 강요한다. 제의 유지 시간 내에 적을 제압하기엔 느렸다.
‘제와 다음 검무 사이에 순보를 섞으며?’
더욱 하책이다.
순보로 이동 중인 상태에선 공격하지 못하므로 제 직후 순보를 쓰면 0.1 초의 제한 시간을 스스로 날리는 격이 됐다.
게다가 '공간 이동’을 차단하는 권능은 천상계에 흔했다.
벌써 몇 번이나 발목을 붙잡히지 않았나.
순보가 먹통이 될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둬야만 했다.
‘...가만. 제를 발동시키는 동시에 브레스를 쏴서 추진력을 얻는게 가능한가?’
그리드가 즉시 실험해봤다.
제의 검무를 전개하는 한편 뒤로 뻗은 손에서 브레스를 뿜었다.
콰앙!!
그리드의 신형이 앞으로 빠르게 쏘아졌다.
제와 브레스의 동시 전개가 가능하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었다.
상체의 균형이 무너졌다.
브레스의 추진 경파가 워낙 강력한 탓이다.
브레스를 한쪽 손으로 쏜 영향으로 상체가 한쪽으로 크게 뒤틀렸다.
그리드는 그 자세를 역이용했다.
용을 써서 기울어진 상체를 자연스럽게 끌어올렸다.
“...이건 제대로 먹힌다.”
신전의 지붕을 꿰뚫고 솟구친 그리드가 커다란 희열에 휩싸였다.